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101화 (101/177)

[101] Ep.16 : 거장의 귀환.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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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와 함께 출연한 윤도형의 러브레터는 더 이상 드라마 속 대역이 아닌 ‘차민준’이라는 이름을 알리는데 성공적인 디딤돌이 되었다.

그 반증으로 방송이 나간 뒤 각종 프로그램에서 민준이를 출연 요청이 급격히 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송 대표는 러브레터 이 후 민준이의 모든 방송 출연을 정중히 거절하였다.

그 이유는…

“어차피 방송에 내보내봤자, 피아노 한 대 가져다 놓고 몇 곡 쳐보라고 할 거야. 이 후엔 댄스 신고식이나 하고 여성 출연자와 짝짓기 게임을 즐기겠지. 하지만 담당 PD의 입맛대로 재밌는 장면이 안 나오면 통 편집 당할 테고, 나는 그런 식으로 너의 피아노를 하찮은 곳에 소모 시키고 싶지 않아.”

아무리 듣기 좋은 음악도 여러 번 들으면 질리는 법.

그렇기에 송 대표는 잦은 TV 출연으로 민준이의 이미지가 흐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의 진정한 매력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을 때 빛을 발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네가 한국에 들어온 지도 벌써 반년이 지났구나.”

“그러게요. 드라마 대역에 연주회까지 하고 나니, 정말 시간이 훌쩍 지나간 느낌인데요?”

“다음 달 마에스트로 발터 뮐러의 내한 공연 있는 거 알고 있지?”

“물론이죠.”

클래식 내한 공연의 최대 성수기는 연말연시였다.

특히나 크리스마스 전후로 세계 유명 지휘자들의 초청 공연이 잇따랐는데, 놀랍게도 그 동안 클래식계에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던 발터 뮐러가 긴 공백을 깨고 처음으로 공연에 응한 국가는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물론 그 사정에 민준이와의 인연이 아주 배제되어 있다고 할 순 없었다.

세계적인 거장의 귀환 소식에 유럽의 클래식 매니아들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곧이어 최초 공연 국가로 한국이 지명되자, 다들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 분도 참 독특하시지. 최초 공연 장소를 굳이 한국으로 지명하다니.”

송대표의 말에 민준이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쇼팽 콩쿨에서의 화가 안 풀리신 걸 거예요.”

“역시 그런가?”

“발터 뮐러 선생님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복수 방법이죠. 예전에도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거든요. 아마 내가 다시 지휘봉을 잡는 날이 온다고 해도 절대로 유럽에서 첫 공연은 안 할 거라고..”

“하여튼 영감도 고집하고는..”

“아직도 그만큼 정정하신 거지요.”

탁자에 놓인 차를 마시며 민준이가 웃어보이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송 대표 역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선생님께서 한국에 오실 때까지 전 무얼 할까요? 이제 방송 스케쥴도 없는데..”

“그동안 바빴으니 조금 쉬는 것도 좋지. 친구들도 만나고 하고 싶은 것도 하고, 스무살이면 한창 좋을 나이 아닌가? 어차피 마에스트로가 한국에 도착하면 널 잡고 들들 볶아댈 테니까.”

“하하..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딱히 방송활동을 오래한 것도 아니지만, 일단 송 대표의 제안에 따라 모든 방송 일정을 중단한 민준이는 나쁘지 않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일단 일전에 과거에서 헤어진 권선과의 만남도 중요했으니까.

송 대표와의 대화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오자, 석혜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진아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대표님께서 뭐라셔?”

“일단 발터 뮐러 선생님의 내한 공연까지 잠시 대기.”

“그 말은 즉슨 잠시 동안은 휴식이라는 거네?”

“뭐, 그렇긴 하지?”

그 순간. 두 눈을 반짝이며 진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오랜만에 친구들이나 만날까?”

“응? 친구들?”

최근 몇 년간 인터넷이 활성화 되면서 한국에서는 잊고 지냈던 친구를 찾는 동창회 모임이 유행하고 있었다.

진아에게서 간단히 설명을 들은 민준이는 그녀의 제안에 제법 호기심이 동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아와 승우처럼 아직도 연락이 가능한 친구들이 있는 반면 자신이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연락이 끊긴 친구들도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소희 같은 경우는 민준이가 해외로 떠난 뒤, 그녀 역시 얼마 후 가족들과 해외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석교수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1994년 4학년 6반 친구들 모여라.-

역시나 행동파인 진아는 민준이의 승낙이 떨어지기 무섭게 자신이 자주 이용하는 한 동창회 커뮤니티에 빠르게 글을 남겼다.

그리고 주말인 다음 날.

연락이 닿은 몇몇 친구들과 저녁에 종로에서 모임을 가지기로 했다.

진아와 함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에 도착한 민준이는 먼저 도착해 있는 두 친구의 모습에 웃으며 외쳤다.

“송민석, 공근상!!”

“어!? 민준아!! 너 이 녀석~!!”

4학년 6반에서 사고뭉치 콤비였던 둘은 민준이를 보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왔다.

“이야~ 이게 얼마만이야? 안 그래도 지난주에 윤도형의 러브레터 보고 깜짝 놀랐었는데.”

“민석이 그때 대학 친구들이랑 술 마시다가 TV에 너 나온 거 보고 치킨 위에 맥주 뿜었데.”

그러자 진아가 민석이를 향해 혀를 차며 말했다.

“헐.. 너 천벌 받을 짓을 했구나. 감히 치느님에게..”

“누가 아니래?”

약속 장소에 가장 먼저 나온 두 사람은 4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쭈욱 함께 지내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게임을 좋아하던 그들은 지금도 같은 대학에서 게임공학과를 다닌다고 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친구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그 때.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승우가 도착했다.

이미 국가대표 축구선수로 잘 알려진 승우는 도착과 함께 주로 여자아이들에게 엄청난 환대를 받았다.

“승우야 나 사인 좀 해주라.”

“너 다음 월드컵에는 꼭 나가는 거지?”

“이번 청소년 월드컵 진짜 아쉽더라.”

동창회 장소인 고깃집은 승우의 등장과 함께 분위기가 더욱 무르익기 시작했다.

민준이 역시 드라마 봄의 왈츠와 최근 윤도형의 러브레터에 출연한 것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왔다.

“민준이 네가 강선우의 대역이었을 줄이야..”

“그러고 보면 민준이가 어릴 때 피아노 대회 나가서 상도 타고 그랬잖아.”

“맞아. 그걸로 정옥분 선생님 한방에 보내 버렸잖아.”

“아~ 정옥분 선생님. 그래. 기억난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진짜 끔찍했었지.”

“나는 오수정 선생님 담임 되고나서 정옥분에 대한 기억은 아예 지워버렸잖아.”

“오수정 선생님이 진짜 좋은 분이었는데, 학교 졸업하고 한 번도 못 찾아갔네..”

“나도.. 네가 갑자기 오 선생님 얘기하니까 보고 싶다..”

그때 민준이 옆자리에 있던 진아가 친구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선생님 곧 오실걸? 10분 전에 곧 도착한다고 문자왔었어.”

“뭐? 진짜!?”

“나랑 민준이는 아직도 선생님이랑 연락하고 있거든.”

그때 진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깃집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오 선생님!?”

“우와~ 대박. 선생님!! 진짜 오랜만…이네?”

상추쌈을 입에 문채로 벌떡 일어난 민석이는 출입구에 어색하게 서있는 한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허..방?”

“헉!! 허반! 너 왜 이제 왔어!?”

“용석이 너 진짜 오랜만이다.”

“아, 안녕..?”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희미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나타난 용석이는 예상과는 달리 자신을 엄청 반겨주는 친구들의 환대에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역시 반장이었던 나를 다들 기다려주고 있었구나….’

벅차오르는 감동에 고개를 숙인 채로 크게 숨을 들이킨 용석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친구들을 향해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 진짜 반갑…”

“애들아 선생님 왔다~”

그 순간. 마치 짜고 친 고스톱처럼 용석이에게 향하던 친구들의 발걸음이 그대로 오 선생님에게 향했다.

“오수정 선생님!!”

“아이구~ 이 녀석들. 선생님 왔다고 이렇게 다들 문 앞까지 나와 준거야?”

한편 뒤에서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본 진아는 숨이 멎을 듯 고개 숙인 채 어깨를 들썩였다.

두 팔을 펼치고 친구들에게 다가가려던 용석이는 조용히 몸을 돌려 친구들의 등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반장인 용석이와 담임이었던 오 선생님까지 모인 동창회는 모임 내내 웃음꽃이 끊이질 않았다.

담긴 맥주를 홀짝이며 가끔 가게 입구를 바라보던 민준이에게 진아가 물었다.

“누구 기다리는 사람있어?”

“응? 아니 그냥..”

“내가 한번 맞춰 볼까? 민준이 너 소희 기다리지?”

“귀신이네..”

모임이 시작되고 벌써 2시간이나 흘렀건만 소희는 결국 오지 않았다.

아직 해외에서 돌아오지 않은 것일까?

몇 해 전부터 석교수와도 연락이 끊어진 탓에 소희에 대한 소식을 찾기는 힘들었다.

혹시 인터넷의 힘을 빌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보았지만, 결국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어? 소희가 우리 동창회 게시판에 글 올렸다.”

“소희라면 그 전학생 윤소희?”

커뮤니티 사이트에 동창회 사진을 바로 올리겠다고 자신의 노트북을 인터넷에 연결한 민석이가 깜짝 놀라 외치자 모두의 이목이 집중 되었다.

-안녕? 다들 오랜만이다. 동창회 소식은 들었어. 아마 지금쯤 서울 어딘가에 모여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겠지? 나는 지금 파리에 있어. 이곳에서 음악 공부를 하고 있고, 2년 뒤에 열릴 쇼팽 국제 콩쿨을 준비 중이야. 얼마 전 친척이 한국에서 유행하는 드라마라고 봄의 왈츠를 보내줬었는데, 거기서 나온 강선우의 피아노를 듣고 혹시 민준이가 아닐까 싶었는데, 방금 전 인터넷을 찾아보니 역시 맞더라. 너무 반가웠어. 이렇게라도 소식을 알릴 수 있게 되어서 기쁘다. 함께 오케스트라를 연주했던 진아도 너무 보고 싶다. 콩쿨이 끝나고 한국에 가면 또 연락할게. 다들 즐거운 시간 보내길..-

짧은 그녀의 메시지를 읽어 내리던 민준이는 소희가 아직도 음악을 하고 있다는 소식에 빙긋 미소 지었다.

‘쇼팽 국제 콩쿨이라. 어쩌면 대회에서 소희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아직 2년이란 시간이 남아 있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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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회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

민준이는 택시 기사에게 자신의 집이 아닌 작업실 주소를 불렀다. 그러자 민준이와 같이 택시에 오른 진아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너 설마 지금 이 시간에 작업실에 가려고?”

“응. 집보다 작업실에 있는 게 더 편해.”

“어휴~ 어련하시겠어요.”

“아, 그리고 진아야.”

“응?”

“나 당분간 연습실에서 혼자 지낼게.”

사뭇 진지한 민준이의 표정을 읽은 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라고 했지만, 당장 다음 달 잡혀 있는 발터 뮐러의 내한 공연에 초대 연주자로 지목이 되어 있는 터라 마음 편히 쉴 수도 없을 것이다.

“하긴 발터 뮐러 선생님과의 공연도 준비해야 할 테니까. 그래도 조금 쉬엄쉬엄 해. 컨디션 조절도 중요하니까.”

“응. 걱정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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