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Ep.16 : 거장의 귀환. (3)
“저.. 저건 내 피아노 협주곡 이잖아?”
좁은 식당 안에서 울려 퍼진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은 도입부 특유의 웅장함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한 순간에 빼앗아 올 수 있었다,
“오..? 이 곡은 대체 뭐지?”
“그러게 나도 처음 들어보는 곡이군. 설마 저 청년의 오리지널인가?”
음악에 식견이 넓은 주인조차 처음으로 접해보는 아름다운 곡.
아직 정식으로 연주회를 가지지 못한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은 분명 생소하지만, 너무나도 웅장하였고,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뚜둥. 뚜둥. 따당~
뚜둥. 뚜둥. 따당~
오케스트라 파트가 끝나자마자 묵직하게 건반에 내리 꽂히는 피아노 파트의 선율에 차이콥스키가 들고 있던 잔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건 말도 안 돼. 악보도 없이 피아노 파트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 파트까지 연주해낼 수 있다니. 대체 어떻게?’
현재 민준이가 치고 있는 피아노 협주곡은 모스크바 음악원의 원장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 졸작이라 폄하한 굉장히 난해한 곡이다.
당시 러시아에서도 손꼽히는 피아니스트 중 하나였던 루빈스타인이 차이콥스키의 곡을 이토록 무시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피아노 협주곡임에도 불구하고 피아니스트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오케스트라 편성.
그리고 연주자의 실력을 시험해보듯 무수히 잘게 나눈 악정.
마지막으로 현 시대의 피아노 구조상 연주가 불가능한 부분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피아노는 시대를 거듭해오며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물론 외형적인 면에서는 크게 달라진 점이 없지만, 내부적으로는 굉장히 많은 변화를 거쳐 온 것이 바로 이 피아노이다.
헝가리의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는 자신의 장기인 힘 있는 연주를 위해선 피아노의 내부 현을 모두 강철로 해주길 원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강철로 이루어진 튼튼한 현의 장력을 버티기 위해선 피아노 역시 나무가 아닌 철골 프레임을 만들어야 했고, 그것은 180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
물론 1875년인 차이콥스키의 시대에 철골 프레임의 피아노는 분명 존재하였으나, 문제는 그 희소성에 따른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다.
거의 집 한 채 값과 맞먹는 철골 프레임의 피아노는 역시 대중화가 쉽지 않았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도 피아노는 여러 대가 있지만, 철골 프레임은 물론이고 강철 현을 사용하는 피아노조차 연주 홀에 딱 한 대만 설치했을 뿐이었으니까.
레가토와 스타카토 그리고 부드러운 터치나 몸 전체를 이용하는 강한 터치에서 나오는 강렬한 선율을 내보내기 위해서 철골 프레임을 사용한 것은 피아노라는 악기의 완성이자, 꼭 필요한 혁신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바로크 시대에는 현의 장력이 모자라 음을 길게 유지 할 수 없었기에 음과 음 사이를 끊지 않고 원활히 연주하라는 표기인 ‘레가토’ 주법이 아예 없었다고도 한다.
그런데..
지금 차이콥스키의 눈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저 청년은 대체 무얼까?
화려한 레스토랑도 아닌 서민들이 즐겨 찾는 골목의 작은 식당에서 강철 현을 사용하는 고급 피아노를 들여 놓을 리가 만무하다.
기껏해야 3 옥타브 정도 나올 법한 낡디 낡은 피아노에서 어떻게 4 옥타브 이상의 선율이 쏟아져 나오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저 남자.. 건반이 가진 장력의 한계점에서 외줄타기를 하고 있군….’
이 시기의 보통 피아노는 짧게 끊어 치는 스타카토 주법이나 강한 터치를 자주 사용하면 건반이 부서지거나 내부의 현이 끊어지는 문제가 자주 발생하곤 했는데, 폭풍이 휘몰아치는 듯한 프레스티시모(prestissimo : 가능한 한 가장 빠르게) 속에서도 민준이의 물이 흐르는 듯한 연주는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피아니스트 권선과 함께 했던 부분까지 연주한 민준이가 팔을 높게 튕기며 마무리를 지어낸 순간. 작은 식당에 환호성이 가득 울렸다.
“이야~!! 형씨 제법인데?”
“기가 막히는구만~ 귀가 뻥 뚫리는 기분이었어.”
“이 봐. 내가 한 잔 살 테니, 신청곡 받아 줄 텐가?”
“어이~ 주인장 뭐하고 있어? 어서 보드카 내주지 않고?”
음악에 취해 한동안 멍하니 민준이를 바라보던 가게 주인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탁자 위에 보드카에서 손을 떼었다.
“가져 가슈.”
“오~ 내가 이 가게 오면서 주인장이 보드카 걸고 내기하는 건 많이 봤지만, 진짜로 주는 건 처음 봤네.”
“시끄러. 저런 연주를 듣고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가게 문 닫아야지. 안 그래?”
“크큭~ 에끼 이 사람아. 저 정도 연주를 해야 보드카를 내 줄 거면 앞으로 내기하지 마!!”
이윽고 피아노 건반에서 손을 땐 민준이가 카운터에서 상품인 보드카를 손에 들고 돌아오자, 차이콥스키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당신. 대체 정체가 뭐지? 피아니스트인가?”
“이 정도 실력이면 스스로 피아니스트라고 소개해도 괜찮겠죠?”
민준이는 탁자 위에 선물로 받은 보드카 병을 차이콥스키 앞에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제 선물입니다. 당신의 피아노 협주곡은 모든 피아니스트에게 선물과도 같은 곡이니까요..”
민준이의 마지막 말에 의자에 앉아 있던 차이콥스키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차이콥스키는 처음 보는 청년의 위로에 그토록 격한 감정을 느낀 걸까?
비록 루빈스타인 원장은 자신의 협주곡을 피아니스트를 엿 먹이는 곡이라 무시했지만,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은 그 무엇보다 피아니스트를 위한 곡이었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의 웅장함에 지지 않는 강렬한 피아노 선율을 보여주기 위해 각고의 노력과 악정의 배분.
때로는 조화롭다가도 서로의 웅장함과 화려함이 대결하듯 호기롭게 이어지는 전체적인 곡의 흐름..
그 모든 것은 자신의 오케스트라가 아닌 단 한사람.
피아니스트를 위해서였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줄이야..
34세의 차이콥스키는 고개를 떨군 채 숨죽여 흐느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로서 저는 앞으로도 저만의 음악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차이콥스키는 그 어느 때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자신의 음악을 이해해주는 한 사람을 만난 것만으로도 이토록 날아갈 듯이 기분이 좋을 줄이야.
기분 같아선 콧노래라도 흥얼거리고 싶었지만, 아파트 현관을 나설 때는 조심해야 했다.
끼이익..
나무 문을 열고 복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차이콥스키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방을 나섰다.
이제 방문만 제대로 걸어 잠그면..
그때였다.
“차~이콥스키씨!!”
뒤에서 들려오는 앙칼진 메르켈 부인의 목소리에 차이콥스키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쿵쿵쿵쿵.
신경질이 가득 묻어난 발걸음 소리가 그의 목덜미 바로 뒤에 까지 들려오자, 그는 차분히 돌아서서 불독을 닮은 메르켈 부인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안녕하시오. 메르켈 부인. 오늘도 아름다우시군요.”
“안녕? 안녀엉? 이봐요. 차이콥스키씨. 당신 지금 밀린 월세가 얼마인줄이나 알고 계세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메르켈 부인.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제 곧 제 연주회가 열리면 그동안 밀린 월세 모두 지불할 테니까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지난 달에도, 지지난 달에도 똑같은 소리하셨잖아요. 아니 매번 연주회 포스터에 이름 한 번 올라와 본 적 없으면서 대체 그놈의 연주회는 언제 하실 건데요? 1년 뒤? 2년 뒤?”
“그,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됐구요. 저도 돈 없는 음악가에게 이만큼이면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거든요? 다 필요없으니까. 내일 당장 방 빼세요.”
“네? 아니. 메르켈 부인. 당장 내일이라니, 제가 이 곳 말고 어디를 가야한단 말입니까?”
“그거야 당신 사정이지요. 정 갈 곳이 없으면 음악원 교실이라도 들어가 사시던지. 누굴 자선사업가로 아나?”
할 말을 모두 마친 메르켈은 그대로 빙글 돌아서 계단으로 향했다.
“메르켈 부인. 메르켈 부인!! 잠시 제 말 좀..!!”
안타까운 마음에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메르켈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자신의 집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홀로 남은 복도에는 차이콥스키의 한숨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
“제발 부탁입니다. 원장님. 제발 딱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이봐 차이콥스키. 지난 번 발표회 때 내 권고에 악보하나 수정하지 않겠다던 그 모습은 어디로 갔지?”
주말 연주회의 막이 오르기 한 시간 전.
차이콥스키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루빈스타인 원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연주회를 하지 않으면 돈을 벌 수 없다.
오늘 연주회에서 수입을 올리지 못한다면 당장이라도 그는 길바닥에 나앉아야 할 지경이었으니까..
그러나 자신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 해보아도 역시 되돌아오는 루빈스타인의 말은 차가웠다.
“이보게 차이콥스키. 우린 단 한 번도 연주회를 갖지 못한 자네에게 매주 100루블씩 주급을 지불하고 있어.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나?”
얌체 같은 원장의 질문에 차이콥스키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래. 내가 백번 양보에 자네의 연주회를 열어준다고 해도, 피아노 협주곡에 피아니스트가 없다면 그게 무슨 협주곡인가? 들어보니 발표회 때 배짱 좋았던 동양인 아가씨도 결국엔 그 이후로 모습을 감췄다지?”
“… 있습니다.”
“뭐라고? 좀 더 크게 말해보게.”
“피아니스트라면 있습니다.”
“뭐…?”
“그러니 연주회를 열어주십시오. 반드시 최고의 무대로 보답하겠습니다.”
불같이 활활 타오르는 차이콥스키의 두 눈에 루빈스타인은 창가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창밖에는 오늘의 연주를 기대하며 찾아온 귀족들의 마차가 끊임없이 줄지어 있었다.
“오늘도 모스크바 연주 홀에 많은 관객들이 찾아왔군. 나날이 높아져만 가는 관객들의 취향에 자네의 난해한 곡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차이콥스키는 밖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설령 지금당장 무대에 오른다고 하여도 제대로 된 연습조차 하지 못한 자신의 협주곡이 과연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잠시 그 두려움을 접어 두고..
어젯밤 차민준의 연주 이 후. 식당 안 풍경을 떠올린 차이콥스키는 차분히 분노를 억누른 채 은은한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성공 할 수 있습니다.”
“방금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네. 그렇습니다.”
“좋아. 그럼 다음 주 연주회 일정에 넣을지 한번 고민해보지.”
“네? 오늘이 아닌 다음 주라구요?”
“당연하지 않은가? 연습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자네 곡을 곧바로 무대에 올릴 수 없으니까.”
그때였다.
원장실 문이 노크도 없이 버럭 열리더니, 연주 홀 담당자가 뛰쳐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노크도 없이?”
“죄, 죄송합니다. 원장님. 워낙 급한 일이라..”
“음? 급한일이라니?”
“저기 그게.. 오늘 마지막 무대로 예정되어있던 연주곡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지휘자와 피아니스트가 어젯밤 술을 마시고 마차를 몰다가 사고가 났다고 합니다.”
“그걸 왜 지금 얘기하는거야!!”
“그게, 저도 방금 전달 받아서..”
“이런 젠장..!!!”
머리끝까지 화가 난 루빈스타인은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분개했다.
그때 가만히 사태를 지켜보던 차이콥스키가 입을 열었다.
“원장님..”
“또 뭔가!?”
“그 무대.. 저에게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잠시 후.
원장실에서 나온 차이콥스키는 흥분감에 주먹이 부들 부들 떨려왔다.
모스크바 음악원을 빠져 나와 연주회로 향하는 길.
골목에서 아이들에게 요술 성냥을 보여주던 청년은 차이콥스키의 등장에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떻게 됐나요?”
“손을 풀어 두게. 우리 차례가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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