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Ep.17 : 호두까기 인형.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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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 느낌이었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 2번 3악장에 들어선 민준이의 연주에 무대를 지켜보던 석교수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오싹한 한기에 치를 떨었다.
자신의 뒤로 느껴지는 거대한 위압감..
피아노 한 대의 선율이 오케스트라 전체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듯 한 이 느낌..
마치 여태까지의 피아노 협주가 어린 아이 장난이라 느껴질 만큼 어느새 무대 전체의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그런 민준이의 피아노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관통(貫通)..
그 어떤 합주에서도 자신의 피아노 음색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음과 음 사이를 번개같이 통과해 나간다.
그러면서도 불협화음을 느낄 수조차 없다.
‘하지만.. 오늘의 오케스트라는 그때완 조금 다를 거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기본 적으로 경력 20년 이상의 베테랑들로 구성된 단원들과 음대생들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의 수준 차이란 것이 존재했으니까.
더구나 지금 단상 위에서 지휘를 하고 있는 것은..
세계적인 거장. 발터 뮐러..
학생들을 상대로 지휘봉을 휘두르는 석 교수와는 격이 다른 존재..
‘젊은 천재 피아니스트와 오랜 경력을 가진 노련한 지휘자의 만남이라….’
하물며 선생과 제자의 관계.
문득 석 교수는 오케스트라를 향해 돌아서 있는 발터 뮐러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지금 그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 2번의 3악장.
알레그로 스케르찬도.
어설프게 지휘했다간 굉장히 경박해질 수 있는 무곡 풍 리듬 위에서 진행되는 오케스트라는 화려함과 경박함의 분위기를 잘 조율해야한다.
화려함이 지나치면 경박스러워 보이는 것처럼 그 미묘한 선율의 흐름을 잘 파악해야 만이 훌륭한 연주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일찍이 라흐마니노프와 베토벤의 해석자 중에서 단연 최고라 꼽혀왔던 발터 뮐러에게 그런 걱정은 사치에 불과했다.
현악기를 주도하는 악장 요나스 마저도 한없이 부드럽게 음을 끌어당기는 발터 뮐러의 현란한 지휘 솜씨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으니까..
‘이 사람. 역시나 격이 다르다.’
지휘봉을 놓은지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실력은 퇴색되기는커녕 오히려 음악의 본질을 찾아 자신들을 끌어들이는 듯했다.
그리고 또 하나.
그의 제자인 피아니스트 차민준이라는 존재.
이번 내한 공연에서 악장 요나스에게 가장 큰 인상을 심어준 젊은 청년.
지금까지 수많은 피아니스트와 협연을 이루어왔지만, 협연 도중 이토록 짜릿한 감각을 선사해주는 연주자가 몇이나 있었을까?
‘멀고 먼 한국까지 온 보람이 있어….’
베를린 필하모닉은 한국이라는 낯선 곳에서 거장 발터 뮐러와 차민준이라는 피아니스트로 인해 한 걸음 더 성장 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클래식이란 알면 알수록 심오하군. 이러한 전율은 이제 다신 느끼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악장 요나스는 치열하게 바이올린의 활을 밀고 당기며 피아니스트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건반 두드리는 그의 손가락이 여러 개로 겹쳐 보일 만큼 속주를 펼치고 있는 차민준의 두 눈은 오로지 자신의 손과 건반만을 쫓고 있었다.
그때 자신의 머리 위로 지휘자 발터 뮐러의 손이 내려왔다.
그는 오른손으로 전체 리듬을 조율하며 왼손으로는 요나스를 향한채 고개를 저로 저으며 경고를 내렸다.
‘지금은 연주에 집중하게.’
발터 뮐러의 미소는 마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지휘자의 경고에 재빨리 피아니스트에게서 눈길을 거둔 요나스는 3악장의 클라이맥스를 향해 강하게 활을 끌어당겼다.
‘녀석. 실력이 더욱 늘었구나….’
수 십년 경력의 콘서트마스터조차 한순간 활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 정도로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다니.
더구나 이제 고작 18살의 꼬마 녀석이 말이야.
하지만 민준이의 이러한 성장은 발터 뮐러조차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어느 순간 정체 되었다고 생각했던 그의 실력이 한국에 돌아온지 반 년 만에 이토록 달라질 줄이야.
‘반 년 간 너에게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인지. 어째서 갑자기 호로비츠의 주법을 고집하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구나. 하지만 단 한 발자국이라도 더 성장했다는 것이 스승으로서 참으로 기쁘구나.’
발터 뮐러는 흐뭇한 웃음과 함께 두 팔을 펼치며 큰 물결을 그렸다.
피아노 협주곡 34분 30초 구간에서 벌어지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합주가 함께 그리는 환희의 구간.
3악장의 최종장으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에 발을 들인 그때였다.
뜨끔..
“큭..”
한 순간 왼쪽 옆구리를 타고 흐르는 짜릿한 통증에 하마터면 클라이맥스의 지휘가 흔들릴 뻔하였다.
‘아직이다….’
발터 뮐러는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이를 악 문채 두 팔을 더욱 높게 들었다.
격앙된 표정으로 연주에 집중하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한순간 찡그린 발터 뮐러의 표정을 읽지 못했다.
이윽고 희열이 넘쳐흐르는 장대한 클라이맥스가 콘서트홀을 가득 메우자, 민준이의 피아노는 그제서야 한발 물러서며 영광과 환희의 순간을 오케스트라에 넘겨주었다.
장대한 대서사시의 뜻을 알리는 승리의 함성처럼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의 화려한 합주가 빛을 발하자, 무대를 지켜보던 관객들의 입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환장하겠군. 전신에 개미들이 기어 다니는 기분이야….’
월간 클래식의 송대영은 마치 두드러기처럼 돋아나는 닭살에 어깨를 쓸어내렸다.
‘발터 뮐러의 지휘와 차민준의 피아노. 분명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들어왔지만, 이건 정말 너무 할 정도로 기대 이상이잖아…!!’
오케스트라의 악기 소리가 마치 오페라 가수의 아름다운 노래 가사처럼 들려오고, 넘치는 환희에 저절로 가슴이 벅차오르던 그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피아노가 가진 모든 선율을 쏟아낸 민준이의 피아노는 단 0.1초의 오차도 없이 오케스트라 합주의 끝과 완벽하게 끝을 맺었다.
빰~ 빠바밤~!!
“하아… 하아..”
마지막 소절 건반을 뿌리치듯 떨구며 피니쉬를 맺은 차민준은 두 팔을 아래로 늘어 뜨린 채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조명이 뜨거운 열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방금 스승과의 협주곡을 마친 그는 속이 후련해짐을 느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
자신이 현재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친 연주였다.
따라서 후회는 없었다.
“우와아아아아아!!!!!!!!”
함성과 함께 콘서트홀을 가득 메운 박수 소리가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발터 뮐러 역시 객석에서 최초의 박수 소리가 나올 때까지 지휘봉을 곧게 세운 채 그대로 멈춰있었다.
연주가 끝나고 여운에 젖은 음악가들을 깨워주는 것은 관객의 박수 소리였다.
“브라보!!”
“이게 뭐야. 클래식이라는 장르가 이렇게 소름 돋는 것이었나?”
“여운이 멈추질 않아..”
‘아픔이 가셨다….’
객석의 반응 덕분일까? 한 순간 지휘봉을 떨어뜨릴 뻔했던 통증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발터 뮐러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손으로 갈비뼈 부근을 만져 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감각.
‘너무 오랜만의 공연이라. 나도 모르게 긴장했던 탓일까? 그게 아니면….’
나 역시 세월은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
그래도 당장 아픔이 가셔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터 뮐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객석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안 그래도 끊이지 않던 박수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제 고작 첫 번째 곡을 끝냈을 뿐인데, 객석에 앉아 있던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발터 뮐러는 자신의 제자이자, 성공적인 무대로 이끌어준 피아니스트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
“고맙구나..”
“남은 연주도 힘내세요.”
마지막으로 콘서트마스터인 요나스와의 악수와 함께 관객들에게 인사를 마친 차민준은 자신의 피아노와 함께 무대 뒤로 퇴장하였다.
그의 모습이 무대 뒤로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관객들의 박수는 도무지 그칠 줄을 몰랐다.
“발터 뮐러의 지휘도 훌륭했지만, 그 어려운 라흐마니노프를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연주하는 자가 있었다니. 생각지 못한 특종이다.”
“피아니스트 차민준. 그에 대한 정보는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 거지?”
“어째서 저런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단 한 번도 콩쿨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은 건지 의문이군.”
“본국으로 돌아가면 당장 바르샤바로 달려가야겠어.”
해외에서 발터 뮐러의 공연 기사를 쓰기 위해 방문한 기자들은 정신없이 펜대를 휘날리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발터 뮐러는 흐뭇한 미소와 함께 관객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잠시 후.
무대에 설치된 차민준의 피아노가 한 켠으로 물러나고, 발터뮐러는 다시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향해 객석에서 등을 돌렸다.
악장 요나스가 모든 준비를 마쳤다는 사인을 보내자, 무대 옆 스크린에 발터 뮐러의 다음 곡명이 떠올랐다.
-베토벤 5번 교향곡.-
클래식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베토벤 5번 교향곡에 대해 고개를 갸웃 거렸지만, 잠시 후. 교향곡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도입부가 울려 퍼지자,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빠~바바밤~!!! 빠~바바밤~!!!
“베토벤의 운명? 그게 5번 교향곡이었어?”
“바보야. 원래 교향곡에는 이름이 잘 안 붙어. 그리고 운명 교향곡이라는 이름도 우리나라랑 일본만 쓴다고 하더라.”
“진짜?”
하지만 객석에서 나누는 청중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오케스트라의 현악기가 일제히 쏟아내는 어마어마한 화음의 파도가 거대한 해일이 되어 그들의 목소리를 집어 삼켰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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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서 내려온 민준이는 휴식이 필요했다.
아무리 그라도 40분 동안 무거운 건반으로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는 것은 상당한 체력이 필요했으니까.
최대한 당당한 걸음걸이로 무대에서 내려왔지만, 관객들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마자 순간적으로 힘이 탁 풀렸다.
“아..”
몽롱해지는 기분과 함께 벽으로 쓰러지려는 그를 서둘러 부축한 것은 진아였다.
“민준아!? 괜찮아?”
“응? 아 잠시 어지러웠을 뿐이야. 이제 괜찮아.”
“손 빼지 말고 그대로 나한테 기대. 바보야.”
“아아.. 고마워.”
한 순간에 모든 힘을 쏟아 부은 탓일까? 대기실까지 가는 복도가 너무나 길게만 느껴졌다.
“어쩐지 너무 무리한다 싶더라니..”
“하하.. 눈치챘어?”
“당연하지 바보야. 그래도..”
“응?”
“대단한 연주였어…”
그때였다.
빠~바바밤~!!! 빠~바바밤~!!!
무대 쪽에서 들려오는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의 카리스마 넘치는 도입부에 민준이는 무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작 됐나보다..”
“발터 뮐러 선생님의 베토벤..”
“아쉽다. 가능하면 나도 가까운 곳에서 보고 싶은데..”
“앵콜 무대 준비하려면 일단은 쉬어야지. 대기실 모니터로 만족해.”
그러자 민준이는 진아에게서 팔을 빼며 대기실 벽에 몸을 기대었다.
“우리 잠깐 여기서 듣고 가자.”
“뭐?”
“너도 이리 와서 나처럼 벽에 등을 대봐.”
민준이의 말에 진아는 그의 옆에 서서 벽에 등을 가져다 대었다.
콰과과광!!! 콰과과광~!!
등을 통해 전해지는 오케스트라의 합주는 마치 전신으로 음악이 퍼져나감을 느낄 수 있었다.
“와아..”
진아의 감탄에 민준이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대로 바닥에 앉아 몸을 기대었다.
“어때?”
“신기해.. 몸 안에서 베토벤의 운명이 울려 퍼지는 것 같아.”
그러자 민준이가 진아에게 물었다.
“너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이 왜 운명이라 불리는 줄 알아?”
“글쎄?”
“베토벤이 처음으로 5번 교향곡을 써서 발표했을 때 한 제자가 그에게 이렇게 물었데. 5번 교향곡 서장의 도입부 주제는 무엇을 뜻하는 거냐고 말야. 그때 베토벤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하더라.”
“뭐라고?”
“운명은 이와 같이 문을 두드리고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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