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Ep.17 : 호두까기 인형. (5)
쿵. 쿵. 쿵. 쿵..
잠시 호흡을 멈추자, 가슴 속에서 울리는 심장의 고동 소리가 머릿속에 가득 울렸다.
눈으로는 관객들이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 또한 들리지 않았다.
오직 들리는 것은 자신의 심장 소리 뿐..
깊고 어두운 심해의 끝자락 어딘가에 전신이 잠겨 있는 듯한 이 기분.
하지만..
이 갑갑한 고통마저도..
자신의 오래된 피아노와 마주 앉은 것만으로 차분히 마음이 가라앉았다.
‘선생님의 복귀 공연. 첫 무대를 내 손으로 망칠 수는 없지.’
민준이에게 오래된 피아노는 아무리 깊은 어둠 속에서도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신기한 힘이 있었다.
발터 뮐러의 오랜 파트너가 그의 지휘봉이었던 것처럼..
민준이에겐 구교사에 놓여져 있었던 이 피아노가 그런 존재였다.
‘할 수 있어. 가장 완벽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오늘 이 자리에서 탄생할 것이다.’
한편 무대에 설치된 피아노 앞에 자리 잡은 민준이의 모습에 발터 뮐러는 빙긋 웃음을 지었다.
‘저 녀석. 관객들에게 인사도 없이 피아노에 먼저 앉다니. 너 답지 않게 긴장한 것이냐? 아니면.. 관객들에게 일초라도 빨리 너의 실력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냐?’
그 답은 이제 곧 알게 될 것이었다.
객석에서 들려오던 청중들의 환영의 박수조차 점차 잦아 들고..
한 순간 거대한 콘서트홀에 정적이 찾아왔다.
‘후우.. 선생님과의 첫 협주곡. 슬슬 시작해볼까..?’
라프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의 도입부는 독특하게도 오케스트라가 아닌 피아노가 먼저 주도하게되었다.
협주곡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결정하는 최초의 선율이 피아니스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지휘자인 발터 뮐러와 베를린 필하모닉 악단은 민준이가 충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연주를 시작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이윽고 민준이의 손이 건반 위에 오르자, 악장 요나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바이올린을 집어 들었다.
그때였다.
쿠웅!!
예상을 뛰어 넘는 첫 선율에 요나스는 하마터면 바이올린을 떨어뜨릴 뻔했다.
‘뭐야? 시작부터 이 정도 소리를 내다니. 저 녀석 설마 첫 소절에서 점차 소리를 높혀 나가는 것을 까먹은 건가?’
하지만 뒤따라 들려오는 피아노 선율에 요나스의 등 뒤로 한줄기 소름이 스쳐 지났다.
쿠우웅!!!
어두운 피아노 화음이 장중하게 울려 퍼지기를 반복하며 그 소리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곧 30년이 다 되어가는 경력에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장중한 선율의 무게.
‘이것이.. 저 아이가 머릿속으로 그린 라흐마니노프인가?’
콘서트홀 전체가 진동할 만큼 어마어마한 도입부 선율에 무대를 지켜보던 관객들조차 충격에 빠졌다.
“펴, 편집장님..”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음악에 집중해.”
송대영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부하 직원을 단칼에 내치며 피아니스트의 반복적인 선율에 집중했다.
차민준은 알면 알수록 신기한 선율을 내는 피아니스트였다.
지난 번 연주회 때보다 소리가 한층 더 깊어진 듯한 느낌이다.
이제 불과 두어 달 지났을 뿐인데..
‘아니 그것보단 그의 라흐마니노프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야.’
이윽고 반복 적인 장중한 연타가 끝을 맺은 순간.
민준이의 왼 팔이 튕기듯 하늘 높이 올라가며 동시에 섬뜩한 번개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마치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어마어마한 량의 화음들이 청중의 귓가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지독하리만큼 처절하고 암울한 피아노 선율에 발터 뮐러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기를 끌어 안 듯이 두 팔을 크게 내밀며 지휘봉을 휘둘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첼로 파트에서 느리고 장중한 선율로 그 뒤를 받쳐주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파도가 등을 떠밀어 주듯 민준이의 피아노는 거대한 오케스트라라는 선율의 파도에 몸을 실었다.
‘선생님께선 연주 중에 자신의 지휘를 보지 말라고 하셨지만….’
오로지 연주에 집중하고 있는 지금.
단지 힐끔 바라보는 곁눈질조차도 무리였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은 제 1악장부터 제 3악장까지 거의 모든 파트에서 피아노가 쉬는 구간이 없다.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은 가끔씩 건반에서 손을 놓는 구간도 있었지만, 라흐마니노프 같은 경우는 단 몇 초의 여유조차도 없이 건반을 두드려야만 했다.
1,2,3 악장을 모두 합쳐 놓은 시간은 약 40여분..
그것은 곧 40분 동안 계속해서 연주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일까?
바이올린을 연주 중이던 요나스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설마 3악장까지 이 페이스를 계속 유지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콘서트홀 전체를 압도하는 젊은 피아니스트의 선율과 오케스트라에게 정확한 지시를 내리는 노련한 마에스트로의 만남에 객석에 앉아 있던 기자들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피아노를 치고 있는 저 남자는 대체 누구인가?’
‘이제까지 한 번도 듣지 못한 강렬한 도입부 전개….’
‘피아니스트.. 미스터 차. 그의 정체는?’
‘발터 뮐러의 제자라면 설마 바르샤바 쇼팽 콩쿨 이후로 모습을 감춘 그 천재 소년?’
‘건반을 타고 흐르는 피아노 선율이 마치 날카로운 비수처럼 느껴진다.’
기자들은 연주를 듣는 와중에도 작은 수첩을 꺼내어 기사에 써먹을 내용들을 단어 별로 간추려 빠르게 적고 있었다.
하지만 연주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하는 차민준의 경이로운 피아노 연타에 몇몇 기자들의 펜을 멈추기 시작했다.
더구나 제 1악장의 하이라이트라고도 할 수 있는 6분 30초대에서 발터 뮐러는 온몸으로 음악을 표현해내듯 두 팔을 넓게 벌리고 악단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오케스트라 전체가 뿜어내는 거대한 선율들이 그의 손에 쥐어진 자그만 지휘봉 끝에 걸린 것 마냥 좌우로 넘실대기 시작했다.
‘이것이 발터 뮐러 선생님의 지휘….’
굳이 보지 않아도 자신을 뒤따라오는 오케스트라의 음색에서 차민준은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발터 뮐러의 지휘는 베토벤과도 그리고 차이콥스키와도 다른 그 만의 독특함이 서려있었다.
그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는 때론 얇은 비단결과도 같은 포근함으로 다가왔고, 때로는 강한 군사가 되어 피아노 선율의 뒤를 따랐다.
차이콥스키와의 협주곡이 피아노 한 대와 오케스트라가 가진 수십 개의 악기들과 물고 뜯는 혈투를 연상케 했다면 발터 뮐러의 지휘는 그야말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도 같았다.
무한한 배려.
피아노 협주곡 2번의 모든 악장들이 피아노가 중심인 만큼 한발 물러서서 자유롭게 풀어주고 있었다.
이윽고 오케스트라의 협주가 잠시 잠잠해진 제 1악장의 마지막 순간.
고고히 울려퍼지는 첼로의 묵직하고 낮은 선율 속에서 발터 뮐러는 생각했다.
‘네가 원한다면 음악이라는 세계의 지평선 끝까지라도 데려가주마.’
그 순간. 차민준의 머릿속에서 무대에 오르기 전 발터 뮐러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이번 무대에서 너의 진짜 실력을 보여다오….’
1악장의 연주가 천천히 가라앉을 무렵..
첼로의 선율마저도 아득히 멀어진 그 순간.
1악장의 끝을 맺는 피아노 독주가 시작 되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클라이맥스를 향해 반복적으로 울려 퍼지는 화려하고도 정열적인 악상.
정신없이 양팔이 교차하며 건반을 두드리는 민준이의 손등 위로 땀방울 몇 개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빰~ 빰빰빰~!!
마지막으로 건반을 할퀴듯 쓸어내리며 1악장의 끝을 맺은 그 순간.
“우와아아!!!!”
1악장의 종반 무렵부터 숨조차 쉬는 걸 잊은 채 연주에 빠져든 관객들은 제 2악장 시작되기 전 거친 숨을 토해내며 함성을 내질렀다.
보통 한 악장이 끝나고선 비교적 가벼운 박수 소리만 나오기 마련이었는데, 다들 발터 뮐러의 지휘를 오랜만에 봐서일까? 공연 시작 13분 만에 객석의 반응은 굉장히 뜨거웠다.
“이게 너의 라흐마니노프였구나. 이 곡을 듣기까지 참 오래 걸렸네..”
J음대의 두 교수와 함께 오늘의 공연에 초대받은 오수정 선생은 붉어진 눈가를 손끝으로 훔치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오 교수는 아직도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손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쳐냈다.
“차민준이라는 아이. 설마 이 정도까지 성장할 줄이야..”
“아뇨. 아직입니다. 방금 전 연주는 그저 손 풀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뭐?”
다소 냉정한 표정으로 무대를 바라보는 석 교수의 눈빛에 오 교수가 다시 물었다.
“방금 전 연주가 그저 손 풀기였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일전에 전 민준이의 개인 연주회에 초대 받아 학생들과 함께 무대에 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알아요.”
석동철은 천천히 그 날의 기억을 되짚으며 뒤에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절대로 민준이의 피아노에서 눈을 떼지 마세요. 한 순간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어마어마한 것을 보게 되실테니까요.”
“어마어마한 것?”
오교수의 두 번째 물음에 석교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로 설명해봐야 믿지 않을게 뻔했으니까.
‘그날 내가 본 풍경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차민준 네가 만들어낸 환상이었을까?’
석 교수는 오늘의 공연에서 그 답을 찾고 싶었다.
서정적인 분위기로 시작하는 제 2악장의 첫머리에서 민준이의 피아노가 다시 울려 퍼지자, 석 교수는 한 순간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플룻의 애절한 음색이 민준이의 피아노 선율에 녹아들자, 마치 심장의 한 부분을 도려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피아노 건반에 이토록 슬픈 감정을 실어낼 수 있다니….’
미처 마음을 추스릴 새도 없이 폭풍처럼 격하게 밀려드는 감정에 코끝이 찡하게 아려왔다.
“어머, 나 왜 이러지. 자꾸만 눈물이 나..”
오 선생은 주체할 수 없이 밀려드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훔쳐냈다.
연주가 계속 이어지며 조금씩 쌓여가는 수많은 감정들 속에서 결국엔 석 교수마저 자신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금도 창피해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객석의 태반이 민준이의 연주에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으니까..
2악장이 시작 시점에서 그의 피아노는 이미 콘서트홀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입가에 두 손을 모은 채 흐느끼는 사람..
차라리 고개를 떨군 채로 흐느끼는 사람..
너무나 심한 감정 소모에 차라리 2악장이 어서 끝나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기를 십여분.
잔잔한 호숫가의 물결처럼 고요히 흘러가는 2악장의 선율이 끝을 맺는 순간에도 객석은 그저 멍하니 그의 연주를 지켜볼 뿐이었다.
발터 뮐러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마저도 견디기 힘들었던 2악장이 끝나자, 악장 요나스는 천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적으로 나마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는 듯한 감각..
‘방금은 진짜 위험했어….’
오케스트라 도중 이렇게까지 피아니스트의 연주에 심취해본 적이 있던가?
협주곡인 만큼 그의 연주가 곧 오케스트라 전체의 연주이기도 했지만, 굉장히 독보적인 연주인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제 3악장..
발터 뮐러는 가라앉은 콘서트홀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듯 처음부터 격렬한 몸짓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기 시작했다.
요나스 역시 지휘자의 판단에 동조하며 현악 파트를 독려하자, 콘서트홀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뒤바뀌기 시작했다.
화려한 오케스트라의 도입부 속에서 잠시 건반에서 손을 내려놓았던 차민준은 손가락을 접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바싹 마른 입술에 침을 적셨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제 3악장 마지막 10분. 여기서 모든 걸 쏟아내는 거야….’
롤러코스터를 연상시키듯 빠르게 위아래로 넘나드는 오케스트라의 화음 속에서 민준이의 건반이 번개처럼 빠르게 스쳐 지났다.
오케스트라 전체를 반으로 갈라내듯 시원하게 뻗어나가는 피아노 선율에 요나스는 깜짝 놀라 발터 뮐러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빛을 읽은 것일까?
발터 뮐러는 자신의 등 뒤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존재감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어쩌면 내가 잠자고 있는 사자의 콧털을 건드려버린 걸지도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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