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Ep.15 : 새끼 손가락.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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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새끼손가락은 다섯 개의 손가락 중에서 가장 약하지만, 악력(握力)으로 따지면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손가락이기도 하다.
호로비츠가 새끼손가락을 말아 쥐는 특정한 동작은 보인 것은 어쩌면 다른 손가락들의 힘을 더욱 가중시키기 위함이었을지도 몰랐다.
실제로 새끼손가락을 가볍게 말아 쥐어보면 다른 손가락에 자연 스럽게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힘이 들어간 대신 유연성을 비롯해 속주(速奏)가 떨어지고, 섬세한 터치가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런 와중에 호로비츠는 페달을 사용하지 않고 모든 걸 가능하게 했다는 점은 여전히 미스테리지만…)
호로비츠가 남긴 공연 비디오를 몇 번이나 돌려보며 연습을 거듭한 민준이는 비록 양손 전부는 아니었지만, 오른 손만큼은 얼추 비슷하게나마 연주가 가능해졌다.
‘넘어야할 산이 아직도 많지만….’
한편 인터넷으로 알려진 차민준의 외모 덕분일까? 객석에서 여성 관객들의 비명과도 같은 환호 소리가 장내를 뒤덮자. 윤도형이 웃으며 관객들을 진정 시켰다.
“그 분 상당한 미남이라고 하던데, 여성분들 반응이 벌써부터 장난 아닌데요?”
“사실 어릴 적에도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기는 했어요.”
안나의 대답에 대기 중이던 민준이의 고개가 푹하고 꺾였다.
‘그.. 그랬었나? 그런데 저건 대본에 없었던 것 같은데….’
“그렇군요. 저 역시 음악을 하는 사람이지만, 클래식이란 장르는 쉽게 다가가기가 어렵던데. 안나씨에게 있어 클래식이란 무언가요?”
“글쎄요. 저도 어릴 때는 클래식이 따분하기만 했어요. 자랑은 아니지만 바이올린을 비롯해 피아노와 오보에 플룻까지 많은 악기를 다뤄보았지만, 재미를 찾기 힘들었거든요.”
“이야~ 그 중에 한 가지만 배워도 대단한데, 악기를 정말 많이 다뤄 보셨군요.”
“그런 시기에 J를 만났어요. 저보다 어린 나이인데도 굉장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때 살짝 느낀 것 같아요. 아, 나는 평생 피아노에 매달려도 저 아이 만큼은 못 치겠구나. 내가 온힘을 쏟아부어도 저 아이와 똑같은 베토벤은 칠 수 없겠구나. 겉으론 웃어넘겼지만, 속으론 엄청 분했었어요.”
담담한 목소리로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객석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정말 나쁜X 였군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속이 다 후련한데요?”
“자~ 그럼 이쯤에서 어린 시절 안나양을 절망에 빠뜨린 나쁜 X의 피아노를 한번 들어볼까요? 어린 시절 소꿉친구인 두 사람의 바이올린 협주곡. 아~ 이 곡은 저도 알고 있는 곡이네요. 아주 유명한 분이었죠? 니콜로 파가니니의 파가니니 카프리스 24. 박수로 청해 듣겠습니다.”
관객의 박수와 함께 윤도형이 무대에서 내려가자 홀로 남은 안나는 천천히 자신의 바이올린을 꺼내들었다.
짙은 갈색의 바이올린이 강렬한 조명 빛에 새하얗게 반짝인 순간 그녀는 바이올린의 현을 손가락으로 몇 번 튕기며 빙긋 미소지었다.
이제까지 무대 위에서 노래만 부르던 그녀의 색다른 모습에 관중들마저 긴장한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파가니니 카프리스 24.
도입부는 안나의 바이올린 솔로로 시작하였다.
가여린 그녀의 손에 쥐어진 활이 4개의 현 위를 춤추기 시작하자, 무대 위의 적막을 찢어내듯 청량한 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 불렸던 니콜로 파가니니의 대표곡인 이 곡은 전 세계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곡이기도 하다.
녹음 방송이 있기 며칠 전.
아무렇지도 않게 파가니니의 곡을 내미는 민준이의 제안에 안나는 그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아주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너무 어려운가?”
“누, 누가 어렵데!? 할 수 있어!”
오기로 당차게 말을 내뱉긴 했지만 솔직히 아차 싶었다.
카프리스 24번은 파가니니의 전곡 중에서 가장 변주 형식이 심한 곡으로 실로 바이올린이 가진 모든 기교를 이 한곡에 전부 담아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곡이었다.
또한 습도에 민감하여 잘 끊어지는 바이올린 현은 파가니니의 연주를 버티지 못하고 자주 끊어지곤 했는데, 실제로 연주회 중에 현이 끊어지자 단 하나의 현으로 연주를 마무리 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앨범 활동을 끝내고 휴식기 동안 틈틈이 바이올린을 연습했던 안나는 결국 민준이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파가니니야? 비발디의 사계나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정도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몇 가지 실험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실험?”
“응. 내 피아노 실력에 대해..”
‘설마 민준이는 아직까지 자신의 실력을 의심 하고 있는 건가? 그만큼이나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바이올린을 연주 중인 안나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민준이를 힐끗 바라보았다.
스포트라이트가 미치지 않은 곳에서 차분히 건반 위에 손을 올리고 있는 그의 모습에 안나는 카프리스 24번의 전개부에서 민준이에게 바톤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신호에 따라 피아노 위로 환한 조명 빛이 내리며 날카롭게 울려 퍼지던 바이올린의 선율과는 대비되는 묵직한 피아노의 저음이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기 시작했다.
“와아..”
어두운 조명 아래 피아노를 치는 남자의 모습은 어쩌면 여성들의 머릿속에 박힌 짜릿한 판타지일지도 몰랐다.
마치 한 폭의 그림을 옮겨 담은 듯한 민준이의 모습에 그의 등장을 기다렸던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민준이는 그런 관중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자신의 연주에 몰두해 있었다.
‘아무튼 쇼맨쉽이 부족하다니까. 이 정도 반응이라면 객석을 향해 한 번쯤 웃어줄 만도 한데, 아무튼 못 말려….’
민준이를 바라보던 안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화음을 넣기 위해 활을 바이올린을 가져다 대었다.
그때였다.
팅..!
‘어? 방금 그건 무슨 소리지?’
화려한 피아노 연주 속에 번개같이 스쳐간 한줄기의 불협화음.
다행히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듯하지만, 같은 무대에 서 있는 안나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피아노의 선율을 온전히 받아내 자신의 바이올린과 화음을 이루던 그녀는 귓가를 스친 불협화음이 신경 쓰였다.
‘아니야. 지금은 연주에만 집중해야 해.’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내리는 카프리스 24번을 완벽히 연주하기 위해선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약 5분가량의 짧은 연주 시간이지만 손가락 마디가 끊어질 듯한 고난이도 기교를 선보여야하는 입장에서 안나는 속으로 민준이를 원망했다.
특히나 3분 30초가량에서 펼쳐야하는 왼손 피치카토 주법은 청중들에게 아름답고 신비한 매력을 어필할 수 있으나, 카프리스 24번의 백미라고도 할 수 있는 부분이기에 연주자 입장에서는 가장 부담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지금. 그 순간이 다가왔다.
‘아악! 차민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민준이의 반주가 멈추자, 고요해진 무대 위에서 안나는 코드를 잡고있던 왼 손가락을 그대로 튕기며 4개의 현을 제각각 다루기 시작했다.
“우와아…”
“대단하다. 세상에..”
오랜만에 관객들 앞에서 바이올린을 꺼내든 이상 안나는 오기로라도 파가니니를 멋지게 완주하고 싶었기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피치카토 구간을 완벽하게 소화해내자, 관객들은 경이로운 테크닉을 선보인 그녀의 실력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윽고 민준이에게 바톤을 넘긴 안나는 그를 향해 보란 듯이 활짝 입꼬리를 올렸다.
‘언제는 죽어도 못 하겠다고 하더니. 결국엔 잘 할 거면서.’
안나의 활약에 피식 웃음을 흘린 민준이는 때맞춰 보란 듯이 두 팔을 내리쳤다.
쿠웅!!
무대 위를 짓누르는 묵직한 선율에 관객들이 모두 고개를 돌린 순간.
여태까지 움츠러 있었던 민준이의 새끼손가락이 곧게 펴지며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마치 건반의 소리를 삼켜내듯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에서만 내지르는 그의 손가락은 움츠렸다 펴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순간. 민준이를 바라보던 안나의 귀에 또 다시 정체불명의 소리가 들려왔다.
팅!! 팅팅!!
비록 화려한 피아노의 선율 속에 묻혀 선명하게 들리진 않았지만, 그녀는 한 가지 특징을 찾아냈다.
‘저 새끼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달라지고 있어….’
그리고 또 하나.
‘한 번 불협화음을 낸 건반은 절대로 다시 치지 않아….’
덕분에 민준이의 카프리니 24는 점점 편곡에 가까운 연주가 되어 가고 있었다.
‘설마.. 민준이 너?’
하지만 민준이의 피아노는 그녀에게 더 이상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사람들이 눈치 채기 전 재빨리 자신의 턴을 끝내 버린 민준이의 독주에 안나는 서둘러 자신의 활을 내리 그었다.
민준이와 함께 약 7분간 선사되었던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24번.
관객들은 두 사람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일제히 앵콜을 외쳤다.
“앵콜~!! 앵콜~!!”
“다른 곡도 들려주세요~!!”
“한 곡만 더!!”
사람들의 쏟아지는 환호 사이로 다시 무대에 올라온 윤도형은 입가에 마이크를 가져다 대었다.
“이야.. 정말 지켜보는 제가 숨이 다 막힐 정도로 훌륭한 연주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줍은 미소와 함께 바이올린 내려놓은 안나의 뒤로 피아니스트 J가 천천히 걸어 나오자, 객석에서 박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안나의 옆자리에 마련된 의자에 걸터앉은 그는 마이크를 들고 관객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피아니스트 J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인 차민준이라고 합니다.”
“어? 그렇게 쉽게 이름을 밝히셔도 되나요?”
“상관없습니다. 드라마 속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사용했던 예명이라서요.”
“그럼 이제부턴 차민준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실 건가요?”
“네. 그럴 예정입니다.”
차민준의 공중파 첫 데뷔는 제법 무난한 대화로 이어졌다. 진행자인 윤도형은 두 사람의 어린 시절을 주제로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이끌어 내었고, 웃음이 잦은 안나 덕분에 녹화는 훈훈하게 진행 될 수 있었다.
“하긴 그렇죠. 다들 어릴 적에 체르니 떼려고 피아노 학원에 다니고 그랬잖아요?”
“윤도형씨도 그럼 어릴 때 피아노를 친 적이 있으세요?”
안나의 질문에 윤도형은 호탕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이죠. 제가 락을 한다고 피아노를 못 칠거라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으신가본데, 편견입니다.”
그러자 객석 쪽에서 윤도형을 부추기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어얼~~!!”
“보여 줘~ 보여 줘~”
박수와 함께 관객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자 윤도형은 마지못해 피아노 앞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아, 이거 진짜 오랜만에 치는데, 더구나 피아니스트 앞에서 연주를 하다니..”
“괜찮아~ 괜찮아~”
어느새 한마음이 되어 외치는 관객들의 목소리에 윤도형은 수줍게 웃으며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 그를 바라보던 민준이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큰일났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나 미쳐 사정을 이야기할 틈도 없이 윤도형의 부드러운 발라드 선율이 객석을 향해 울려 퍼졌다.
“오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분위기에 흠뻑 취해 연주 중이던 그의 피아노가 특정 구간에서 멍청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한껏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그야말로 와장창 깨지자, 윤도형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같은 피아노 건반을 몇 번인가 두드려 보았다.
틱틱틱틱..
“어? 이게 왜 이러지?”
당혹스러운 그의 표정에 관계자가 재빨리 무대 위로 올라와 피아노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운도형에게 귓속말을 전한 관계자는 빠른 걸음으로 무대에서 내려왔다.
“아, 여러분 안타깝게도 피아노 현 몇 개가 끊어져 제대로 된 연주를 할 수가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그 순간. 안나는 민준이와의 연주 당시 들려왔던 불협화음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것은 엄청난 속도로 건반을 끊어 쳤을 때 내부의 현이 끊어지는 소리였던 것이다.
“민준이 너?”
“미안. 조금 살살칠 걸..”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에 안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많은 분들이 안나양과 차민준씨의 앵콜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 되었네요.”
그때 안나가 여유있게 마이크를 가져다 대고 말했다.
“할 수 있어요.”
“네?”
“민준이라면 그 피아노를 칠 수 있어요.”
“민준씨. 정말 연주가 가능한가요?”
절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윤도형의 시선에 민준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갔다.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전혀 미스 터치가 느껴지지 않은 민준이의 화려한 연주 실력에 관객들의 입 점점 크게 벌어졌다.
러브레터 PD는 직접 보고도 신기한 그의 연주 실력에 아무런 편집 없이 그대로 방송에 내보냈고, 그 결과 차민준이라는 이름은 공중파를 통해 또 한번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방송을 직접 보고난 송 대표 역시 어이가 없는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중얼 거렸다.
“음악 방송에 내 보냈더니, 아주 기인열전을 펼치고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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