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Ep.18 : 비상(飛上) (2)
“요술 성냥은 다 팔렸나요?”
귓가에 또박또박 박혀오는 문장은 분명 한국어였다.
“미안. 사정이 있어서 그동안 찾아오지 못했어.”
잔잔한 미소와 함께 말을 걸어오는 권선의 모습에 민준이는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혹시 화났어?”
“네? 아, 그게..”
“아니면 갑자기 말을 놓아서 당황스러우려나? 그런데 어차피 우리학교 구교사에서 피아노를 봤다면 내 후배 아닌가?”
“그렇긴 해요.”
“몇 살?”
“스무 살..”
“오~ 그럼 나랑 다섯 살 차이네?”
1학년 때 음악실에서 사라진 누나가 6학년이라고 했으니, 민준이와 권선의 나이 차는 다섯 살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의 외모는 자신과 동갑이라도 해도 믿을 만큼 굉장한 동안의 소유자였다.
평소 자주 만나는 안나와 진아랑은 사뭇 느낌이 달랐다.
아니 어쩌면 그 둘을 적당히 섞어 놓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슬슬 포기하려던 때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그녀 덕분에 하고픈 말이 많았던 민준이의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나 대신 차이콥스키 씨의 연주회를 도와줬다면서? 모스크바 온 거리에 네 소문이 자자하더라.”
그랬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이 모스크바 콘서트홀에서 공개되고 난 뒤, 사람들은 다시 한 번 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듣고 싶어 했지만, 차이콥스키는 단 한 번의 공연을 끝으로 더 이상 연주회를 갖지 않았다.
더구나 미국으로 떠나버린 지금.
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대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원장인 루빈스타인은 곧 차이콥스키가 모스크바로 돌아와 연주회를 가질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그것이 언제 이루어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지금쯤 어느 먼 바다를 항해하고 있을 차이콥스키를 떠올리며 민준이는 홀로 빙긋 웃어보였다.
잠시 후.
권선과 함께 자주 이용하는 식당에 들른 민준이는 그녀와 마주 앉아 있었다.
“청년. 오늘은 한 곡 안 쳐줄 텐가?”
카운터 위에 놓인 보드카를 가리키는 식당 주인의 모습에, 민준이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러다 아저씨네 보드카 제가 다 가져가겠는데요.”
“훗. 전에는 눈뜨고 당했지만, 이번엔 쉽지 않을걸?”
그러자 권선이 초롱초롱 눈동자를 빛내며 입을 열었다.
“보드카를 가져간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이런 아가씨한테는 내가 설명을 안 드렸군. 누구든 내 마음을 움직일 만한 피아노곡을 연주해준다면 저기 있는 보드카를 가져가도 좋아.”
“정말이요?”
“물론이지. 단 내가 음악에 대해선 좀 까다로운 편이라, 지금까지 나에게 보드카를 받아간 것은 아가씨와 함께 온 청년을 포함해 몇 안 되지.”
“호오…”
주인장의 말은 사실이었는지. 식당 안의 다른 손님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아무렴~ 10년 단골인 나도 진짜로 가져간 손님은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니까.”
“더구나 지난 5년 동안은 그조차 한명도 없었지. 최근에 보드카를 가져간 것도 저 청년이 유일하니까.”
“어이~ 형씨. 분위기도 띄울 겸 오늘도 멋들어지게 한 곡 쳐주고 공짜 술이나 가져가는 건 어떤가?”
민준이는 자신을 향해 소리치는 손님들을 향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그냥 식사만 하러온 것뿐이에요.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서..”
“에잉~ 그것 참 아쉽군.”
그때 민준이 앞에 있던 권선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거 제가 한번 쳐봐도 되죠?”
“음? 아가씨가?”
“오~ 이건 생각지 못한 전개인데?”
“어이~ 아가씨. 이왕이면 멋진 곡 부탁하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저녁 식사를 즐기던 사람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음악과 함께하는 식사는 장소 여부를 막론하고 언제나 큰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팔짱을 낀 채로 손바닥으로 피아노를 가리키며 살짝 물러서는 주인장.
그런 그의 내기에 흥미가 동했는지, 윗입술을 살짝 핥으며 걸음을 옮기는 그녀.
권선을 말리려던 민준이는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수위 할아버지가 극찬했던 권선의 피아노는 어떤 소리를 낼까?’
일전에 차이콥스키의 발표회에서 잠시 들었던 그녀의 피아노.
까다로웠던 루빈스타인 원장조차 그녀의 피아노 실력에 감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잠시만 다녀올게.”
잠시 후. 사뿐히 피아노 의자 위에 자리한 그녀의 손가락은 새하얀 건반 위로 빗방울처럼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선택한 곡은 쇼팽의 왈츠 7번.
첫 소절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식당 안의 사람들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가느다란 그녀의 손가락이 건반 위로 떨어져 내릴 때마다 울리는 청아한 선율은 일반 식당 한편에 자리 잡은 고물 피아노에서 내는 소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 만큼 깔끔하게 떨어져 내렸다.
건반을 통해서 현의 강도를 최상위에서 조율하는 초감각.
권선 역시 민준이와 비슷한 피아노 기교를 선보이고 있었다.
“어이, 마스터 혹시 최근에 피아노를 손보았나? 소리가 엄청 깔끔한데?”
“멍청아. 허구한 날 주문받고 요리하느라 바쁜데, 그런 것까지 할 여력이 어딨어.”
“그렇다면…?”
“순전히 저 아가씨 실력이지.”
“어이, 주인장. 오늘도 보드카 한 병 공짜로 내줘야 할 판인데, 괜찮겠어?”
“크음..”
주인장과 손님의 대화를 엿 들었는지 피아노를 치고 있는 권선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손님들의 귓가를 사로잡은 그녀의 왈츠는 굉장히 담백했다.
피아노의 선율에 담백하다는 표현은 잘 어울리지 않았지만, 이 이상 그녀의 피아노를 잘 표현할 만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본래 쇼팽이 작곡한 곡들은 꼭 필요한 악절이 아니고선 피아니스트의 기교에 의존하지 않았으니까.
쇼팽과 자주 비교되는 동시대의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가 화려함을 무기로 온갖 기교술을 악보에 적어 두었다면 쇼팽은 그와 철저히 반대되는 노선이랄까?
물론 쇼팽의 곡에도 제법 높은 수준의 기교를 요구하는 악절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곡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쇼팽의 곡은 리스트보다 치기 쉬울까?
스스로 던진 질문에 차민준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라면 리스트의 30분짜리 소나타보다 5분짜리 쇼팽의 전주곡이 훨씬 까다로울 텐데….’
물론 귀로 듣는 쇼팽의 피아노는 딱히 어려워 보이지 않았으나, 막상 자리에 앉아 연주를 해보면 왠지 모르게 굉장히 애매한 템포를 요구하는 패시지들의 연속인 것을 알게 된다.
하나의 패시지만 잘못 건드려도 곡 전체의 분위기가 흐려지는 만큼 쇼팽의 곡은 정확한 템포보다 그날의 컨디션과 분위기에 휩쓸리듯 연주하는 편이 오히려 득이 될 때가 많았다.
눈앞에서 피아노 건반에 몸을 맡긴 채 웃고 있는 권선의 모습처럼 말이다.
그녀의 피아노는 연주되는 동안 단 한 번의 흠결조차 찾아 볼 수 없었다.
한번 시작하면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왈츠의 환상적인 선율 속에 낡은 식당 안은 어느새 고급 레스토랑 못지않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다라다라다라 단~!!
약 4분가량의 쇼팽의 왈츠가 끝남과 동시에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좁아터진 낡은 식당에서 내 인생 최고의 쇼팽을 듣게 될 줄이야..”
싸구려 럼을 병째로 들이키던 노인은 붉어진 콧잔등을 훔치며 연신 박수를 보내주었다.
“어이, 주인장 뭐하는 거야? 설마 이런 곡을 듣고 발뺌할 생각은 아니겠지?”
“시끄러~!! 너희들이 안 그래도 순순히 내줄 생각이었다고!!”
“손님한테 너희들이라니. 너무한 거 아냐?”
“그렇게 불만이 많으면 오지 말든가. 단 가기 전에 그동안 외상값들 전부 내놓고 가.”
“에이~ 이 사람. 농담 한번 한 걸 가지고 쩨쩨하게 왜 그러나.”
꽤나 집중해서 연주했는지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 권선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가게 주인은 말없이 그녀에게 보드카를 건네주었다.
“정말 받아도 괜찮아요?”
“나중에 와이프한테 한 소리 듣겠지만, 아무튼 약속은 약속이니까.”
“흐음~ 그럼 일단 그건 잠시 넣어 두시겠어요?”
“음? 그게 무슨 소린가?”
그때 권선이 쪼르르 민준이가 있는 탁자에 달려와 입을 열었다.
“답가 정도는 해줄 거지?”
“응? 나도 치라고?”
“전에 왔을 때도 내 피아노만 듣고 돌아갔잖아. 그러니 이번엔 네 차례 아닌가?”
아직 민준이의 피아노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권선은 호기심 어린 눈망울을 바싹 들이대며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가 부담스러웠는지 민준이는 뒤로 살짝 몸을 젖히며 입을 열었다.
“아, 알았어. 할게.”
결국 권선의 강압에 못 이겨 다시 피아노 앞에 앉은 민준이는 기대에 찬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이며 건반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방금 전 권선이 연주한 피아노 건반에는 아직까지 그녀의 온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
‘쇼팽의 왈츠라. 그렇다면….’
잠시 머릿속으로 수많은 곡들을 떠올린 민준이는 곧이어 한 장의 악보를 떠올리며 건반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좋아….’
전체적으로 피아노 건반을 한 번 쓸어내린 그는 곧장 손가락을 세우며 그녀를 위한 답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민준이가 선택한 곡은 쇼팽이 작곡한 곡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곡 중 하나인 녹턴 9번이었다.
&
잠시 후.
식사를 마치고 가게를 나온 그들의 손에는 각각 보드카가 한 병씩 들려있었다.
“그냥 둘 중 한 명한테만 주시라니까..”
“그러게 아내 분한테 혼나시면 어쩌지.”
민준이의 연주가 끝나고 더 마음에 드는 연주를 한 사람에게 보드카를 건네주라는 그녀의 제안에 한참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주인장은 결국 둘 모두에게 보드카를 들려주었다.
‘나한테 둘 중 하나만 고르라는 건 너무나 가혹한 선택이야….’
권선은 신음 섞인 목소리와 함께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술병을 내어주던 주인장의 모습을 떠올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할 수 없지. 나중에 손님 없을 때 살짝 가서 돌려줘야지.”
“어? 그럼 내 것도 부탁해도 될까?”
“너 지금 선배를 부려먹는 거야?”
“아, 그게 그렇게 되나?”
그녀의 정색에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민준이의 얼굴에 권선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내밀었다.
“농담이야. 이리 줘. 네 것까지 가져다줄게.”
얼떨결에 양손에 술병을 쥔 그녀는 손에 들린 술병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 큰 아가씨가 양손에 술이라니. 누가 보면 완전 주정뱅인 줄 알겠네.”
“창피하면 내가 대신 들어줄까?”
“아냐. 이제 곧 돌아갈 시간이지?”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대로에서 그녀와 마주 선 민준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가 봐. 너에겐 돌아갈 현실이 있잖아.”
허리 뒤로 술병을 숨기며 애써 웃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슬프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오래된 피아노에 대해서, 그리고 그녀와 함께 있는 이곳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잔뜩 있었지만, 대체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그녀에겐 민감한 질문일 것만 같아 자꾸 입안에서 뱅뱅 도는 느낌이다.
자신에겐 돌아갈 현실이 있지만, 닫힌 시간의 문에서 그녀는 어디로 가는 걸까?
이런 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왠지 고민이 많은 표정이네.”
민준이의 찡그려진 미간을 바라보던 권선이 웃으며 입을 떼었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하나만 물어도 되나?”
“음.. 뭔데?”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실제로 존재했던 과거일까?”
민준이의 질문에 한동안 가만히 서 있던 그녀는 놀랍게도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역시..”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만약에 이 모든 것이 정말로 실재했던 역사라면 베토벤의 기록 중에서 약간이나마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단 한 줄이라도 언급될 법했으니까.
하지만 그곳이 실제가 아니라고 한다면 대체 이곳은 어딘 것일까?
그 답은 이어지는 권선의 이야기를 통해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일부분은 맞기도 해.”
“그게 무슨 말이야?”
“이곳은 호로비츠가 만들어낸 환상이니까.”
“뭐라고…?”
&
잠시 후.
자신의 작업실로 돌아온 민준이는 황당한 기분에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자정을 넘긴 시각.
밖에는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제법 굵은 빗방울이 테라스에 설치면 탁자를 두드리자, 빗소리 특유의 독특한 리듬이 권선의 피아노를 연상케 했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민준이는 오래된 피아노의 주인이었던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이름을 작게 읊어보았다.
다음 날.
진아와 함께 발터 뮐러의 병실을 찾은 차민준에게는 뜻밖의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네에? 일본이요?”
“그래. 때마침 일본에서 3주 뒤 모차르트 콩쿨이 있다고 하더구나.”
발터 뮐러는 당혹해하는 민준이의 모습에 웃으며 말을 이었다.
“대회 추천장은 내 매니저에게 부탁해 대신 써두었다. 그러니 넌 가서 피아노만 치고 오면 돼. 그리고 될 수 있으면 투명하고 영롱하게 빛나는 물건이나, 황금색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우승 트로피 같은 걸 선물로 가져다 다오.”
왼손으로 트로피 모양을 그리는 스승의 모습에 차민준은 하는 수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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