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102화 (102/177)

[102] Ep.16 : 거장의 귀환. (2) -4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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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이게 전부 입니까?”

차이콥스키는 자신 손에 쥐어진 적갈색 지폐 한 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100루블.

이 돈이면 끽해야 아기 주먹만 한 감자 두 자루가 전부이다.

모스크바 음악 학원에서는 매주 토요일 강사들에게 주급을 전해주는데, 주 30시간을 일한 대가치곤 너무나 초라한 금액이었다.

“왜요? 불만 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불만 있으시면 직접 루빈스타인 원장님께 말씀하세요. 저는 정산만 할 뿐이니까.”

치와와를 닮은 여직원은 차이콥스키를 마지막으로 창구를 닫고 퇴근 준비를 서둘렀다.

창구 앞에서 잠시 동안 우두커니 서있던 차이콥스키는 결국 스스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목 안으로 스며오는 바람을 막아보기 위해 옷깃을 세워보았지만, 얇디얇은 그의 코트는 너무나 보잘 것이 없었다.

“교수님. 안녕히 계세요.”

“그래 조심히 가거라.”

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허울뿐인 교수라는 직함.

호주머니에는 달랑 지폐 한 장. 하지만 이마저도 없다면 당장 굶어야만 했다.

이미 질릴 대로 질렸지만, 돌아가는 길에 감자라도 사가야지, 지금 당장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강사들 주급은 연주 홀의 수입에 비례한다.

공연을 자주 열고 손님들을 불러 모아 학원에 이득을 가져다주어야지만 주급이 올라가는 형태.

아직 자신의 이름으로 초연을 이루지 못한 차이콥스키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최저 수입을 받고 있었다.

‘그 아이가 다시 와주기만 했어도….’

안타깝게도 발표회에서 자신을 도와주었던 ‘권선’이라는 아가씨는 그 후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첫 번째 피아노 협주곡은 완성하였지만, 그것을 부탁할 연주자가 없다니..

어떻게든 내일 연주회에 자신의 곡을 올리고 싶었지만 원장인 루빈스타인의 입김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지난 발표회에서 다른 강사들과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루빈스타인의 수정 권고를 단칼에 거절하였으니, 아마도 본보기를 삼는 것이겠지..

현재 모스크바에서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위치는 절대적이었으니까.

이렇게 속이 상하는 날에는 자주 들르는 바에서 보드카라도 한잔 마시고 싶지만, 주머니 속 100루블을 그런 곳에 무의미하게 쓸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다음 주에는 공연을 해야만 한다.

운이 좋으면 연주회를 관람하러 온 귀족들 중에서 자신의 후원자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정말로 최악의 상황일 경우..

‘피아니스트 없이 오케스트라만 해야할지도….’

물론 그렇게 된다면 루빈스타인 원장에게 엄청난 비웃음을 살 것이 분명하겠지만..

시린 바람을 맞으며 시장을 향해 걸어다는 차이콥스키는 어깨는 너무나도 축 쳐져 있었다.

음악원에서 시장까지는 제법 거리가 멀지만 마차 비를 아끼기 위해 걸어온 차이콥스키는 이미 몸도 마음도 꽁꽁 얼어있었다.

“요술 성냥 팝니다. 요술 성냥~ 이제 몇 개 안 남았어요.”

요술 성냥?

그러고 보니 요즘 젊은 제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성냥이 있었다.

손가락만한 크기의 스틱을 윗부분의 둥그런 쇠를 돌리면 신기하게도 불꽃이 솟아올랐다.

모스크바의 차가운 바람 탓에 야외에서 성냥을 사용하기 힘들었지만, 저것만 있다면 어디서든 담배에 불을 붙일 수 있었다.

“저 청년이 소문의 요술 성냥 상인인가?”

시장 입구에서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요술 성냥을 정신없이 팔아대던 남자는 마지막 하나 남은 요술 성냥을 손에 들고 외쳤다.

“오늘은 이게 마지막 요술 성냥입니다. 가격은 단돈 300루블~”

사.. 삼백 루블?

저 조그만 물건 하나가 자신의 3주치 주급이라니. 호주머니 속 100루블의 가치가 너무나도 초라하게 느껴졌다.

곧이어 청년의 손에 들려있던 주황색 요술 성냥은 중절모를 눌러쓴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기꺼이 300루블을 지불하고 손에 넣었다.

“우하하~ 이게 바로 소문으로 듣던 요술피리로군. 오오~”

“감사합니다. 손님을 마지막으로 오늘 장사는 끝났네요.”

“내가 운이 좋았군. 서둘러온 보람이 있어.”

중절모의 신사는 청년에게 사용법을 전해들은 뒤, 튀어 오르는 불꽃에 신기해하며 자리를 떠났다.

“오늘은 평소보다 빨리 팔았네. 다른 때 보다 더 많이 가져온 것 같은데, 그나저나 병원비라도 값을까 해서 루블을 벌고 있긴 하지만, 병원비 치곤 너무 많이 벌은 것 같은데..”

묵직한 돈다발을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던 청년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차이콥스키와 눈이 마주쳤다.

“아…”

내성적인 성격의 차이콥스키는 청년이 자신을 바라보자 곧바로 시선을 피했다.

족히 2~3천 루블은 되어 보이는 지폐 뭉치..

그에 비해 자신이 가진 것은 단돈 100 루블.

음악가로서 한낱 장사치에게 부러움을 느낀 자신이 너무나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그때 등 뒤에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스크바 음악원.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청년의 입에서 자신의 풀 네임이 들려올 줄이야. 얼떨떨한 기분에 고개를 돌리자,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맞으시죠?”

“당신이 내 이름을 어떻게…?”

그러자 청년은 차이콥스키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는 차민준이라고 합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이름.

차분히 자신의 소개를 마친 청년은 불어오는 바람에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아직 식사 전이시면 저와 함께 저녁을 즐기시건 어떤가요? 제법 괜찮은 보드카를 파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만. 물론 제가 사겠습니다.”

꿀꺽..

시장으로 오는 내내 보드카 생각이 간절했던 차이콥스키에게 그것은 굉장히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모르는 청년을 따라나설 순 없는 일이었다.

그때 망설이던 차이콥스키에게 청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비록 수중엔 100루블뿐이 없으나.

수많은 원생을 가르치는 음악가이자, 한 사람의 지성인으로 어린 아이처럼 행동 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가까워요. 선생님 뒤에 보이는 바로 저 가게입니다.”

생각보다 너무 가까운 위치에 마음이 흔들린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지성인 차이콥스키는 오늘 처음 만난 동양인 청년과 보드카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차피 내 주머니를 털어봐야 나오는 건 100루블 지폐 하나 뿐.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 좀 해보자.’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보드카와 함께 금세 따끈한 요리가 차려졌다.

상당히 허기졌던 차이콥스키는 커다란 스푼으로 허겁지겁 스튜를 목구멍으로 떠넘겼다.

“처.. 천천히 드셔도 되요. 모자라면 더 시키셔도 되니까..”

대체 얼마 만에 맛보는 제대로 된 음식인지..

지독한 가난에 서른이 넘도록 결혼도 하지 못한 그에게 식사는 언제나 손수 만든 멀건 감자수프가 전부였다.

해가 떨어지자 추위를 피하기 위해 식당을 찾은 손님들은 너나 할거 없이 보드카를 주문했고, 잠시 후 식당 안은 어느새 식사보다는 술을 즐기는 주당들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보드카를 마신 탓일까?

취기가 달아오른 차이콥스키는 오늘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이 마치 꿈만 같았다.

“이런 기분 참 오랜만이로군. 정말 술 생각이 간절했었는데 말이야..”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청년의 물음에 코가 벌게진 차이콥스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만 있었어도.. 연주회에 등록할 수 있을 텐데..”

눈치 빠른 차민준은 차이콥스키가 말하는 ‘그 아이’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 차렸다.

“혹시 지난 발표회에 피아노를 연주했던 권선이라는 아가씨 말인가요?”

“자네가 그걸 어떻게? 자네 혹시 그녀와 아는 사이인가? 지금 그 아가씨는 어디에 있나?”

권선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흥분하는 차이콥스키의 모습에 민준이는 혹시나 그녀가 차이콥스키를 찾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제가 그때 우연히 그곳에 있었거든요.”

“아, 어쩐지. 그래서 내 이름을 알고 있었군. 이제야 알겠어. 혹시 우리 음악원의 원생인가?”

“그건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그곳에 있었나?”

민준이는 차이콥스키의 물음에 당시 로비에서 관리자가 해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선생님의 신곡 리허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 발표회를 보러 와주었던 건가?”

차이콥스키는 청년의 이야기에 깊은 감동을 느꼈다.

지금까지 아무도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지 않았던 터라 그 모든 것이 보상 받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이어 현실을 깨달은 차이콥스키는 고개를 떨구었다.

“발표회까지 찾아와준 자네에겐 미안하지만 내가 만든 곡은 연주회에 오르지 못할 듯하네..”

“어째서죠?”

“그 협주곡을 연주해줄 피아니스트가 없으니까. 권선이라는 피아니스트도 그날 이 후론 보지 못했다네.”

“흐음.. 피아니스트라..”

그때 카운터 안쪽에 앉아있던 식당 주인이 탁자를 두드리며 사람들을 주목 시켰다.

그 역시 단골손님들과 술을 주고받았는지 벌개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술기운은 오르는데 음악이 없으니 심심하군. 혹시 손님들 중에 연주자 없소? 기가 막힌 연주를 들려주면 우리 가게 특제 보드카 한 병을 공짜로 주지.”

“오오~!!”

“이야~ 그럼 내가 한곡 쳐볼까?”

“아니야. 내가 칠거야!!”

주인장 손에 들려 있는 최고급 보드카 한 병에 가게안의 손님들이 너도 나도 코트를 벗어 던지자, 보다 못한 주인장이 다시 한 번 룰을 강조했다.

“내가 분명히 기가 막힌 연주라고 했어. 괜히 나와서 어설픈 연주로 분위기를 흐리면 벌금 받을 거야.”

그러자 방금 전까지 호기롭게 자리에서 일어났던 손님들은 너나 할 거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뭐야? 이 많은 손님들 중에 제대로 된 피아노 연주자 하나 없는 거요? 실망이군.”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손님들의 표정에 어쩔 수 없이 보드카 병을 도로 집어넣으려던 찰나.

한 청년이 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로 차이콥스키와 같이 식사 중이던 차민준이었다.

“제가 한 번 쳐보죠.”

그 말에 주인장은 다시 보드카를 탁자에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내가 생긴 것과는 달리 음악엔 좀 까다로운데 괜찮겠어?”

“음악에 까다로운 사람은 만족시키기 힘들던데, 그냥 아저씨 양심에 맡겨 볼게요.”

“오~ 제법 세게 나오는데?”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손가락 관절을 이리저리 비틀어 한차례 풀어낸 민준이는 피아노에 앉자마자 아무런 예고 없이 곧바로 건반을 두드렸다.

시작과 동시에 굉장히 웅장한 선율로 단번에 분위기를 앗아간 그의 피아노에 술잔을 기울이던 손님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그리고 그 순간.

민준이의 연주를 지켜보던 차이콥스키의 입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너무나도 귀에 익은 이 선율은…

“저.. 저건 내 피아노 협주곡 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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