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Ep.17 : 호두까기 인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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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까기 인형.
차이콥스키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발레곡 중 하나로 백조의 호수와 함께 전 세계 음악인들에게 사랑받는 대표곡이기도 하다.
본래 E.T.A 호프만의 동화로 세상에 알려진 호두까기 인형은 당시 유행이었던 발레 공연에 상당히 적합한 스토리 라인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동화 속 주인공인 호두까기 인형은 15세기 무렵부터 사용된 물건이었는데, 건과류 중에서도 가장 딱딱한 호두 껍질을 아이들도 안전하게 깰 수 있도록 고안 된 일종의 장식품이자, 생활 용품이다.
덕분에 호두까기 인형의 동화 내용 역시 지극히 아이들 취향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못생긴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 받은 클라라는 굉장히 착한 여자아이였는데, 하필 동생이 장난을 치는 바람에 선물 받은 호두까기 인형의 다리가 망가져 버렸다.
마음씨 착한 클라라는 인형을 고쳐주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인형을 품에 안고 잠이 들었는데, 주변이 소란스러운 느낌에 눈을 뜨자 커다란 생쥐가 호두까기 인형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리에 부상을 입은 호두까기 인형이 위기에 몰리자, 클라라는 커다란 빗자루로 생쥐 왕을 물리쳐 인형을 구해준다.
그 순간.
호두까기 인형에 걸려 있던 마법이 풀리며 인형은 멋진 왕자가 되고 그는 생명의 은인인 클라라를 자신이 살고 있는 환상의 나라로 초대하는데..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호두까기 인형.
제 1막 작은 서곡.
바이올린의 선율이 가득한 숲속을 거닐 듯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차민준은 두 눈을 감은 채 음악에 집중하고 있었다.
차이콥스키의 작은 서곡은 본격적인 공연을 시작하기 전 관객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제작된 곡이다.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 울려 퍼지는 이 음악은
객석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은 관객들에겐 공연에 대한 기대감을..
아직 극장에 들어오지 못한 관객에겐 곧 본 공연이 시작됨을 알리는 예비종과도 같은 곡이었다.
그만큼 작은 서곡은 호두까기 인형의 동화적인 느낌을 단번에 느낄 수 있는 환상곡으로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설레임이 가득한 곡이었다.
…분명 그러한 곡이어야 했다.
‘하지만 너무 딱딱해….’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자들은 한사람, 한사람이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그들이 내는 선율과 화음은 교과서에 실려도 될 만큼 모든 구간에서 정확하고 일정한 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한 치의 어그러짐도 없는 기계적인 화음 속에서 민준이는 되려 묘한 불편함을 느꼈다.
그런 민준이의 뒤에는 흔들의자에 앉자, 편안히 음악을 즐기는 발터 뮐러가 있었다.
잠시 후. 작은 서곡의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민준이는 도저히 안 되겠는지 지휘 중인 손을 멈추었다.
“저기, 잠시 만요.”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자들은 연령층이 상당히 높고 하나하나 경력이 높은 편이었기에 민준이의 입장에서 함부로 그들의 음악을 평가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할말은 해야만했다.
“우리의 연주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
연주를 멈춘 것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악장에게 민준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그럼 왜 연주를 멈춘 거지?”
“그게..”
딱히 지금 상황에 할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보다 나은 표현 방법은 없었다.
자신을 껄끄러히 바라보는 악장의 눈빛에 민준이는 볼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연주를 너무 잘하셔서요.”
“뭐…?”
그러자 뒤에 앉아 있던 발터 뮐러가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핫~!!”
고지식해보이는 악장은 박장대소를 터뜨리고 있는 발터 뮐러를 얄밉게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함께 연주하는 영광을 누리기 위해 이렇게 지구 반대편까지 찾아 왔건만, 제자랍시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를 지휘대 위에 올려두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현재 발터 뮐러는 손에 가벼운 화상을 입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은 오케스트라 악단이 한국에 도착한 첫날 불고기 회식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오~! 요나스. 이게 대체 얼마만인가?”
“마에스트로 발터 뮐러.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이번 공연에 저희 베를린 필하모닉을 선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지휘에 부끄럽지 않은 악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 사람. 딱딱한 성격은 여전하구만.”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
요나스 프레데릭.
26세에 이미 세계적으로 바이올린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올해로 48세가 되었다.
무려 22년의 세월 동안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지내온 그는 8년 전.
발터 뮐러가 클래식계에 잠정 은퇴를 선언했을 때 베를린 악단의 콘서트마스터에 올랐다.
이전에는 악단의 연주자 중 한 사람으로서 발터 뮐러가 지휘하는 베토벤을 몇 번인가 함께 연주한 적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수석 연주자들이 하나둘 은퇴를 선언하는 와중에도 굳건히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켜온 그는 마침내 콘서트마스터의 지휘에 올라섰으나 발터 뮐러가 공연을 잠정 은퇴하는 바람에 그의 콘서트마스터로서 함께 무대에 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완벽주의자인 그는 특유의 완고한 성격 탓에 단원들에게 미움도 많이 샀지만, 한 단체를 이끄는 수장으로서 단원들의 불만 역시 당연히 받아들이는 한 부분이라 여기고 있었다.
덕분에 그를 수장으로 둔 베를린 필하모닉은 그 어떤 음악에서도 음표하나 놓치지 않고 완벽한 연주를 해내는 것에 정평이 내려져 있었다.
깐깐한 그의 성격을 대변 하듯 양끝이 둥글게 말아 올려진 깔끔한 카이저수염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중년이었다.
“자네 수염을 길렀구만~ 아주 잘 어울려.”
“감사합니다. 마에스트로.”
“한 번 잡아 당겨 봐도 되나?”
“······.”
“노, 농담일세.”
이 후.
오케스트라 악단의 한국 방문을 축하하기 위해 식사를 겸한 작은 연회가 열렸다.
발터 뮐러의 공연을 성사시킨 일등공신 송 현우 대표의 축사와 함께 발터 뮐러는 오케스트라 단원들 모두와 악수를 나누며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전했다.
“이것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일세.”
“오~ 불고기입니까? 저 역시 해외 공연을 다니며 몇 번인가 먹어 본적 있습니다.”
“나는 처음이야~”
“나도 처음이지만, 향이 매우 좋군. 맛있을 것 같아.”
평균 나이가 40대 후반인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자들은 질긴 스테이크 대신 연하게 다져진 소불고기에 매우 흡족해했다.
“역시 맛있군요.”
“오~ 정말 맛있어. 맥주 맛이 좀 아쉽긴 하지만, 음식은 아주 훌륭하군.”
“크흐~ 그래도 장시간 비행 후에 마시는 맥주라 그런지. 각별하군.”
“호프먼 자네는 비행기 안에서도 맥주를 5캔이나 마셨잖아~”
다들 오랜 비행으로 피곤할 법도 하건만 일단 맥주와 고기가 들어가자, 힘이 나는지 연회는 즐거운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오직 요나스 프레데릭 만은 악장이라는 위치 때문인지, 스스로 술과 음식을 자제하고 있었다.
“이보게 요나스. 준비한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가?”
“아닙니다. 제가 입이 좀 짧은 편이라. 충분히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그런가? 이거 아쉽군. 자네를 위해 특별한 음식을 주문했는데 말이야.”
“특별한 음식?”
“단원들에게 들어보니 계란 음식을 좋아한다지?”
“네. 그렇긴 합니다만..”
“여기 한국에 아주 기가 막힌 계란 요리가 있다네. 아까 주문했으니, 지금쯤 나올 때가 됐는데…”
그때 상당히 어려 보이는 여 종업원이 두 손으로 무언가를 손에 들고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익스큐즈 미. 잠시만 지나갈게요.”
영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쓰며 발터 뮐러에게 다가오던 종업원이 거의 다가왔을 즈음..
한 연주자 하나가 친구의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며 뒤로 몸을 젖혔다.
그 순간. 하필 그 뒤를 지나가던 종업원이 그의 어깨에 다리가 걸리며 몸 전체가 앞으로 쏠려 버렸다.
“엄마앗!!”
종업원의 비명과 함께 펄펄 끓던 뚝배기 그릇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멀리서 그 상황을 지켜보던 진아가 깜짝 놀라 다급하게 발터 뮐러에게 외쳤다.
“어어!? 조심하세요. 선생님!!”
종업원의 손을 떠난 작은 뚝배기가 발터 뮐러에게 날아든 그 순간.
터억..
가까스로 발터 뮐러가 양손으로 그것을 잡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으앗!! 뜨거!!”
안에서 계란찜이 부글부글 끓고 있던 뚝배기를 잠시 동안 맨손으로 잡은 탓에 발터 뮐러는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에 물집이 잡히는 화상을 입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서둘러 달려온 진아와 민준이에게 발터 뮐러는 별것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이미 그의 손바닥은 발갛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세계적인 지휘자의 갑작스런 부상에 연주자들은 기겁했지만, 다행히 크게 데이진 않았던 터라 발터 뮐러는 가벼운 치료와 함께 공연 전까지 손을 아끼기로 하였다.
그러한 사정에 발터 뮐러의 요청에 따라 연주회 전까지 공연 연습은 민준이가 그를 대신하고 있었다.
“연주를 너무 잘해서 문제라고?”
악장 요나스 프레데릭은 솔직하지만 어이없는 지휘자 대리의 대답에 황당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자 지휘자 뒤에서 웃고 있던 발터 뮐러는 붕대를 감은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입을 열었다.
“정확하군. 정확해. 맞아~ 자네들은 너무 잘해서 문제야. 킥킥.”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연주를 잘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지금 것 수많은 지휘자들과 부딪히면서도 이런 문제가 거론 된 적은 없었다.
요나스는 악단에 대한 괴팍한 평가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정확한 이유를 묻기로 했다.
“음.. 확실히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악단이라, 음의 배분도 훌륭하고, 화음의 밸런스도 아주 좋아요.”
“그렇다면 뭐가 문제인가?”
그러자 민준이는 지휘봉 끝을 살짝 구부리며 자신의 생각을 조심스레 꺼내보았다.
“판타지..가 부족하고 해야할까?”
“판..타지?”
“호두까기 인형은 발레 공연 중에서도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흐르는 이야기잖아요.”
그런 민준이의 지적에 요나스는 차분한 어조로 곧장 반박했다.
“지금 우리가 아무런 감정도 없이 악보대로 연주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건가?”
“아뇨~!! 그건 절대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연주에는 분명 특유의 감동이 서려있어요. 다만…”
“다만?”
“뭐랄까.. 그..”
머릿속에 맴도는 이 오묘한 감정을 달리 전할 방법이 없었던 민준이는 이윽고 양손으로 머리를 헤집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냥.. 직접 들려 드리는 게 나을 것 같네요.”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백번 듣는 것보다 차라리 한번 보는 게 낫다는 말.
민준이는 그들에게 자신의 이상향을 보이기 위해 직접 피아노 앞에 앉았다.
건반 뚜껑을 열어젖히는 그의 모습에 발터 뮐러는 기대에 찬 눈으로 민준이를 바라보았다.
‘호오.. 저 형태는 제법 오래된 피아노로군.’
민준이가 마주 앉은 피아노는 그의 작업실에 있던 오래된 피아노였다.
‘호오.. 우리들 앞에서 연주를 하려는 건가? 재미있군. 어디 그럼 마에스트로의 제자가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볼까?’
바이올린 활을 움켜쥔 채 요나스는 피아노 앞에 앉은 젊은 지휘자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건반 위에 올려져있던 민준이의 오른쪽 새끼손가락이 부드럽게 말려올라갔다.
‘제법 독특한 주법(奏法)을 사용하는군. 호로비츠의 흉내라도 내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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