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Ep.17 : 호두까기 인형. (3)
‘제법 독특한 주법(奏法)을 사용하는군. 호로비츠의 흉내라도 내려는 건가?’
모두가 악기를 내려놓고 기대에 찬 눈으로 민준이를 지켜보는 가운데 가볍게 그의 손이 사뿐히 움직였다.
호두까기 인형의 제 1막을 여는 작은 서곡이 연습실에 울려 퍼지자, 악장 요나스는 팔짱을 낀 채 진지하게 그의 연주를 지켜보았다.
윤도형의 러브레터 이전부터 새끼손가락을 당기는 연습을 했던 민준이의 피아노는 과거에서 차이콥스키와의 협연을 통해 더욱 성장해 있었다.
‘끊어 쳐야하는 부분에서도 피아노 페달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군.’
발터 뮐러는 자신과 떨어져 지낸 6개월 사이 민준이의 피아노 실력이 급변했음을 쉽게 알아 차릴 수 있었다.
한국에 오기 며칠 전 뜬금없이 호로비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
‘새끼손가락 근육을 당겼다 풀기를 반복하며 다른 손가락으론 미세하게 건반을 컨트롤하고 있어. 과연 페달을 밟을 필요 없이 오로지 손가락을 타고 전해지는 감 만을 믿겠다는 것이냐?’
발터 뮐러는 또 한 번 성장한 제자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저 청년. 피아노 앞에 앉으니, 한순간에 분위기가 달라졌어….’
요나스는 지휘봉을 휘두를 때와는 전혀 다른 아우라를 뿜어내는 민준이의 모습에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제까지 어떠한 피아니스트의 선율을 들어보았지만, 이렇게 가슴 속 깊이 파고 들어오는 울림은 느껴본 적이 드물었다.
‘저 녀석의 손가락. 단순히 호로비츠의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다.’
대체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감추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멀쩡히 달려있는 페달조차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도 건반 하나 하나 아주 정확한 음의 길이를 입력하고 있어.’
페달을 이용해 고의적으로 현의 울림을 멈추게 하는 것은 현 시대의 피아니스트들에게는 굉장히 상식적인 테크닉이었다.
그러나 고의적으로 울림을 멈추게 하는 것과 그 울림을 자신이 원하는 만큼만 유지시키는 것에는 분명히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호로비츠 역시 페달을 사용하지 않았지. 저 청년 나름 재미난 부분이 있어….’
민준이의 연주를 바라보던 요나스의 한쪽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차이콥스키의 작은 서곡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성탄절’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온 세상을 새하얗게 물들인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활기참의 극치.
따스한 화로 옆에 세워진 크리스마스 트리.
그리고 그 아래 쌓여진 알록달록한 포장지의 선물 상자들..
귓가에 날아드는 선율 하나하나에 아이들의 미소가 저절로 떠오를 만큼 민준이의 ‘작은 서곡’은 동화적인 느낌이 가득했다.
“오.. 훌륭한 실력이군..”
“과연 이 정도면 큰소리 칠만한데?”
보통 20년 이상씩 악기를 다뤄온 베를린 필하모닉의 단원들조차 그의 뛰어난 피아노 실력에 하나 둘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연습실에 모여있는 60개의 악기가 표현하지 못한 환상곡의 느낌을 피아노 한대로 살려내는 신들린 연주 실력.
민준이는 작은 서막의 연주가 끝난 뒤에도 기세를 몰아 작은 행진곡을 비롯해 사탕 요정의 춤, 아라비아의 춤, 갈잎 피리의 춤. 등등 호두까기 인형에서 등장한 대표곡들을 연달아 연주하였다.
특히 사탕 요정의 춤과 갈잎 피리의 춤에서는 곡에서 전해지는 몽환적인 느낌을 충분히 살린 탓에 오케스트라 단원들 몇몇의 입가에도 어느새 미소가 가득 피어 올라있었다.
“이렇게 듣고 있으니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것만 같군.”
“크리스마스라.. 확실히 호두까기 인형에는 다른 곡들과는 달리 특유의 설렘임이 있긴 하지. 잠시 잊고 있었어..”
“하지만 그 부분을 우리가 아닌 저 젊은이가 간파했다는 사실이 더 놀랍군.”
마지막 울림을 끝으로 민준이가 건반에서 손을 떼자, 연주를 지켜보던 단원들에게 박수가 터져 나왔다.
“조금은 도움이 되었을까요?”
어색한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선 민준이는 다시 지휘자용 단상에 올라섰다.
한편 연주가 끝난 뒤에도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던 요나스는 이윽고 팔짱을 풀고 자신의 악기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은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 전원을 혼란에 빠뜨렸다.
“다들 지금부터 악보를 덮어두게.”
“헉.. 뭐라고!?”
“요나스? 자네 방금 뭐라고 했나?”
악장 요나스의 뜻밖의 제안.
그와 오랫동안 함께 연주해온 단원들은 지금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지 적잖이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이때까지 악보를 성경처럼 여기는 그의 입에서 악보를 덮으라는 말이 나오다니.
직접 귀로 듣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나 요나스 프레데릭은 알고 있었다.
차민준이 보여준 환상곡의 느낌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선 눈앞에 놓여진 악보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것을..
현재 자신을 비롯해 단원들이 믿을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지금부터 저 청년의 손에 쥐어진 지휘봉에만 집중한다.”
요나스의 한 마디에 단원들은 모두 눈앞에 놓여진 악보를 덮었다.
기본적으로 십수년 이상의 경력을 자랑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차이콥스키의 연주는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기에 굳이 악보를 참고하지 않아도 연주는 가능했으니까. 악장의 요청이 무리한 부탁은 아니었다.
대부분 오케스트라에서 악보를 보는 것은 음계를 살피는 것보다 지휘자의 메시지를 적어두고 참고하는 역할이 더 컸기에 이런 상황에서는 다들 미련이 없었다.
악장 요나스는 단상에 올라서있는 젊은이의 지휘를 시험해보기로 하였다.
‘이번 한번은 자네의 완벽한 악기가 되어주도록 하지. 그러니 어디 한 번 마음 것 휘둘러 보거라.’
그 순간 악장 요나스의 각오는 곧바로 민준이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이것 참.. 이번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이건가?’
민준이는 마른 입술을 살짝 혀로 훑으며 지휘봉을 손에 쥐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악장 요나스 프레데릭을 비롯해 다들 프라이드가 높은 편이다. 그렇다면 굳이 카리스마를 이용해 단원들을 찍어 누르는 베토벤의 지휘 보단.. 차이콥스키씨의 지휘법이 더 어울릴지도….’
민준이는 뜻밖의 결정을 내려준 요나스에게 감사를 담아 고개를 숙인 뒤 자신의 지휘봉을 곧게 세웠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요?”
방금 전과 사뭇 달라진 오케스트라 분위기에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발터 뮐러마저도 어느새 웃음을 거두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보여 주거라. 차민준. 네 진짜 실력을….’
그리고 잠시 후. 민준이의 지휘봉 끝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것은 분명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노련한 그들은 지휘자의 그 짧은 순간의 움직임조차 놓치지 않았다.
차이콥스키 호두까기 인형. 제 1막.
작은 서막..
청량하게 올라가는 바이올린의 합주를 시작으로 이제까지 굳게 잠겨 있던 호두까지 인형이라는 동화 세계의 문이 활짝 열렸다.
바이올린과 플룻의 화려한 선율은 미지의 세계를 인도하는 요정이 되어 발터 뮐러라는 단 한 사람의 청중을 인도하기 시작했다.
“오오..”
수많은 악기에게 뿜어져 나오는 선율들이 작은 지휘봉의 움직임에 맞춰 거대한 화음을 이루자 발터 뮐러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곡의 흐름에 대한 완급 조절이 나쁘지 않아. 자신의 머릿속에 담긴 환상곡의 이미지를 제대로 살려내고 있군.’
특히나 바이올린의 선율 속에 때때로 녹아드는 클로켄슈필의 독특한 음색이 연주 중인 요나스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과연 거장 발터 뮐러의 제자라 이건가? 확실히 제법이군….’
한편 오케스트라를 지휘 중이던 차민준 역시 요나스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과연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오케스트라 악단이라 이건가? 다들 지휘를 따라오는 반응 속도가 엄청나….’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왼편에서 모든 단원들을 이끄는 악장 요나스의 기민한 대처 덕분이었다.
그를 거쳐 간 수많은 지휘자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한 수많은 교향곡이 지금의 요나스를 만들어내었다.
‘역시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군. 요나스 프레데릭과 차민준의 만남은 서로에게 굉장한 경험이 될 거야.’
그들의 연주를 지켜보던 발터 뮐러는 흐뭇한 미소와 함께 두 눈을 감은 채 호두까지 인형이라는 거대한 환상곡에 몸을 맡겼다.
&
그 날 밤.
단원들을 먼저 호텔로 보낸 요나스는 발터 뮐러의 개인실에서 함께 차를 나누었다.
평소 홍차를 즐기는 요나스에게 차를 건넨 발터 뮐러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잠시간의 정적 속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요나스였다.
“차민준이라고 했나요. 그 젊은이..”
“그렇다네. 헌데 드문 일이군. 자네가 먼저 그 아이의 이름을 물어볼 줄이야.”
제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금세 싱글벙글 웃고 있는 발터 뮐러의 표정에 요나스는 그가 얼마만큼 제자를 생각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매우 훌륭한 실력이었습니다. 또한 매우 순수하더군요. 악보를 덮자마자 저희 단원들을 지휘봉 하나로 휘어잡을 줄이야.”
“그 아이의 지휘에는 잠시간의 틈도 없다네. 빠르고, 정확하지. 내가 재미있는 영상을 하나 보여 줄까?”
발터 뮐러는 요나스가 미처 대답할 새도 없이 미리 준비하고 있던 VTR에 전원 버튼을 눌렀다. 영상 테잎은 이미 들어 있었기에 잠시 후 TV에는 어린이들로 꾸려진 작은 오케스트라가 무대에 올랐다.
“저건…? 설마..”
“그렇다네. 11살의 차민준이지.”
한눈에 보아도 개구쟁이 같은 천진난만한 미소와 함께 시작된 어린이들의 베토벤의 교향곡은 순식간에 요나스를 압도 시키고 있었다.
“나 역시 아직도 가끔씩 이 날을 회상하며 돌려보곤 한다네.”
제자의 어린 시절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는 발터 뮐러의 눈빛은 마치 자식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과도 닮아 있었다.
안타깝게도 슬하에 자식이 없던 발터 뮐러는 어린 차민준을 진정 자신의 아이라 생각하고 길러내었다.
어쩌면 그랬기에 쇼팽 콩쿨에서 심사위원들의 편파적인 심사를 더욱 용서 할 수 없었는지도 몰랐다.
“특출 난 지휘 실력을 겸한 발군의 피아니스트라. 마에스트로께서 괴물을 키워내셨군요.”
어린이 오케스트라 영상을 모두 본 요나스는 존경과 진심을 담아 발터 뮐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발터 뮐러에게선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미안하지만 나는 민준이에게 아무 것도 가르친 것이 없다네.”
“네…? 그게 무슨..”
“지휘에 대해서도 그리고 피아노에 대해서도 나는 일절 아무것도 가르친 것이 없어.”
“그렇다면 저 어린 아이가 모든 것을 스스로 깨우쳤단 말씀입니까?”
요나스의 질문에 발터 뮐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다네. 그리고 오늘 또 한 번 그 아이가 성장했음을 느꼈지. 피아노를 연주할 때의 그 손가락 말일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그렇지. 역시 자네도 눈치 채고 있었군.”
“물론이죠. 그 구부러진 새끼손가락은 그의 상징과도 같으니까요.”
“맞아. 호로비츠 만큼 손가락이 길고 유연하지 않으면 억지로 따라할래도 할 수 없는 연주법이지.”
“저 역시 한국에서 호로비츠의 연주법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동감이야. 나조차도 건반 위에 올려진 그 아이의 손을 보았을 때는 깜짝 놀랐으니까. 사실 불과 6개월 전만해도 그런 버릇은 없었다네.”
“네!? 그게 정말입니까?”
이번에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발터 뮐러의 모습에 요나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서 말인데. 악장인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다네.”
“네? 그게 무엇입니까.”
“나와 자네의 오케스트라. 그리고 차민준. 이 셋이 함께 피아노 협주곡을 해보지 않겠는가?”
“그 말은 공연의 프로그램을 바꾸신다는 말씀입니까?”
“부득이하게도 약간의 수정을 거쳐야하겠지?”
“혹시 따로 생각해두신 곡이라도..”
그러자 발터 뮐러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민준이가 호로비츠의 연주법을 깨우쳤다면 이미 곡은 정해져 있지 않은가?”
발터 뮐러의 질문에 요나스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설마 라흐마니노프..”
“역시 자네. 눈치가 빠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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