[124] Ep.18 : 비상(飛上) (10)
***
무대 위에서 아오바의 연주가 시작되고, 대기실 복도에 기대어 있던 민준이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그의 피아노 선율에 엷은 미소를 그렸다.
과연 일본 클래식계에서 주목하고 있는 피아니스트다운 실력이라 할 수 있었다.
단지 그의 음악을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텅빈 오선지를 원본 그대로 옮겨 담아도 될 정도로 정확한 템포와 패시지를 지키고 있었다.
차민준은 피부로 느껴지는 그의 화려한 연주에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중얼대었다.
“과연 휴먼 메트로놈이라 불릴 만하구나.”
다음 순간 민준이는 눈을 감은 채 허공에 두 팔을 들어올렸다.
그리곤 무대 위에서 열연 중인 아오바 쥰이치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의 건반을 그대로 흉내내보았다.
‘이런 느낌인가?’
잠시 분위기에 취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그때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재빨리 손을 거두고 태연한 척 고개를 돌리자, 무대를 향하는 복도에서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무대를 마친 2번 연주자인가?’
그녀의 첫 인상은 민준이에게 아련한 추억을 불러왔다.
연주용 드레스와 화려한 색조 화장. 머릿결이 건반을 가리지 않도록 촘촘히 뒤로 빗겨낸 머릿결까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안나의 이름이 튀어나올 뻔했다.
“아, 미안해요.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부끄러움에 황급히 사과의 말을 건네자, 여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발터 뮐러의 제자. 차민준?”
“네. 맞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여성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친 순간. 잠시 경계하듯 주춤거리던 그녀는 이내 묘한 미소와 함께 자신을 소개했다.
“반가워요. 니시노야 요코라고 합니다.”
“아, 네. 제 이름은 이미 알고 계시니, 딱히 할 말이 없네요.”
“민준 씨야. 이번 콩쿨에서 상당한 유명인사니까요. 발터 뮐러의 제자라는 수식어를 제쳐두고서라도, 저희 같은 사람들에겐 꿈의 무대이기도 한 최고 지휘자와의 협주도 이미 경험하셨으니까. 같은 피아니스트로서 참 부럽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부러워하는 그런 사람을 스승으로 모실 수 있다니.”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뾰족한 가시가 숨어 있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굉장히 상대방의 신경을 건드리는 내용이었으니까.
그러나 민준이는 그녀의 말에 여유 있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지금 그 말. 니시노야 씨의 선생님이 듣는다면 무척 슬퍼하실 거예요.”
“뭐라구요······?”
“니시노야 씨를 가능성을 알아보고, 콩쿨에 올리기 위해 분명 수많은 노력을 하셨을 테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니시노야는 생각지 못한 민준이의 역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한 가지 덧붙여 드리자면 제가 어렸을 적. 발터 뮐러 선생님의 추천으로 참가했었던 쇼팽 콩쿨에서 선생님께 큰 실망을 안겨드렸습니다. 저를 위해서 쇼팽 콩쿨 심사 위원들을 향해 소리치던 모습이 생각나요. 결국 선생님 스스로 지휘봉까지 내려놓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었죠.”
발터 뮐러의 잠정 은퇴는 클래식계에서도 꽤나 유명한 사건이었기에 니시노야는 민준이의 말에 수긍하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 선생님은 저를 어떤 콩쿨에도 참가시키지 않았습니다. 그저 어느 때건 자유롭게 피아노를 칠 수 있게만 해주셨죠.”
“그런데 어째서 이번 콩쿨에 나오게 된 거죠?”
“글쎄요. 이제 와서 선생님의 생각이 달라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앞으로 어떤 콩쿨에서든 저를 보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설마. 그 말뜻은······?”
“더 이상 선생님을 실망시켜드리긴 싫거든요.”
그때 때마침 스텝이 다가와 무대 옆에서 대기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스텝과 함께 무대로 향하는 그의 모습에 니시노야는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이번 콩쿨은 그저 단순한 통과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자극적인 멘트로 민준이의 정신을 흔들어보려 했던 니시노야 요코는 자신을 스쳐간 그의 표정에서 여유를 읽었다.
어쩌면 차민준의 실력은 아오바가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잠시 후. 무대 위 아오바의 피아노 소리가 잦아들자, 다시 무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능하면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차민준의 피아노를 직접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
“우와아아~!!”
아오바가 연주를 마치자마자 객석에서 청중들의 박수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심사위원들마저도 한 치의 오차도 찾을 수 없는 아오바의 테크닉에 혀를 내두르며 연신 박수를 보내주었다.
“니시노야 양에겐 미안하지만, 확실히 아오바 군의 실력이 월등하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니시노야 양의 피아노만 들었을 때는 지난 콩쿨에서 아오바 군의 실력에 근접했다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아오바 군 자신만의 피아노를 더욱더 견고히 쌓은 느낌이 드네요. 야마모토 위원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 심사 위원의 질문에 야마모토는 양손 위에 턱을 괸 채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박수가 일찍 터져 나왔군.”
“네?”
영문을 알 수 없는 그의 대답에 심사 위원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야마모토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닐세. 그냥 혼잣말이었네.”
이후로 다음 무대 진행을 위해 스텝들이 말릴 때까지 객석에서 박수 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만족스러운 연주에 아오바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당당한 걸음으로 무대 뒤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미리 대기 중인 차민준과 눈을 마주쳤다.
‘이 사람이 바로······.’
잠시 인사말을 건넬 틈도 없이 가벼운 목인사와 함께 자신을 스쳐 지나는 차민준.
방금 객석에서 들려온 청중들의 박수를 듣고도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분명 지금까지의 콩쿨들을 되새겨보면 항상 아오바의 다음 차례였던 연주자들은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아직도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청중들의 박수 속으로 힘겨운 발걸음을 내디뎠었다.
하지만, 지금 무대에 오르고 있는 저 남자의 표정이나 걸음걸이에는 아무런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청중들의 박수 소리가 그를 향한 환영의 박수로 느껴질 만큼······.
“어이, 쥰이치.”
“음? 니시노야. 네가 여길 왜?”
“왜겠어. 조금이라도 공정한 평가를 위해 직접 내 귀로 들어보려는 거지.”
“쳇. 고맙기도 하셔라.”
“부탁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딴소리야?”
“쉿! 이제 곧 시작한다.”
“너나 조용히 해.”
***
몸이 가볍다.
예선 무대에서도 컨디션이 상당히 좋았었지만, 솔직히 지금은 그때를 뛰어넘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는 다리도 그렇지만, 특히나 어깨가 굉장히 가벼웠다.
그뿐만이 아니다.
무대에 들어선 순간.
아오바 쥰이치에게 향하는 박수 소리의 개수마저도 세어낼 수 있을 정도로 청각 또한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대체 뭘까? 예선전부터 느꼈던 이 감각은······.’
단순히 그날 컨디션이 좋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무대에 오르려는 이 순간.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 속에서 어느 때보다 예리한 한줄기의 감각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이윽고 조용해진 무대 위에서 민준이는 피아노와 마주했다.
본선 무대용으로 맞춰진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
천천히 의자의 높이를 자신에 맞게 맞추고, 자리에 앉은 민준이의 모습에 심사 위원 전원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예선 무대에서 있었던 어이없는 일이 또다시 반복되진 않겠지?’
‘왜일까? 그저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앞에 앉았을 뿐인데, 심장이 터질 것처럼 마구 뛰는군.’
그것은 다른 심사 위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넓은 무대 위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의 존재감이 이토록 커다란 압박을 가할 줄이야.
더구나 아직 연주를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양쪽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 속에 어떤 심사위원은 차라리 그가 빨리 연주를 시작하기를 바랐다.
잠시 후.
두 눈을 감고 있던 그가 생각을 정리한 후 눈을 뜸과 동시에 건반 위에 올려져 있던 손가락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8번. 제1악장.
알레그로 마에스토소(빠르고 장중하게). a단조. 4/4박자.
비장하면서도 역동적인 행진곡 풍의 첫 소절이 울려 퍼지자, 방금 전 아오바 쥰이치의 연주로 똑같은 곡을 들었던 사람들조차 탄성이 새어 나왔다.
악절마다 집요하게 반복되는 왼손의 반복 코드가 듣는 이로 하여금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긴장감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평온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무얼까?
그 답은 차민준의 오른손에 있었다.
새끼손가락을 말아 올린 채 독특한 주법으로 연주를 하고 있는 민준이의 손가락은 부점 코드를 쉴 새 없이 반복하며 왼손으로는 격정적인 연출을 오른손으로는 부드러운 조화를 통해 절묘한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그 순간 무대 뒤에서 차민준의 피아노를 듣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에도 경악이 스쳤다.
‘어떻게 피아노 건반에 이런 감정을 실을 수 있는 거지?’
‘괴물 같은 녀석.’
경쾌하게 치고 나가는 행진곡 풍의 리듬 안에서 느껴지는 섬뜩할 정도의 비통함.
피아노 선율 하나하나가 예리한 면도날처럼 귓가에 파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선율은 날카로움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
첫 번째 주제음을 바탕으로 다채로우면서도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8번 소나타답게 그의 선율은 한순간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가도 어느 때는 한없이 부드러운 위로가 되어주기도 했다.
마치 심장 전체를 그의 손에 맡긴 것처럼 두 사람뿐만 아니라, 무대를 지켜보는 청중들마저도 그의 피아노에 빠져들고 있었다.
‘손목이 날아갈 듯이 가볍다. 제법 빠른 템포의 곡임에도 불구하고, 손에 여유가 남을 정도야.’
민준이는 쉴 새 없이 건반을 두드리는 와중에도 점차 깨어나는 새로운 감각을 시험해보고 싶어졌다.
콩쿨 본선 무대인 만큼 작은 실수마저도 굉장히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될 것이 분명할 텐데, 자꾸만 도전하고 싶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을 굳게 먹음과 동시에 민준이는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예리한 감각 믿어 보기로 했다.
그 순간. 여태까지 곧게 펴져 있던 민준이의 왼손 새끼손가락이 서서히 굽혀지기 시작했다.
왼손과 오른손. 양손에 고른 균형 감각이 이루어진 그때였다.
이번에도 두 주먹을 꼭 맞잡은 채 흔들리지 않는 정신으로 무대를 지켜보던 야마모토 위원장은 미묘하게 달라진 연주자의 왼손 컨트롤에 두 귀를 쫑긋 세웠다.
‘미묘하게 틀어져 있던 균형이 맞춰졌다······.’
물론 지금까지의 연주도 무척이나 훌륭했지만, 뭔가 두 개의 거대한 톱니바퀴가 제대로 맞물린 느낌.
섬뜩하리만치 곤두선 신경이 건반을 타고 흐르는 피아노 현의 장력을 그대로 피부로 전해주는 감각······.
차민준은 새롭게 깨어난 감각에 말라버린 윗입술을 혀로 핥으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차민준은 이곳이 콩쿨 무대라는 사실조차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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