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Ep.15 : 새끼 손가락. (2)
“좋아. 아가씨. 그 잘난 실력 좀 내게 보여주겠소?”
“기꺼이 보여드리죠.”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릿결.
무대에 오르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비어있던 객석에 앉아 그들의 연주를 지켜보기로 했다.
차이콥스키를 도와 바닥에 흩어진 악보를 정리한 여자는 악보를 순서대로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아가씨가 보기에도 너무 난해한가?”
걱정이 잔뜩 묻어난 차이콥스키의 목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나이는 나랑 비슷한 것 같은데, 웃을 때 한쪽 오른쪽 볼에만 잡히는 보조개가 인상적인 동양인 아가씨였다.
“아뇨. 오히려 굉장히 재밌을 것 같은데요?”
그녀의 긍정적인 대답에 차이콥스키와 루빈스타인의 표정이 극명하게 갈렸다.
예기치 못한 재미난 상황에 다른 사람들의 눈빛에도 호기심이 가득 차 올랐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어릴 적 음악 시간에 친구들과 ‘차에코푼시키’ 라고 유치한 별명을 붙였던 작곡가를 이렇게 만나니 기분이 묘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작곡한 곡들은 아무리 클래식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아!! 이 노래.’라고 외칠 만큼 유명한 곡들을 많이 남겼다.
대표적으로는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와 같은 발레에 사용되는 곡들을 주로 작곡하였는데,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호두까기 인형의 초연에서 그의 음악은 관객들에게 박수를 받았으나, 발레 공연 자체는 준비가 부족해 굉장히 엉성했다고 한다.
덕분에 그의 음악은 그 진가를 인정받는데 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나?
하지만 호두까기 인형이나 백조의 호수는 모두 그가 말년에 작곡한 곡들이었는데, 지금 무대 위 차이콥스키의 나이는 기껏해야 30대 중반정도?
‘그렇다면 음악을 시작한지 아주 오래된 것은 아니란 이야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대의 나이에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작곡해 내다니. 과연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라 불릴만하다.
잠시 후. 피아노 앞에 앉은 여성이 차이콥스키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향해 지휘봉을 흔들었다.
악기 구성은 평범하지만 호른 4대와 트럼본 3대라니. 금관부에 충실한 편성이 돋보였다.
빰빰빰 빠~ 빰빰빰 빠~
빰빰빰 빠바바바밤~!!
호른과 트럼본의 웅장한 전조와 함께 피아노 앞에 앉은 여성은 곧바로 건반에 손을 올린 채 화음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긴 머리를 찰랑이며 오케스트라 화음에 녹아든 그녀의 피아노는 굉장히 아름다운 소리를 내었다.
짧은 전조가 끝나고 그녀의 독주가 시작되자, 무대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실은 루빈스타인이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을 폄하한 것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는데,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은 자칫 곡의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하면 피아노 독주가 굉장히 경박하게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목은 피아노 협주곡이지만 오케스트라 편성인 만큼 전체적인 곡의 분위기는 바이올린과 첼로가 가져가는데, 피아노 연주자의 실력이 어느 정도 수준이냐에 따라 완성도가 극명하게 갈릴 수도 있었다.
이어서 클라리넷의 우수에 젖은 화음이 피아노의 맑은 선율과 맞닿은 순간.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루빈스타인의 혹평에도 당당히 무대에 오른 만큼 그녀의 연주는 객석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굉장히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곡이야.”
“확실히 루빈스타인씨의 말대로 피아니스트가 연주하기 까다롭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곡을 놓치기엔 너무도 아쉽지 않은가?”
10분 간 연주 된 차이콥스키의 신곡 발표회에 모스크바 음악원 학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이콥스키 교수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었다.
“멋졌습니다.”
“훌륭한 곡이었습니다. 교수님.”
“교수님의 피아노 협주곡 초연이 꼭 모스크바에서 이뤄지길 바랍니다.”
이어지는 동료 교수와 학생들의 환호에 차이콥스키는 두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난해함 속에서도 곡이 가진 느낌을 잘 해석해준 이 아가씨 덕분입니다.”
차이콥스키는 친히 단상에서 내려와 피아노 앞에 앉아있던 여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맙소. 이 환호성은 모두 당신 덕분입니다.”
“아뇨. 저야 말로 감사드려요. 위대한 곡의 시작을 함께하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루빈스타인은 불쾌함이 가득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작 10분으로 전곡을 평가할 수 없지. 애초에 내가 충고한대로 수정을 거치기 않는다면 자네와 협연 할 수 없다네.”
여전히 고압적인 자세의 루빈스타인. 하지만 그가 차이콥스키를 저렇게 막 대하는 것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니콜라이 루빈스타인.
그는 차이콥스키가 교수로 있는 모스크바 음악학원의 원장이자, 당시 러시아에서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으니까.
그때 차이콥스키의 입에서 의외의 대답이 흘러 나왔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악보는 토시 하나 고치지 않을 것입니다.”
“뭐!? 이보게 차이콥스키 지금 뭐라 했는가?”
“그리고 앞으로 원장님에게 제 악보에 대한 비평은 받지 않겠습니다. 비록 앞으로 모스크바에서 제 공연을 할 수 없게 된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자신의 스승이자, 직장 상사이기도 한 루빈스타인에게 차이콥스키는 결별을 선언했다.
객석에 앉아 있던 다른 교수들은 차이콥스키의 말에 깜짝 놀라 어서 말을 취소하라고 했지만, 무대 위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네. 그 말 후회하지 말게나.”
불쾌한 감정을 잔뜩 담아 목소리를 높힌 루빈스타인은 떠나기 전 걸음을 멈춰 무대 위에 여성을 바라보았다.
“자네. 이름이 뭐지?”
그러자 그녀는 루빈스타인을 향해 살짝 무릎을 굽히며 입을 열었다.
“선이라고 합니다. 권선. 예쁜 이름이죠?”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 여자가 권선이라고!?’
루빈스타인은 그녀의 소개에 고개를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선? 특이한 이름이라 외우기 쉽군. 아무튼 기억해두지.”
자신의 모자를 눌러쓴 루빈스타인은 그녀를 향해 슬쩍 고개를 숙인 뒤, 나를 스쳐 공연장을 떠났다.
&
잠시 후.
차이콥스키와 악수를 청한 뒤 공연장을 나서는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온 나는 2월의 칼바람이 불어오는 모스크바 거리에서 그녀의 뒤를 쫓았다.
두터운 옷을 입고 거리를 걷고 있는 그녀에 비해 나는 엷은 슈트 차림이었기에 진짜 입이 딱딱 떨려올 정도로 바람은 차가웠다.
대로에는 마차와 자동차가 함께 다녔는데, 증기를 이용한 차량보다는 차라리 마차가 더 빨랐던 시대였기에 거리에는 마차가 훨씬 많이 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가는 동안 나는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권순철 할아버지의 손녀를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그때였다.
갑자기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본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설마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한 건가?
당황한 마음에 발을 달리며 그녀를 불러 세웠다.
“저기요! 잠시만요!!”
다행히 내 목소리를 들었던 걸까?
아니면 오랜만에 듣는 모국어에 놀랐던 걸까..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던 그때..
대로를 걷고 있던 마차 한대가 빙판에 미끄러지며 중심을 잃었다.
하필 내가 불러 세운 탓에 뒤돌아 있던 그녀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마차를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 뒤에.. 뒤에 조심해요!!”
“네?”
그녀 역시 등 뒤에서 엄습해 오는 그림자에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있는 힘껏 몸을 던져 그녀를 감싸 안았다. 동시에 등 뒤에서 묵직한 통증이 번개처럼 스친 그 순간 마차가 나뒹구는 소리가 내 귀에 폭음처럼 들여왔다.
콰앙!! 우당탕!!
히이이이이잉!!
쓰러진 말이 울부짓는 소리.
“헉!! 마차가 쓰러졌다!!”
“여기 좀 도와줘!! 사람이 깔렸어!!”
“빨리 빨리!!”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가 한 대 뒤섞이는 와중에 나는 눈앞이 부옇게 흐려지는 걸 느꼈다.
“저기요.. 이 봐요. 정신 차려요. 이 봐요. 나 좀 봐요…..”
* * *
“뭐? 민준이가 사라져?”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송 대표의 목소리에 진아는 걱정이 잔뜩 묻어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어제 공연 마치고 나서부터 전화도 안 받고, 혹시나 작업실에 와봤는데 여기에도 없어요. 어쩌죠. 대표님?”
“침착해라. 그 녀석도 다 큰 어른인데, 어딘가에서 잠시 머리 좀 식히고 있나보지.”
“죄송해요. 대표님.”
“일단 인터뷰 요청은 나중으로 미뤄둘 테니, 조금만 기다려 보자.”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과 통화를 마친 진아는 핸드폰 폴더를 접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차민준.. 전화도 안 받고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주인 없는 작업실에는 민준이의 오래된 피아노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혹시나 조금 있으면 민준이가 작업실에 오지 않을까 기다리기로 한 진아는 자신의 노트북을 펼쳐들고 탁자에 앉았다.
한 포털 사이트에서 민준이의 어제 공연을 검색하던 그녀는 호평 일색인 사람들의 댓글에 한결 기분이 나아지는 걸 느꼈다.
공연이 끝나고 개설된 팬 카페에는 벌써 천명이 넘게 가입되어 있었다.
[아니, 대체 어떤 공연이었길래 호평 일색인가요?]
[아, 티켓 팔지 말고 그냥 내가 갈걸. 이제 와서 후회됨..]
[어제 친구 따라 공연 본 뒤에 바로 팬 카페에 가입합니다. 너무 감동적인 연주였어요.]
[송안나가 특별 게스트로 출연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아악!! 꼭 갔었어야했는데~!!]
[피아니스트 J 혹시 지난 5월에 신촌에서 길거리 연주한 분 아닌가요? 혹시나 했는데 공연에서 터키행진곡 듣고 생각났어요. 관리자분 대답 좀 해주세요~]
[티켓 10만원에 양도 받았는데, 정말 한 푼도 아깝지 않은 공연이었습니다. 티켓 판매자님 감사드려요.]
[마지막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들었습니다.]
[뭔가 깜빡 깜빡 정신을 놓게 만들 정도로 훌륭한 연주였어요.]
[위에 분 혹시 공연 중에 졸으셨나요?]
[바로 위에 분이야 말로 공연 안 가보셨나 보네요. 저는 저 분 말에 100% 동감합니다.]
[뭐지? 상당히 저분과 비슷한 소감이 많네요. 대부분 공연 중에 필름이 끊긴 것처럼 꿈꾼 느낌이 들었다는 소감이 많습니다.]
댓글 하나하나마다 웃음이 새어나올 정도로 호평이 이어지고 있었다.
오전에는 민준이의 정식 앨범 출시에 대해 문의가 쇄도하여 전화가 끊이질 않았다는데..
정작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민준이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이제부터 점점 바빠질 시기인데, 대체 어디로 간 거니. 바보야..”
지난 며칠간 공연을 준비하느라 피곤했던 진아는 노트북을 덮고 책상에 엎드렸다.
창문 틈 사이로 불어보는 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자, 책상에 엎드려 있던 그녀는 색색거리는 숨을 내쉬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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