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115화 (115/177)

[115] Ep.18 : 비상(飛上) (1)

&

“무하하하~!!! 그래서 말이다. 내가 그 강을 건널까 말까 엄청 고민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저기 대표님. 지금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강’이 저희가 알고 있는 그 ‘강’이 맞을까요? 한번 건너가면 다신 못 돌아온다던..”

“그, 글쎄. 대충 비슷하게 들리는데?”

“아무래도 그렇죠…?”

“······.”

모두가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혼자서 속없이 웃고 있는 발터 뮐러를 향해 진아가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다.

“선생님은 지금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세요!?”

“하하~ 그런가? 아무튼 정말 대단한 체험이었어.”

그때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요나스가 문을 열고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오~ 요나스. 자네 왔는가?”

“마에스트로.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보다시피 멀쩡하다네.”

왼팔을 불끈 들어 보이는 발터 뮐러의 모습에 요나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 정말로 신이 도왔군요. 감사합니다..”

“신? 신은 무슨 얼어 죽을.. 코빼기도 안보이던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 생각보다 눈치가 없구만~ 이정도로 얘기 했으면 한 번에 알아챘어야지.”

그러자 침대 근처에 서있던 민준이가 자신의 스승을 대신해 요나스에게 간단히 상황을 일러 주었다.

“그게 선생님께서 사후 세계를 보고 오셨다고…”

“사후 세계라면? 설마 죽으면 가는 거기?”

요나스의 물음에 민준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무리도 아니지. 정말 위급했던 순간이었으니까. 그래도 설마 관객들 중에 의사가 있었을 줄이야.”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연주를 마치고 혼자 대기실로 향한 발터 뮐러가 신경 쓰였던 진아는 민준이의 무대가 끝나기 직전 마에스트로의 개인실로 찾아가 문을 두드려 보았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고, 이를 이상하게 여긴 진아가 문을 열어젖히자, 소파에서 미동조차 없이 앉아있던 발터 뮐러를 발견하였다.

마치 졸고 있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는 그에게 곧 연주가 끝날 거라고 말을 전했지만, 여전히 그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주무시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다가간 진아는 점점 그와 가까워질수록 불안한 감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설마. 저기, 선생님…?”

들려오지 않는 대답.

평소보다 훨씬 아래로 쳐져 있는 그의 어깨에 진아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서, 선생님!? 선생님!!”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흔들어 보아도 아무 대답 없는 그의 반응에 진아는 다음 행동은 굉장히 신속했다.

‘미약하지만 아직 호흡은 살아있어.’

당황한 와중에서 재빨리 119에 신고를 마친 그녀가 다름으로 전화를 건 곳은 세종문화회관의 인포메이션 센터였다.

“네. 세종문화 회관 안내실입니다.”

“지금 빨리 안내 방송으로 관객 중에 의사가 있는지 알아봐 주세요.”

“네? 저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

“발터 뮐러 선생님께서 의식이 없어요. 빨리 서둘러 주세요!!”

마침 본 공연이 끝나고 무대에서 내려왔을 민준이를 떠올린 그녀는 재빨리 대기실 문을 열고 그를 찾았다.

다행히 연주자들 사이에서 민준이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진아에게서 이야기를 전해들은 민준이는 대기실에 도착하자마자 발터 뮐러를 소파에 편히 뉘인 채 그의 숨을 조이고 있는 보타이와 허리끈을 풀어내었다.

“의사를 찾으신다고 들었습니다.”

곧이어 안내원과 함께 달려온 남자 하나가 서둘러 발터 뮐러의 상태를 체크하고 응급처지를 하기 시작했다.

진아의 빠른 조치 덕분에 발터 뮐러는 곧 구급차에 실려 인근 병원으로 향했고, 이후 3일간 혼수상태를 겪고 나서야 겨우 의식을 되찾을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의식 불명은 다음 날 신문과 인터넷에 대서특필 되었고, 거장의 쾌유를 바라는 세계인들의 바람이 이어졌다.

그런 그들의 바람이 하늘에 닿았던 것일까?

고혈압에 의한 동맥경화가 급성 심장질환으로 이어져 하마터면 머나먼 타지에서 숨을 거둘 뻔한 발터 뮐러는 기적과도 같이 의식을 되찾았다.

모든 것이 진아의 빠른 판단력 덕분이었다.

“아가씨. 모든 음악가들을 대표해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네? 아뇨. 저는 그냥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나도 고맙군. 오보에 아가씨.”

발터 뮐러는 진아의 이름을 알고 있으면서도 항상 그녀를 ‘오보에 아가씨’라고 불렀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손 사례를 치며 아니라고 부정 했지만, 오늘만큼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쩌면 그에게서 다시는 듣지 못했을 애칭이기도 했으니까.

송 대표는 창가의 블라인드를 살짝 내려 병원 밖을 살펴보았다.

발터 뮐러가 새벽에 의식을 되찾았다는 소식에 병원 앞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어차피 병원이라 기자들 출입은 금지였지만 관계자들을 통해 정보를 얻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때 침대에 누워 있던 발터 뮐러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늙은 몸뚱이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은 통에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렸군.”

그러자 요나스가 발터 뮐러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마에스트로의 무대를 통해 미스터 차를 세계에 알리려 했지요? 그 점이라면 안심하셔도 됩니다.”

“음? 그게 무슨 말인가?”

“당신의 입원 소식과 더불어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한 미스터 차에 대한 기사도 이미 인터넷에서 호평 일색이거든요. 설마 구급차에 실려가시기 전에 마지막에 하신 말씀 기억이 안나십니까?”

“내가.. 무슨 말을 했던가?”

그러자 요나스는 빙긋 미소 지으며 입술을 떼었다.

“병원에 가는 것은 비밀로 해주게. 지금 관객들의 여운을 헤치기 싫으니. 라고 하셨죠.”

“······.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아마 정신이 혼미한 상태여서 잘 기억이 안 나실 수도 있어요. 덕분에 구급차의 사이렌도 건물을 빠져 나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울렸으니까요.”

덕분에 그가 병원에 입원한 사실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 사이 공연에 대한 리뷰가 인터넷에 먼저 등재되었다.

[거장의 화려한 귀환. 서울 한복판을 뒤 흔들어 놓다.]

[광화문에서 울려 퍼진 라흐마니노프의 주인공. 드라마 봄의 왈츠의 숨은 주역. 차민준으로 밝혀져.]

[천재 피아니스트. 차민준. 이번엔 지휘자 단상에 오르다.]

[한 순간 발터 뮐러의 공연을 잊게 만들었던 차이콥스키의 향연.]

세계적인 지휘자가 오랜 휴식 끝에 다시 지휘봉을 잡은 만큼. 연주회에 참석했던 클래식 관계자들은 공연이 끝나자마자, 서로 앞 다투어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기자들은 8년 전 쇼팽 콩쿨에 대한 이야기까지 끄집어내며 피아니스트에 대한 자신의 소감을 밝혔다.

“어째 나보다 민준이에 대한 기사가 더 많은 것 같은데?”

“오히려 그걸 바라신 것 아닙니까?”

요나스의 대답에 발터 뮐러는 입술을 실룩이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하하하~ 사실 그렇다네.”

발터 뮐러는 왼손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연신 내려치며 통쾌하게 웃어대었다.

그런 스승의 부자연스러운 행동에 민준이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후.

일단 기자들에게 발터 뮐러의 상태를 전하기 위해 송 대표와 석혜인이 병실을 나서고, 요나스 마저도 자신의 동료들과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기 위해 떠나자, 어느새 발터 뮐러의 개인 병실에는 그의 매니저와 차민준. 그리고 진아만 남게 되었다.

그때 발터 뮐러가 자신의 매니저와 진아에게 일렀다.

“잠시 민준이와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자리 좀 비켜 주겠나?”

“알겠습니다.”

이윽고 매니저와 진아 마저도 병실을 나서자, 발터 뮐러는 긴 숨을 내쉬며 민준이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냐.”

“······. 알고 계셨어요?”

“녀석. 내가 모를 줄 알았느냐?”

“하지만…”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제자를 바라보며 발터 뮐러는 따스한 미소와 함께 자신의 왼손을 들어 보았다.

“그래. 사실 오른손이 잘 움직이지 않는구나.”

“금방 괜찮아지실 거예요.”

“그럼 다행이겠지만..”

“······.”

“하지만 이대로도 나는 괜찮다. 마지막으로 너와 함께 무대에 설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기도 하고.”

“선생님..”

발터 뮐러는 자신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히는 제자의 손을 잡아 주고 싶었지만, 오른팔이 마치 돌덩이처럼 무겁게만 느껴졌다.

“내 손을 좀 잡아 주겠니?”

스승의 말에 민준이는 침대로 다가가 그의 오른손을 잡아 주었다.

아직도 이렇게나 따듯한데, 무대 위에서 음을 조율하던 그의 손은 아무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재활 치료 받으시면 곧 나으실 거예요.”

“물론이지. 그래서 말인데, 그때까지 내가 너에게 건넨 지휘봉을 맡아주지 않으련?”

스승의 부탁에 민준이는 하는 수없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구나.”

발터 뮐러는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실은 말이다. 너에게만 이야기해두는 건데. 의식이 없는 동안 그 분을 만났단다.”

“네? 그 분이요?”

“그래. 정말로 캄캄한 어둠속을 정신없이 헤매는 와중에 그 분의 목소리를 들었지. 딱 한번 보았지만,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 분이라는 확신이 들 더구나.”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네 할머니 말이다.”

“네에!?”

오래 전 민준이가 발터 뮐러를 따라 한국을 떠나기 전.

발터 뮐러는 민준이의 할머니를 직접 만난 적이 있었다.

발도 통하지 않지만, 연신 그의 손을 잡고 손자를 잘 부탁한다고 연신 고개를 조아리던 그녀의 모습이 좀처럼 잊혀 지지가 않았다.

차갑고 거친 손..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세상 누구보다 따듯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의식을 잃은 채 깊은 어둠 속을 헤매던 그는 자신을 부르는 따스한 목소리에 이끌려 어둠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 순간. 차갑고 거친 손이 그의 왼팔을 잡아 끌어당겼고, 이윽고 환한 빛 아래 서있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두 손을 모은 채 단아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자신을 향해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하며 입술을 떼었다.

“우리 손자 곁에 조금만 더 계셔주세요.”

마지막 그녀의 말을 굳이 그대로 민준이에게 전하진 않았다.

믿을지 안 믿을지는 모르겠으나, 실제로 그가 겪은 일이니까..

“조금 더 널 부탁한다고 하더구나.”

“아…”

“그래서 말인데. 이제 슬슬 시작해보지 않겠느냐?”

“무얼 말씀이세요?”

“뭐긴. 그동안 네가 눈뜨고 놓친 수많은 콩쿨 말이다. 막상 이대로 죽겠구나 싶어도 도저히 성질이 나서 눈을 감을 수가 있어야지. 쇼팽 콩쿨 심사 위원회 녀석들..!!”

“선생님 일단 안정을 취하시고..”

그 순간 발터 뮐러는 왼손으로 민준이의 팔을 붙잡았다.

“더 이상 웅크리지 말거라. 네 할머니에게 이렇게까지 부탁 받은 이상. 나도 더 이상은 그저 지켜보기만 하지 않을 것이야.”

타오르는 듯한 스승의 두 눈동자와 마주한 차민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에휴.. 오늘도 역시 무린가?”

차이콥스키가 떠나고 혼자 남은 모스크바 거리에서 민준이는 오늘도 라이터를 요술 성냥으로 빙자에 제법 쏠쏠한 수입을 올렸다.

주머니에 담을 수 있을 만큼 쑤셔 담을 수 있는 물건들 중에서 라이터 만 한 것도 없었으니까.

현실에서 연주회가 열리기 전에도 몇 번인가 권선을 만나기 위해 과거의 모스크바를 오갔으나, 그녀는 더 이상 자신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겨우 만났나 싶었더니….’

물어보고 싶은게 산더미 같은데..

어쩌면 권선은 더 이상 이곳에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주머니에 남아 있던 라이터를 모두 팔아치운 민준이가 허기짐을 달래기 위해 식당으로 향하려던 그 때 등 뒤에서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술 성냥은 다 팔렸나요?”

귓가에 또박 또박 박혀오는 목소리는 분명 권선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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