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Ep.17 : 호두까기 인형.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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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바~바~밤!!!!
전신의 털이 곤두설 만큼 짜릿하게 다가오는 서장의 도입부는 전개부에서도 마찬가지도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란 존재가 성큼성큼 문을 두드리며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그 안에서 달아나기 위해 요나스가 이끄는 바이올린의 선율을 바삐 움직이고 있었지만, 묵직한 팀파니의 울림이 들려올 때마다 그 거리가 바싹 좁혀져 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 선생님의 운명 교향곡….’
등을 타고 전해져오는 오케스트라의 울림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지휘봉을 휘두르는 발터 뮐러의 모습이 떠올랐다.
찬란한 조명 아래 지휘자 단상에 우뚝 선 그의 모습을..
빰빰빰~ 빰~ 빰~
호른의 장중한 음색과 함께 전개부에 들어선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은 이윽고 비올라와 오보에의 음색과 함께 점점 더 기대감을 높이기 시작했다.
발터 뮐러는 이마에 흐르는 땀조차 닦아 낼 틈도 없이 세차게 오른팔을 휘둘렀다.
환희와 긴장감이 고루 갖춰진 완벽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이끌어 내기 위해, 때로는 지휘봉을 내던질 듯한 강한 제스쳐로, 때로는 가만히 두 팔을 벌린 채 고개를 끄덕이며 온 몸으로 베토벤의 음악을 표현하고 있었다.
특히나 스케르초를 표현할 때는 그의 볼 살이 부르르 떨릴 만큼 절도가 묻어나 있었다.
‘거대한 화음에 온몸이 짓눌리는 듯 한 기분이다….’
석 교수는 무대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근육이 저절로 위축되는 느낌이 들었다.
‘거장’이라는 명성에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영혼을 담은 그의 지휘는 놀라움 그 자체로 피부에 와 닿고 있었다.
거기다 무대를 가득 메우고 있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준 높은 연주 실력까지..
이렇게 멋진 무대가 한국에서 또 실현 될 수 있을까?
석 교수는 가슴 깊은 곳에서 끌어 오르는 감동과 발터 뮐러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아 깍지낀 손 위에 고개를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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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은 그 독특한 도입부로 인해 굉장히 어둡고 침울한 느낌으로 대중들에게 기억되고 있지만, 실제로 그의 음악을 들어보면 5번 교향곡은 절망이나 좌절을 그린 것이 아닌 그 속에서 빛나고 있는 한줌의 환희를 노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환희는 악장 요나스가 이끌고 있는 바이올린과 비올라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몇 번이고 반복해오는 도입부 전개를 헤쳐 나가는 것은 빠르게 치고 달리는 현악기의 선율.
듣는 이의 심장을 점점 죄여오는 듯한 빠른 템포의 5번 교향곡은 오보에의 음색에 점차 잦아 들기 시작했다.
거친 파도처럼 밀려드는 화음 속에서 잠시간 펼쳐지는 오보에의 독주에 마음이 잠시 누그러 드는 것도 잠깐.
악장 요나스의 사인 아래 모든 현악기가 최고조의 분위기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빰빰빰빰!!
빰빰빰빰!!
빰빠빰빠. 빰! 빰!! 빰~!!!
마지막 제스쳐와 함께 빗방울처럼 떨어져 내리는 자신의 땀방울을 본 발터 뮐러는 그제서야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쳤다.
“이야아아~!!”
“우와아아아!!!”
단상에서 내려온 발터 뮐러가 악장 요나스와 함께 관객들을 향해 허리를 숙이자, 무대 위에 설치된 커튼이 내려오며 안내방송이 흘러 나왔다.
“베토벤 5번 교향곡. 제 1악장을 끝으로 20분간 휴식시간을 갖겠습니다. 콘서트홀 출입시 관객 여러분께서는 반드시 소지한 티켓을 안내원에게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월간 클래식의 송 대영은 5번 협주곡의 클라이맥스 부분부터 참아왔던 숨을 길게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하아.. 하아.. 보고 있는 내가 다 숨이 차오른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오는 길에 물도 한 병만 사올래?”
“네. 알겠습니다. 편집장님.”
부하 직원은 꽤나 오래 참았는지 비틀 거리는 포즈로 벽을 집고 출입문으로 향했다.
커튼이 내려진 무대를 바라보던 송대영은 가만히 자신의 손을 가슴 위에 얹어 보았다.
딱히 몸을 움직인 것도 아닌데, 무대를 지켜본 것만으로도 그의 심장은 어느때보다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CD나 녹음테이프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현장의 감동.
사실 클래식 잡지사에 오래 몸담은 송대영 조차 발터 뮐러의 지휘를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세계는커녕 국내에서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클래식 잡지사가 무슨 돈이 있어 해외 공연을 관람을 보내 준단 말인가.
그저 해외 유명인사의 공연이 열리면 실황 앨범을 구입해 아마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하고 스스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것이 고작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만큼은 달랐다.
물론 그 동안 가끔 한국을 방문하는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도 몇 번인가 관람한 적이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엄청난 명성 지휘자와 유명 오케스트라의 합동 공연은 송 대영에게도 처음이었다.
‘언젠가 비엔나로 직접 날아가 풀고 싶었던 소망을 한국에서 이루게 될 줄이야….’
올해는 그에게 있어 정말 선물과도 같은 한해라는 기분이 들었다.
“어째 드라마 봄의 왈츠가 잘 풀릴 때부터 느낌이 오더라니.”
그때였다.
기분 좋게 미소 짓던 그의 표정이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 버렸다.
“우연이 아니었어..”
이전부터 계속 머릿속에 맴돌고 있던 답답한 퍼즐이 한 순간에 풀려버린 느낌이 들었다.
“편집장님. 여기 시원한 물 드세요.”
화장실에서 돌아온 후배의 목소리에도 송대영은 멍한 표정으로 무대를 바라만 보았다.
“편집장님?”
“그래!! 돌이켜 보면 모든 중심에 그 아이가 있었어.”
“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차민준. 그래 맞아. 차민준이었어.”
“차민준이라면 라프마니노프를 연주한 피아니스트 말씀이세요?”
“그래. 그 녀석이 나타나고서부터 대한민국에서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거야.”
돌이켜보면 그랬다.
처음 봄의 왈츠라는 드라마가 클래식을 다룬다고 했을 때 송대영은 그저 인기 작가의 독특한 소재를 위해 클래식이 유린당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실제로 드라마 초반에서 느꼈던 감각은 어느 정도 일치했으니까.
하지만 드라마 중반부터 쓸데없는 로맨스 구도를 버리고, 주인공과 라이벌의 대결 구도로 들어섰을 때.
그동안 드라마라면 질색하던 그가 소파에 앉아 멍하니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웬일이냐는 아내의 질문에도 아무런 대답도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커피가 차게 식었을 정도로 음악에 집중하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모든 사건의 중심 속에 차민준이 있었다.
‘어쩌면 발터 뮐러가 자신의 복귀 무대로 한국을 선택한 것은….’
제자인 그가 한국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세계적인 거장이 무엇이 아쉬워 이 작은 나라에서 자신의 부활을 알리는 첫 공연을 수락했던 것일까?
무엇보다 복귀 후 선택한 첫 곡이 라프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이라니..
실제로 해외 기자들이 몰려 있는 좌석에서는 쉬는 시간동안 필기를 비롯한 기자들끼리의 논의가 끊이질 않고 있었다.
어디론가 서둘러 전화를 거는 사람도 보였다.
“자신에게 남은 명성을 자양분 삼아 차민준을 전 세계에 발돋움 시키려는 것인가?”
그런 송대영의 생각은 한국에 발을 디디기 전 발터 뮐러의 생각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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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십니까? 마에스트로?”
인터 미션이 끝나고 무대에 오르는 발터 뮐러에게 요나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20분간 충분한 휴식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발터 뮐러의 안색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시 나이는 못 속이나 보군. 확실히 오랜만이라 그런지 힘이 들어.”
“마에스트로..”
“하지만 어쩌겠나? 아직 무대 위의 조명은 꺼지지 않았어.”
발터 뮐러는 자신을 걱정하는 요나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마저 입을 열었다.
“괜찮네. 내 곁에는 자네가 있지 않은가? 요나스 프레데릭.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끄는 최고의 콘서트마스터.”
“······.”
“하지만 역시 이 상태로 앵콜 공연은 무리일 것 같군. 그때는 민준이를 잘 부탁하네.”
“걱정마십시오. 그 청년이라면 무리 없이 저희를 이끌 것입니다.”
“허허~ 악장에게서 직접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한시름 덜었군. 그럼 가볼까?”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며 무대에 오르자, 이어서 관객과 무대를 가리고 있던 커튼이 서서히 말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발터 뮐러는 2막에서 다시 만난 관객들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넨 뒤 무대에 설치된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데었다.
“안~녕~ 하세요.”
그의 어설픈 한국말 인사에 객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에게서 박수가 쏟아졌다.
이어서 그의 독일어 인사는 무대 옆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번역 되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메리 크리스마스. 성스러운 밤입니다. 한국은 제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나라입니다. 맛있는 음식. 독특한 문화. 작년에는 세계 월드컵에서 4강을 이루었죠. 특히 준결승전 독일과의 경기는 보는 내내 제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습니다.”
월드컵의 여운이 깊게 남은 사람들은 발터 뮐러의 재치 있는 입담에 웃음을 터뜨렸다.
“한국은 클래식을 굉장히 사랑하는 나라라고 들었습니다. 이 곳에선 트럭이 후진 할 때 베토벤의 음악이 들린다고 하죠?”
발터 뮐러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채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발터 뮐러는 어깨를 들썩이며 몸소 엘리제를 위하여를 흥얼거렸다.
“따라라라라~ 라라라~ 따라라라~”
그러자 객석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렇습니다. 클래식은 사실 멀리 있지 않아요. 전화를 다른 곳으로 돌릴 때, 들려오는 통화 대기음도 대부분이 클래식입니다. 올해 한국에서 클래식을 소재로 한 독특한 드라마 한편이 방송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인기를 얻었다고도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의 그런 작은 관심과 사랑이 클래식 문화를 더욱 발전 시켜나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토록 멋진 관객들과 크리스마스 이브를 함께 보내어 영광입니다.”
마지막 멘트를 끝으로 객석을 향해 인사를 마친 발터 뮐러는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지휘자 단상에 올랐다.
그의 등 뒤로 울려 퍼지는 박수소리가 차츰 잦아들 때즈음..
발터 뮐러는 악장 요나스에게 사인을 맞춘 뒤, 힘차게 지휘봉을 휘둘렀다.
제 2막은 활기찬 비발디의 사계로 시작되었다.
이미 사전에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클래식을 선별해 리스트를 작성해두었기에 발터 뮐러의 2막은 그의 음악적 취향보다 대중들의 성향에 조금 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일까?
무거운 라흐마니노프와 베토벤을 연주했을 때보다 객석의 표정이 한층 더 밝아져 있었다.
‘본디 음악은 즐기는 것이지.’
막상 음악이 시작되자 발터 뮐러는 창백했던 안색을 거두고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악기를 조율하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음악을..
아직 무대에 서있을 수 있는 지금 그 녀석에게 내 모든 음악을 들려주고 싶구나..
두 주먹을 힘차게 허공에 내려치며 올려다본 천장에 새하얀 조명 빛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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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아~!!!!”
베토벤 교향곡 제 3번. ‘영웅’을 끝으로 발터 뮐러가 준비한 모든 곡이 끝마쳤다.
3번 교향곡은 발터 뮐러 스스로도 내세울 만큼 가장 자신 있는 곡이었다.
본래 나폴레옹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보나파르트’라는 이름으로 작곡 된 이 곡은 나폴레옹이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자, 제목을 파기하고 ‘에로이카’라는 제목을 붙였다.
50분의 연주 시간동안 장대한 영웅의 일대기를 표현하는 이 곡은 음악가로서 베토벤의 고집이 엿보이기에 발터 뮐러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기도 했다.
영웅 교향곡이 화려한 피날레와 함께 끝을 맺은 순간.
관객들은 일제히 기립 박수를 보내며 콘서트홀이 떠나갈 듯한 박수를 보내주었다.
요나스의 부축을 받고 단상에서 내려온 발터 뮐러는 평온한 미소와 함께 악장 요나스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자네 덕분에 공연을 훌륭히 마칠 수 있었네..”
“함께하여 영광이었습니다. 마에스트로. 발터 뮐러…”
콘서트홀 전체가 진동할 만큼 어마어마한 박수 소리와 함께 발터 뮐러는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 관객들을 향해 인사를 마쳤다.
도무지 멈출 줄 모르는 박수 소리에 발터 뮐러는 객석을 진정 시키며 마이크를 손에 들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
두 손으로 마이크를 모은 채 수많은 관객들을 빙 둘러본 발터 뮐러는 턱선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훔치며 기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로서 제가 준비한 모든 곡을 마쳤습니다. 끝까지 함께 해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하지만…”
'하지만'이라는 발터 뮐러의 여운이 담긴 한마디에 사람들의 눈빛은 점점 기대에 차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여러분의 크리스마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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