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Ep.15 : 새끼 손가락.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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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호로비츠.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에 그를 대체할 인물이 있을까?
동시대와 더불어 현재까지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에게도 무한한 동경의 대상이자, 전설로 추앙 받는 피아니스트를 꼽는다면 프란츠 리스트와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이 두 사람의 이름이 꼭 거론 되었다.
그중에서도 호로비츠는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의 절대적인 해석자로서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권위와 봉인을 호로비츠에게 물려줄 정도로 그의 피아노를 사랑했다.
차민준의 스승인 발터 뮐러는 호로비츠의 피아노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렸다.
‘호로비츠의 연주를 눈앞에서 직접 들은 것은 내 인생에 가장 커다란 축복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그 시절을 회상하듯 진한 행복에 젖어 있었다.
이 후 차민준은 스승에게서 몇 가지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먼저 호로비츠는 피아노의 페달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다는 점이었다.
피아노의 페달은 음의 길이를 지속시키거나, 타현을 이동 시켜 음량을 줄이거나, 필요한 음만 울리게 하고 다른 음을 지음(止音) 시켜 스타카토 주법에 쓰이곤 했는데, 이 모든 것을 오로지 건반을 누르는 손끝의 미세한 힘만으로 조율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의 새끼손가락은 건반을 누르지 않을 때는 마치 코브라처럼 굽혀져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케스트라를 압도하는 음향과 초인적인 테크닉으로 청중들을 홀렸다고 한다.
호로비츠의 스승이기도 한 스크리아빈의 서거 50주년을 기념한 연주회에서 선보인 소나타 9번 흑미사의 연주는 차라리 마법에 가까웠다는 평가에 통화 중이던 민준이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잠시 후. 발터 뮐러와의 통화를 마친 민준이는 탁자에 핸드폰을 올려두고 생각에 잠겼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1904년 출생. 사망은 1989년 11월. 20세기를 대표했던 피아니스트인 만큼 영상 자료도 제법 남아있다. 그런데 저 피아노가 호로비츠의 피아노라고 하기엔 연도가 맞지 않아. 권순철 할아버지가 노년에 접어들 때 즈음 손에 넣은 피아노라면 적어도 7~80년대에 구입한 것일 텐데, 그 때까진 호로비츠가 살아 있었잖아?’
생각을 거듭할수록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으나, 결국 이렇다 할 답을 찾지 못한 차민준은 오래된 피아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시 한 번 권선을 만나 호로비츠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 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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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J의 연주회는 당초 SHW 사무실의 기획팀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엄청난 파급효과를 불러왔다.
그것은 인터넷에 올라온 한 음악 평론가의 기사 덕분이었다.
[피아니스트 J의 정체를 밝히다.]
월간 클래식의 송대영이라는 기자는 놀랍게도 민준이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한 사건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YMCA에서 주관했던 오케스트라 대회.
당시 대회 사진까지 첨부해 올라온 기사에는 피아니스트 J의 연주에 대한 호평이 가득 담겨 있었다.
[불과 11살의 나이로 베토벤의 합창을 지휘해 낸 천재 소년이 다시 세상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마지막 한 줄까지 인터넷 기사를 모두 읽은 송 대표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세상이 좁다니까. 하필 9년 전 오케스트라 대회에 참가했던 기자가 이번 연주회에 참석할 줄이야. 거기다 발터 뮐러의 제자설까지.. 신비주의 컨셉이고 뭐고 다 날아갔네?”
송 대표의 허탈한 목소리에 석혜인이 대답했다.
“지금이라도 기사를 내려달라고 할까요?”
“아냐. 괜찮아. 어차피 언젠가 밝히려고 했었으니까. 가능하면 연말에 열리는 발터 뮐러 선생님의 내한 공연에서 발표하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군.”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던 그는 클릭 몇 번으로 피아니스트에 대한 다른 기사들도 살펴보았다.
아직까지 피아니스트 J는 베일에 싸인 존재였지만 며칠만 지나면 모든 것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인터넷 시대에서 정보를 숨기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잠시 후. 소속 연예인들의 스케줄 달력을 응시하던 그는 석혜인을 향해 탁상용 달력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차라리 여기에 내보내볼까?”
“네…? 거기는 안나양 단독 출연으로 이미 정해두긴 했는데..”
“뭐 이를 테면 안나를 위한 깜짝 게스트라는 거지. 민준이의 연주회에 안나가 출연했으니까 좋은 구실도 되고 어때?”
“확실히 나쁘지 않겠네요. 프로그램 취지에도 어느 정도 맞출 수 있고, 시청률도 좋은 편이니까요. 한번 담당 PD에게 연락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탁 좀 할게.”
송 대표의 요청에 석혜인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대표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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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오후.
권선을 만나고 난 이후. 차민준은 피아노의 페달을 일체 밟지 않고 건반의 음을 길게 이끌어 내는 연습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 힘의 미세한 강약 조절.
이론상으론 쉬워보였지만, 실제로 열 손가락의 힘을 각각 다르게 배분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지금까지 고수해왔던 연주 스타일을 완전히 바꿔야 할지도 몰랐다.
그동안 페달의 도움으로 쉽게 연주하던 소절들이 한 순간에 초고난이도 테크닉을 요구하는 살벌한 구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거 진짜 장난이 아니잖아….’
그때 작은 탁자 위에 놓인 민준이의 핸드폰에 불이 들어오더니, 제멋대로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마에 흐르는 땀도 닦을 겸 연주를 멈추자, 고요해진 작업실에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여보세요?”
“민준아. 지금 어디야?”
평소와 달리 흥분을 감추지 못한 진아의 목소리에 민준이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작업실인데 왜?”
“방금 전에 회의실에서 너의 첫 TV 출연 방송이 결정됐어.”
“TV출연? 내가?”
“응. 그것도 엄청 유명한 프로그램에”
“무슨 프로그램인데?”
“어디 게? 한 번 맞춰봐”
평소 TV를 잘 보지 않았던 민준이는 애써 머리를 굴리다 한 프로그램을 떠올렸다.
“어차피 내가 나갈 수 있는 곳은 음악에 관한 방송이겠지?”
“오~ 제법인데? 벌써 절반은 맞췄네?”
“그렇다면 혹시..”
“혹시?”
“전국 노래자랑?”
“······.”
“아니구나. 어릴 적 할머니께서 참 좋아하셨던 프로그램이었는데..”
“할머니 핑계로 넘어가려고 하지 마.”
“미안. 사실 TV를 잘 안 봐서.”
“그래. 내가 백번 이해한자. 하지만 아무리 너라도 윤도형의 러브레터는 알지?”
“윤도형의 러브레터?”
“그래. 거기 마지막 무대에 안나 언니의 깜짝 게스트로 출연할 예정이야.”
“아, 그렇구나~”
“영 반응이 떨떠름하다?”
역시 소꿉친구라서 그런지 민준이의 작은 반응에도 귀신같이 눈치 채는 진아였다.
방금 전까지 호로비츠의 피아노에 온 신경을 쓰고 있던 민준이에게 진아가 말한 방송 출연은 솔직히 별로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송 대표에게 그 동안 받은 도움을 생각하면 그가 이끄는 SHW 엔터테인먼트의 사업에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민준이는 연주회 마다 느꼈던 청중들의 박수 소리를 떠올리며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떨떠름하긴. 그래서 녹화는 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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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J의 갑작스런 출연 제의에 방송국 PD는 굉장히 기뻐했다.
윤도형의 러브레터의 방송 취지와도 잘 맞아 떨어지는 컨셉이고, 화제가 된 드라마의 피아노 대역이었던 피아니스트 J는 자신의 연주회 이후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도 오르며 한창 PD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던 차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녹화 당일.
작년에도 윤도형의 러브레터에 출연한 경험이 있는 송안나는 지금쯤 대기실에서 혼자 떨고 있을 민준이를 위해 대기실 문을 두드려보았다.
똑똑.
“들어오세요~”
안에서 들려오는 진아의 목소리에 문을 열고 들어선 안나는 생각보다 태연한 민준이의 모습에 오히려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데뷔 초기 TV에 출연한다는 생각에 청심환까지 삼키며 오들오들 떨었던 자신과 상반 되는 민준이의 모습에 살짝 심통이 올랐다.
“너 괜찮아? 안 떨려?”
안나의 질문에 음료수로 목을 축이던 민준이는 좌우로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나야 피아노 연주만하면 되는데 떨릴게 뭐가 있어.”
‘하긴 그러고 보면 어릴 적부터 민준이 한테 무대 공포증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지….’
괜히 걱정한 자기만 손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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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조명이 들어오지 않은 어두운 공간에서 민준이는 피아노 앞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 노래를 마친 안나는 진행자인 윤도형씨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안나씨의 노래 잘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희 러브레터에 오랜만에 나오셨네요. 1년 만인가요?”
“네.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저야 뭐. 항상 똑같죠. 그러는 안나씨는 최근에 숨겨둔 바이올린 실력으로 화제가 되셨던데요? 인터넷에 아주 난리 난리가~”
안나는 윤도형의 칭찬에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웃어 보였다.
지난 여름 앨범 활동을 마치고 휴식 중인 그녀가 깜짝 게스트로 피아니스트 J의 무대에 올라 보여준 수준급 바이올린 연주 덕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
“아니 정말로 그 연주회에 다녀오신 분들이 극찬을 했을 정도인데, 대체 언제부터 바이올린을 연주 하셨나요?”
“바이올린을 연주한 것은 좀 됐어요. 아주 어릴 때부터라..”
“아주 어릴 때. 그렇죠. 저희가 얻은 사진 자료에도 굉장히 어려 보이더군요.”
“네? 설마..”
“자료 화면 보여주시죠.”
순간 무대에 마련되어 있던 멀티 비젼에 오케스트라 대회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사진 자료 몇 장이 올라왔다.
“꺄아아아악~~”
관객들의 함성과 함께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이는 안나는 자신의 어릴 적 모습과 쉽게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어둠속에서 무대를 바라보던 민준이 역시 갑자기 등장한 자료화면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 이 분이시죠? 헤어스타일이 꼭 바비 인형 같네요.”
화면 안에는 당시 지휘 중이던 민준이를 올려다보며 있는 힘껏 활을 켜는 안나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여러분 이 아이 정말 귀엽지 않나요?”
“귀여워요~!!”
“이 아이가 이렇게 국민 가수로 예쁘게 자랐네요.”
윤도형은 아직도 창피함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안나의 어깨를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안나씨. 이쁘게 잘만 나왔는데요.”
“저 때는 저도 저 헤어스타일이 진짜 예쁜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지금 보니 너무 창피하네요.”
“괜찮아요. 저도 머리 길었을 때 활동했던 사진 보면 막 자살 충동 느끼고 그래요. 그런데 사진 속의 저때가 몇 살때죠?”
“초등학교 6학년이었으니까. 13살?”
“아, 여러분 여기 어린 안나양이 앉아 있는 자리가 바로 수석 바이올린 연주자가 앉는 곳이랍니다.”
“오오~~”
“여러분 아직 놀라긴 이릅니다. 왜냐하면 이 사진 안에 또 다른 비밀이 하나 숨어 있거든요. 그게 무엇이냐. 뭘 거 같아요. 여러분?”
프로그램 진행 1년차 윤도형은 능숙하게 관객들의 궁금증을 유발시키며 장난끼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 격렬한 손동작으로 오케스트라를 지휘 중인 이 아이. 어린 송안나 양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 지휘자가 바로 피아니스트 J라고 합니다. 사실인가요?”
윤도형의 질문에 안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이미 다들 아시겠지만, 엄청난 피아노 실력의 소유자이기도 하죠.”
“저도 그 부분이 참 궁금한데, 대체 피아노를 어떻게 치면 사람들이 인터넷에 이런 소감을 올리는지 정말 궁금하네요. 안나씨도 혹시 소감 글 보셨나요?”
“네. 저도 봤어요.”
“연주하는 동안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느니, 18세기 유럽에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고 하시고 이정도면 연주회가 아니라 거의 마술쇼 아닌가요?”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엉덩이를 들썩이는 윤도형에게 안나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그 친구를 불러 보았는데요.”
안나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객석에 앉아 있던 관객들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드디어 자신의 차례가 다가 왔음을 느낀 차민준은 사람들의 박수와 함께 몸을 일으키는 안나는 바라보며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이윽고 새하얀 건반 위에 내려 앉은 9개의 손가락.
민준이의 오른쪽 새끼 손가락은 건반에 닿지 않게 잔뜩 구부러져 있었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작은 독사 와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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