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119화 (119/177)

[119] Ep.18 : 비상(飛上) (5)

‘설마 저 남자. 두 눈을 감고 연주할 생각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저게 가능하다고?’

물론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피아니스트들이 두 눈을 가리고 연주를 하는 경우는 종종 본 적이 있었다.

객석에 앉아 있는 심사 위원들조차도 소싯적 재미삼아 몇 번 시도해 본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콩쿨 무대였다.

단 한 번의 미스 터치조차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혹독한 심사 자리에서 두 눈을 감고 연주하는 것은 자신감을 넘어서 오만으로 다가왔다.

‘건방지군.’

‘우리 콩쿨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생각지도 못한 차민준의 퍼포먼스에 심사 위원들 전원의 눈빛에 불똥이 튀었다.

그것은 아무리 봐도 일본의 콩쿨 수준을 너무 무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제8번.

흔히 a단조 소나타라고 불리는 이 곡은 모차르트 인생에서 가장 비운의 시기에 완성된 곡이다.

1777년 가을.

고향인 잘츠부르크를 떠나 어머니와 함께 파리에 정착한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성화에 구직활동을 서두르고 있었다.

독일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구직 활동은 동유럽과 서유럽을 가로지르는 결과를 낳았다.

피아노 실력만큼은 세기의 천재였지만, 상대적으로 멘탈이 약한 편이었고, 그로 인해 타인이 그의 실력에 조금만 흠을 잡아도 ‘일시적인 유행만 쫓는 멍청이’라 치부하며 곧바로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사실 모차르트가 살던 시기에 음악가는 그다지 수입이 좋은 직종이 아니었다.

왕에게 인정받아 궁정 음악가가 되더라도 악장정도의 직위에 오르지 않으면 박봉에 시달려야 했으니까.

그렇기에 상류 계층의 파티에서 신곡을 발표해 귀족들의 후원을 얻는 게 음악가가 살아가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모차르트 성격에 누군가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작곡 활동을 멀리하고, 매일같이 애인인 알로이지아와 노닥거리는 꼴을 지켜봐야 했던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결국 그를 애인과 떼어 놓기 위해 멀고 먼 파리로 보내버린 것이다.

피아노 한 대조차 놓을 수 없는 누추한 숙소와 낯선 도시.

당시 파리는 음악보다 유명한 화가의 그림에 대해 관심이 높았고, 모차르트는 상류계층의 그림 품평회에서 분위기를 띄우는 반주자로 생활비를 벌어들여야 했다.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자신의 피아노가 한낱 귀족들의 여흥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신이 내려 주신 위대한 재능’을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고, 결국 그는 유일한 일자리마저 내팽개친 뒤, 뒷골목 싸구려 술집에서 피아노를 치며 자신의 재능을 술과 바꾸었다.

그러던 중. 장기간 여행으로 지병을 얻었던 어머니의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지며 결국 숨을 거두게 되는데, 어머니가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알코올에 취해 있었던 모차르트는 어머니를 잃고 나서야 한심했던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데······.

22살의 어린 나이에 맞이한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탄생한 곡이 바로 피아노 소나타 8번이었다.

살아생전 모차르트가 작곡한 19곡의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도 가장 어둡고 긴장감이 넘치며 격정적인 악절들 사이에는 비통함마저 느껴졌다.

실제 피아노 소나타 8번의 자필 악보는 어지럽게 흩어진 음표들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마구 그려진 보표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얼핏 듣기에도 상당한 분노와 흥분 상태에서 8번 소나타를 작곡했다고 볼 수 있었는데, 놀라운 점은 그 원본 하나에 고칠 게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마치 당장이라도 세상에 발표되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누군가는 몇 달을 노력해야 나오는 세기의 명곡이 통째로 그의 머릿속에서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

무대 위의 남자는 모차르트가 느낀 격한 감정을 그대로 자신의 피아노를 통해 쏟아내고 있었다.

‘이토록 강렬한 인상을 전해주는 8번 소나타는 처음이군.’

‘인정하기 싫지만, 지금까지 예선을 통과한 참가자들 중에선 이자와 겨룰 상대가 없다.’

‘이 정도란 말인가? 거장 발터 뮐러의 제자. 차민준······.’

두 눈을 감은 채로 정확하게 건반 사이를 이동하는 섬세한 터치.

몇몇 심사 위원들은 그가 한 번이라도 실수하길 바랐지만, 아쉽게도 그런 우연(?)은 일어나지 않았다.

***

한편 무사히 민준이를 무대로 들여보낸 진아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사에키를 찾았다.

“사에키 씨. 우리 소화도 시킬 겸 잠시 걸을까요?”

“네? 그래도 괜찮으세요?”

“괜찮다니 뭐가요?”

자신의 질문에 오히려 아리송한 표정으로 되묻는 진아의 모습에 사에키는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차민준 씨의 예선 결과.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러자 진아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민준이 실력이라면 예선쯤이야. 가뿐히 통과할 테니까.”

“어라? 아까 무대에 들어가기 전에는 떨어지면 가만 안 두겠다고 하시길래.”

“아~ 그거야. 진지하게 연주하란 뜻이었죠.”

“진지하게?”

“괜히 분위기에 취해 이상한 짓이라도 할까 봐서요.”

“이상한 짓이라뇨?”

“뭐 그런 게 있어요. 간단히 예를 들면 눈을 감고 친다든가······.”

“네? 건반을 보지 않고 피아노를 친다구요? 에이, 거짓말······.”

“사에키 씨가 믿을진 잘 모르겠지만, 가끔 있더라구요. 평범한 사람에게는 거짓말 같은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슥슥 해 보이는 사람. 민준이는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예요.”

“와아~ 사실이라면 진짜 대단하네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중요한 콩쿨 무대에서까지 그런 짓을 하진 않겠죠?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물론이죠. 심사 위원들이 바로 앞에서 도끼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을 텐데.”

“와~ 사에키 씨 한국어 진짜 잘하시네요. 도끼눈이라는 표현도 아시고.”

“유학 중인 한국인 친구들에게 배웠어요.”

잠시 후.

콘서트홀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1월이라 좀 춥긴 했지만, 바람이 적고 햇볕이 따스했기에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주변엔 그녀들 말고도 예선을 치르고 밖으로 나온 콩쿨 참가자들 여럿이 눈에 띄었다.

콩쿨이 끝나고 한 시간 뒤, 곧바로 합격자 발표가 있기에 답답한 실내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느니, 춥기만 바깥에서 차가운 공기를 마시는 편이 그나마 덜 긴장될 테니까.

그러던 중 반대편 벤치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우연히 진아의 눈에 띄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굉장히 초조해 보이는 깡마른 남자는 페트병에 담긴 물을 마시다가 사레가 들었는지 갑자기 격한 기침을 토해냈다.

“우에엑, 쿨럭 쿨럭.”

처음에야 몇 번 기침을 하다 말겠지 싶었지만,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모습에 사에키와 진아가 서둘러 그에게 달려갔다.

“괜찮으세요? 어디가 안 좋으세요?”

“괘, 괜찮··· 쿨럭 쿨럭. 전 괜찮아요.”

새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입술 주위를 닦아낸 남자는 호의를 베풀어준 두 아가씨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오카다라고 합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침이 너무 심하시길래······.”

사에키는 진심으로 걱정되는지 다시 한 번 상태를 물었다.

“괜찮아요. 콩쿨 예선을 치르고 나면 항상 이렇거든요.”

“안색이 굉장히 창백한데······.”

“제 안색은 원래 이래요.”

“아······.”

본인 안색이 원래 이렇다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래도 다행히 기침도 멎었고, 호흡 역시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오카다 씨라고 했죠? 저는 진아라고 해요.”

능숙하진 않지만, 틈틈이 공부해두었던 일본어로 진아가 인사를 건네자, 오카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본어 잘하시네요. 한국분이신가요?”

“네.”

“역시. 아까 두 분이서 한국어로 대화하는 걸 들었어요.”

“음. 오카다 씨도 예선 결과를 기다리시는 중인가요?”

“아, 네. 하지만 전 떨어질 것 같아요.”

힘없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떨구는 그의 모습에 사에키가 입을 열었다.

“아직 결과도 안 나왔는데, 너무 일찍 포기하는 건 안 좋아요.”

“아뇨. 오히려 직접 연주를 해본 사람은 느낄 수 있죠. 내가 실수한 부분. 심사 위원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미리 결과를 알려주는 것만 같거든요. 더구나 오늘 예선을 치르고 나서 알았어요. 그 사람이 이번 콩쿨에 나온다는 사실을······.”

“그 사람?”

“아오바 쥰이치.”

“아오바 쥰이치?”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이름에 진아는 자연스럽게 사에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오바 쥰이치는 일본을 대표하는 젊은 피아니스트예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출전한 모든 콩쿨에서 우승을 거머쥔 천재 피아니스트.”

사에키의 입에서 나온 천재 피아니스트라는 말에 진아는 자연스럽게 민준이를 떠올렸다.

‘일본에도 우리 민준이 같은 사람이 있는 건가? 아, 솔직히 비교하면 민준이는 콩쿨이 아닌 어린이 피아노 대회랑 오케스트라 대회 입상뿐이지만······.’

그때 오카다라는 남자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가 콩쿨에 나온 이상. 이미 우승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아오바 쥰이치라는 분이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인가요?”

그러자 사에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일본에서는 이미 겨룰 상대가 없다고 해요. 아무리 복잡한 음계와 난해한 패시지도 마치 기계처럼 정확하게 음표 하나 놓치지 않으니까요.”

“와아··· 대단하네요.”

하지만 어릴 때부터 최근까지 민준이의 피아노를 자주 들어봐서일까?

아오바 쥰이치의 실력이 실제로 어느 정도인지 선뜻 감이 오지 않았다.

“어쩌면 이번 콩쿨에서 민준 씨가 넘어야 할 가장 큰 벽일 수도 있어요. 일본에서는 아오바 쥰이치를 빗대어 휴먼 메트로놈이라고 부를 정도니까요.”

“휴먼··· 메트로놈?”

***

“저기, 이제 그만 나가 봐도 될까요?”

무대 위 남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심사위원들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 한 시간 뒤, 로비에 합격자 공고를 붙일 예정입니다. 결과를 확인하시고 본선 출전자 명단에 사인하시고 돌아가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심사 위원들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마친 차민준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무대를 나섰다.

잠시 후. 마지막 참가자인 그가 사라지고, 객석에 남겨진 심사 위원들은 서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네··· 혹시 그의 마지막 연주가 어땠는지 기억이 나는가?”

“그, 글쎄. 정신을 차려보니 연주가 끝나 있어서······.”

분명 연주 중간까지 두 눈을 부릅뜨고 그가 실수하기를 지켜본 기억이 있지만, 그 이후로는 비워진 휴지통처럼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그러자 당황한 심사 위원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저만 그런 게 아니고 다른 분들도 전부 기억이 없으신 겁니까?”

그때 심사 위원 중에서 가장 연령이 높은 백발의 노인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끌끌끌~ 이번 콩쿨은 재미있겠군. 아주 기대가 돼.”

“어르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마 이번 콩쿨에 아오바 쥰이치 군도 참가한다고 했었지?”

“네. 그렇습니다.”

한 심사 위원의 대답에 노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본 심사 때는 바싹 긴장하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오늘 같은 꼴을 또 당하게 될지도 모르니.”

“네?”

“아, 그리고 합격자 발표는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생각보다 시간이 얼마 안남았거든.”

발걸음을 옮기던 노인은 심사 위원들을 향해 손목시계를 톡톡 두드려 보였다.

노인의 기묘한 행동에 몇몇 심사 위원들이 자신의 손목 시계를 내려본 그  순간.

"뭐야 이거?"

"말도 안 돼..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다니."

그들의 손목에 채워진 시게의 바늘은 민준이가 연주를 시작하고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8번의 연주 시간은 20분 정도······.

보통 예선에서는 10분 정도 연주를 듣고 합격 여부를 판가름 한다.

평가가 미묘할 경우 끝까지 듣는 경우도 가끔 있긴 했지만, 지금 문제는 8번 소나타의 연주 시간이 아니었다.

그들이 궁금했던 것은 차민준의 연주가 끝나고 10분 동안. 자신들은 대체 무얼 하고 있었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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