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Ep.16 : 거장의 귀환. (5)
‘방금 한 순간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전혀 들리지 않았어!?’
그것은 역사상 모든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도입부라 평가 받은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세상에 그 진가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열정적이고 우아한 오케스트라의 선율과 천둥처럼 우렁차게 장내를 뒤흔드는 피아노 선율이 화음을 이루는 순간.
관객들의 혼란스러워 하는 반응은 이미 예견 되어 있었을 지도 몰랐다.
“아니.. 피아노라는 악기가 이렇게 큰 소리를 낼 수 있었나!?”
“뭐, 뭐야 이게!?”
“피아노 하나로 오케스트라를 압도 시키다니..”
실로 기가 막힌 순간이었다.
60kg 강철 현에서 뿜어져 나오는 6 옥타브의 선율이 태풍처럼 휘몰아치며 청중들의 고막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가장 앞에 앉아 있던 관객들은 마치 음계 하나하나가 자신의 몸을 관통하고 지나가는 듯한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상반신 전체를 이용해 건반을 내리누르는 독특한 주법.
그중에서도 오른쪽 새끼손가락은 건반을 누르지 않을 때는 동그랗게 말려 있었다.
한 동안 선채로 멍하니 피아니스트를 바라보던 루빈스타인은 심장을 조여 오는 듯한 전율에 몸을 부르르 떨며 풀썩 자리에 앉았다.
“저 비싼 강철 현 피아노를 저렇게 막 다루다니!! 제 정신인가?”
하지만 민준이의 생각은 루빈스타인과 달랐다.
‘지금까지 이 정도 테크닉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피아노인가? 건반이 엄청 뻑뻑한데?’
팽팽하게 당겨진 강철 현의 장력에 연주중인 민준이의 손끝이 부들부들 떨려왔지만, 그것도 잠시 무대 위의 그랜드 피아노는 마치 거친 야생마를 길들이는 듯한 짜릿한 쾌감을 전해 주었다.
‘제법 건반을 치는 재미가 있는데? 상당한 실력을 가진 장인의 피아노야….’
소나타 형식을 취하고 있는 1악장은 비교적 조성과 전개가 자유로운 편이다.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하나의 화음을 위해 서로 조화를 이룰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저 웅장한 오케스트라에 번개 같은 피아노 선율로 맞서 싸울 것인가.
합주 파트에서 어느 정도 건반의 감각을 익힌 민준이는 주저 없이 후자를 택했다.
‘권선양의 피아노와는 그 기세가 달라?’
차이콥스키는 마치 자신의 오케스트라에 싸움을 걸어오는 듯한 도발적인 피아노 선율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관객의 호응을 위해서라면 그것 역시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어디 마음대로 해보게나.’
지휘봉을 내려놓고 피아노 독주가 시작된 그 순간.
사나운 맹수와도 같이 민준이는 차이콥스키의 세분화된 악정을 하나하나 파쇄 해나가기 시작했다.
사뭇 어색함이 느껴지는 선율 속에서도 차이콥스키의 치밀한 악정 분배가 돋보이는 독주 파트는 루빈스타인 원장이 가장 먼저 혹평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그때 피아노 독주를… 이렇게 쳐야하는 것이었던가?’
민준이의 연주를 지켜보던 루빈스타인은 같은 피아니스트로서 깨달음을 얻은 것만 같았다.
도입부에서 강철 현이 어쩌고 불만이 가득했던 그의 목소리는 수많은 음계와 사투를 벌이는 한 청년의 정열적인 연주에 조용히 사그라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멈출 줄 모르고 건반 위를 활개 치던 민준이의 손이 연주 시작 4분 무렵에 아주 천천히 멈추었다.
빰.. 빠밤..
빰… 빠바바밤…
천둥벌거숭이 마냥 날뛰던 피아노 선율을 점잖게 타이르듯 호른과 트럼본의 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 순간 엄숙한 미사 분위기에 장난이라도 걸 듯이 다시 피아노 소리가 통통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따단, 따단, 따단, 따단따단~ 따단~
뚜둔, 뚜둔, 뚜둔, 뚜당~ 뚜당~
도입부에서 그토록 서정적이었던 협주곡이 어느 순간 환상곡풍의 멜로디로 변모되자, 잔뜩 긴장했던 관객들의 표정에 미소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빠르지만 절제된 손놀림.
건반을 끊어 치는 스타카토 주법의 교과서와도 같은 선율이었다.
‘어디서 저런 괴물 같은 녀석이….’
바이올린 하나로 단원들을 이끌어가던 악장은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동양인 청년의 실력에 감탄했다.
‘저렇게 많은 소리를 내면서도 음계 하나하나를 확실히 살려내다니….’
모스크바 연주홀의 피아노 성능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눈앞의 저 남자는 피아노의 성능을 100%.. 아니 120%를 발휘하고 있었다.
이윽고 따스한 햇살 아래 반짝이며 흐르는 시냇물처럼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오케스트라의 선율에 도발적인 피아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포근하게 그들의 품에 달려 들었다.
그러자 차이콥스키는 그런 민준이의 피아노를 밖에서 마음껏 뛰어 놀다 들어온 아이를 반기듯 부드럽게 감싸 안아 주었다.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한 차이콥스키의 지휘 아래 민준이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베토벤 선생님과는 지휘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네….’
자신이 가진 특유의 카리스마로 높은 곳에서 찍어 누르듯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부분을 자신의 스타일대로 움직이던 베토벤의 지휘와는 달리 차이콥스키의 지휘는 굉장히 편안한 느낌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피아니스트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모든 단원들이 스스로의 연주를 할 수 있도록 북돋아 주는 어머니의 손길처럼..
그의 지휘봉에는 따스함이라는 온도가 서려있었다.
처음 관객들에게 엄청난 임팩트를 가져다주었던 민준이의 피아노는 차이콥스키의 품 안에서 오케스트라와 함께 성대한 연주 행하자, 어느새 관객들은 두 손을 모은 채 경외의 시선으로 무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제 1악장.
약 20분에 달하는 연주 시간동안 차이콥스키와 차민준은 협주과 독주를 반복하며 수많은 음계를 만들어 내었다.
객석의 많은 사람들은 1악장의 처음에 들려준 서정적이면서도 황홀했던 도입부가 다시 반복될 거라 예상했지만, 충격적이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보통 이 시대의 음악은 임팩트 있는 도입부 같은 경우는 전개부를 지나 꼭 한번 반복되기 마련이었는데, 차이콥스키는 그것을 아예 배제시켜 버렸다.
이러한 선택은 충격을 넘어서 파격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었다.
‘그 웅장했던 도입부를 다시 듣기 위해서는 다음 연주회에서나 들을 수 있다는 말이잖아!?’
어째서 이토록 훌륭한 도입부를 연주 중간에 다시 전개하지 않은 것인지 관객들은 굉장히 의아해했다.
하지만 다들 도입부에 신경 쓴 나머지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잊고 있었다.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악장이 연주 되는 동안.
단 한 번도 같은 음이 겹치는 구간이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잠시 후.
1악장의 연주를 끝낸 차이콥스키가 손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단원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사전에 연습을 하지 않은 것 치고 굉장히 만족스러운 무대였기 때문이다.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은 1악장을 제외하면 나머지 2악장과 3악장은 6~7분 정도였기에 어느새 절반 이상의 연주를 마친 셈이었다.
차이콥스키는 1악장 내내 훌륭한 피아노 연기를 보여준 민준이와 단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다들 3악장을 위해 힘을 아껴두게. 그런 의미에서 2악장은 조금 천천히 쉬어가볼까?”
단원들 모두의 동의를 얻은 차이콥스키의 지휘봉이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자, 민준이는 긴 숨을 몰아쉬며 건반에서 손을 떼었다.
2악장의 편성은 바이올린과 플룻이 무대의 분위기를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마치 어머니의 자장가를 연상 시키듯 도입부에서 아련하게 들려오던 플룻의 고운 소리가 멈추자, 민준의 손은 깃털처럼 부드러운 동작으로 건반 위에 내려앉았다.
그 연결 동작이 어찌나 자연스러웠는지, 무대를 지켜보던 대부분의 여성 관객들이 입을 가리며 감탄사를 내뱉을 정도였다.
2악장의 템포는 안단티노 셈플리체.
피아노 협주곡의 두 번째 악장인 이 곡은 느린 안단테의 악장과 스케르초 악장을 하나로 합친 굉장히 혁신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연주가 시작하기 전 차이콥스키의 말대로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관객들 모두가 평온한 마음으로 쉬어갈 수 있는 전원적인 형식.
그 안에서 민준이의 피아노는 특유의 강렬함을 버리고 물이 흐르듯 부드러운 연주로 관객들의 마음에 묶인 긴장의 끈을 풀어내고 있었다.
2악장은 1악장과는 달리 전개부의 잔잔함이 후반에 다시 되돌아오기에 편안히 눈을 감고 연주에 집중하던 관객들은 2악장이 끝난 줄도 모른 채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세 번째 악장에서 차이콥스키와 차민준이 서로를 바라본 그 순간.
피아노 협주곡 역사상 가장 맹렬하고 장대한 스팩터클이 펼쳐졌다.
마치 슬라브 무곡을 연상케 하는 굵고 거친 건반 터치.
그 뒤를 바싹 쫓는 관악기의 향연에 관객들의 두 눈이 부릅 떠졌다.
‘이것이 정말 차이콥스키가 만들어낸 피아노 협주곡이란 말인가?’
평소에도 별로 말이 없고 묵묵히 학생들을 가르치기만 했던 그의 음악에서 러시아 특유의 호방함이 가득 담긴 이런 명곡이 탄생할 줄이야..
한편 엄청난 속도로 건반을 두드리는 와중에도 한 손으로 악보까지 넘겨가며 오케스트라의 합주를 따라가는 민준이의 피아노는 오케스트라의 맹렬한 기세에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건반을 누르는 손끝에 더욱 힘을 가해 끝까지 따라 붙고 있었다.
‘저 손에는 귀신이라도 붙어 있는 것인가?’
1, 2, 3악장의 모든 연주 시간을 더한 다면 30분이 가뿐히 넘는다.
곡 자체가 피아노 협주곡인 만큼 그에게 배분된 파트가 많기에 지치기라도 하건만 그의 건반은 처음과 똑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냐. 오히려 소리가 더 청명해진 듯한 이 느낌은 뭐지?’
악장의 느낌은 정확했다.
1악장에서 폭포수처럼 쏟아낸 화음의 연속. 그리고 2악장에서 선보인 깃털 같이 부드러웠던 연주를 통해 차민준은 강철 현으로 이루어진 야생마를 길들이는데 성공한 것이다.
차이콥스키의 훌륭한 지휘아래 민준이는 오로지 피아노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석교수와 함게 했던 오케스트라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좁은 실내가 아닌 넓은 초원을 달리는 듯 한 짜릿한 감각.
하지만 자신이 어디로 향하든 그의 앞을 막아서는 오케스트라의 화려한 합주에 민준이는 윗입술을 살짝 핥으며 더욱 빠르게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만큼은 지휘봉을 잡고 있던 차이콥스키마저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만들어낸 오케스트라의 화음을 전부 비껴 치고 있어….’
당황한 차이콥스키는 두 팔을 높이 올리며 단원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피아노가 높은 소리를 내는 만큼 오케스트라는 더욱 웅장해야만하니까…
이윽고 단원들이 만들어낸 화음의 벽이 점점 높아져가며 3악장의 최고조에 이른 그 순간.
3악장의 에필로그라 할 수 있는 피아노의 코다(coda) 부분에서 차민준은 모스크바 연주 홀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가장 거대한 환상을 보여 주었다.
숨 쉴 틈조차 없이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선율의 소나기.
그것을 지켜보던 루빈스타인은 들고 있던 지팡이를 떨구며 입을 열었다.
“카덴차(cadenza).. 비르투오시티(virtuosity)..”
무반주에서 연성 되는 피아니스트 최고의 기교술..
연주가 끝나고,
시간은 멈춰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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