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95화 (95/177)

[95] Ep.14 : 오래된 피아노. (4)

&

“나보고 지휘를 해달라고?”

뜬금없이 학교로 찾아온 민준이의 입에서 오케스트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석 교수는 민준이가 오랜만에 지휘봉을 잡고 싶어 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민준이의 요청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 말은 지금 우리 학교 학생들과 협주곡을 하자는 말이냐?”

“네. 혹시 도움을 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 글쎄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봄의 왈츠가 제법 화제가 되었으니, 우리 쪽에서야 나쁘지 않은 제의다만..”

문제는 퀄리티였다.

민준이의 어린 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석 교수 입장에선 그의 제안이 부담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기사 고작 11살의 나이로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훌륭히 지휘한 경력과 더불어 발터 뮐러의 밑에서 더욱 실력을 키웠을 녀석에게 아마추어인 학생들의 연주가 오히려 연주회를 망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민준이는 석교수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괜찮아요. 학생들 실력에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대신..”

“대신…?”

“되도록이면 학생 수를 많이 모아 주세요.”

민준이의 마지막 제안 덕분에 현재 무대 위에는 학생들 수만 해도 약 80명에 달하는 대형 오케스트라가 구성되었다.

인터미션 동안 잠시 머리를 식히고 돌아온 사람들은 어느새 무대를 가득 메우고 있는 연주자들의 모습에 깜짝 놀라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나갔다 온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설마 오케스트라 연주까지 하는 건가?”

“2부 연주에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이 있길래 혹시나 했었는데, 진짜였네.”

“와아.. 대박이다. 이게 공짜 연주회라니..”

“비록 거금 들여 인터넷에서 티켓을 양도 받았지만, 이 정도면 진짜 돈이 안 아깝다.”

2부를 시작하는 예비종이 울리고 관객들은 다시 기대에 찬 눈으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가장 마지막으로 무대에 오른 민준이는 지휘자용 단상에 석 교수에게 허리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교수님.”

“나야 말로 고맙구나. 개인적인 욕심이었지만 꼭 한번 듣고 싶었거든. 네가 직접 연주하는 차이콥스키..”

“최선을 다해 볼게요.”

관객들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를 올린 민준이와 석교수는 각각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준비에 임했다.

민준이가 피아노 앞에 앉은 것까지 확인한 석 교수가 학생들을 향해 지휘봉 끝을 세우자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학생들은 떨리는 손으로 악기를 들어올렸다.

‘녀석들 실전이라고 많이 긴장했구나.’

80명의 학생들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는 현악 파트만 해도 50명에 달했기에 그들이 일제히 활을 드는 모습만으로도 제법 웅장함이 느껴졌다.

J음대 안에서도 석교수가 직접 고른 우수한 학생들이었기에 석 교수는 진심으로 제자들의 실력을 믿고 있었다.

오히려 지금 가장 불안한 것은 이 많은 학생들과 민준이의 피아노를 동시에 컨트롤 해야하는 자신의 실력이었다.

‘그래. 이 끝에 무엇이 있든 간에 한번 가보자.’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그가 두 팔을 힘차게 내리치자, 트럼본을 메인으로 둔 관악기들이 일제히 웅장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제1번. 1악장

빰빰빰빠~

빰빰빰빠~

빰빰빰빠바 바바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떠올리듯 비장하게 울려 퍼지는 전조는 거짓말처럼 다음 소절 도입부로 넘어가면서 곧바로 환희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 시간은 고작 12초.

50개의 현악기들이 일제히 쏟아내는 선율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피아노를 연주하는 민준이의 입가에 어느새 미소가 피어올랐다.

‘바로 이거야.’

사실 민준이는 지금까지 오래된 피아노의 건반에 자신이 가진 최고의 힘을 실어본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에야 건반을 누르는 힘 자체도 부족했지만, 행여 피아노 소리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을까 조심해야했고, 며칠 전 피아노를 작업실에 들여 놓았을 때는 마음먹고 한번 쳐봤다가 베란다에 설치된 샷시에 금이 가버렸다. 아마 조금만 더 쳤더라면 유리가 통 째로 깨져 버렸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이 챔버 홀에는 그 어떤 방해 요소도 없었다.

좌우로 상체를 움직여 고음과 저음을 옮겨 다니는 민준이는 팔 전체를 튕기듯이 건반을 내리누르며 분위기를 고조 시켰다.

그 순간 지휘 중인 석 교수는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80개에 달하는 악기들이 일제히 내는 소리를 겨우 피아노 한대가 집어 삼키다니.’

너무 많은 악기를 사용하면 되려 피아노 소리가 묻힐 수 있다는 자신의 충고에도 그저 담담하게 웃어 넘기던 민준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은 초반 1분 동안 피아노를 비롯한 모든 악기를 일제히 전개시키기에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박력은 실로 엄청난 수준이었다.

이윽고 잠시 후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멈추고 피아니스트 J의 솔로 부분에 들어서자, 그의 손가락은 빠르게 건반을 오가며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기 시작했다.

연주를 시작한지 겨우 1분.

석교수의 뺨에는 어느새 맑은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 피아노 대체 뭐야? 어떻게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는 거지?’

한편 초반 분위기에 압도당한 관객들은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민준이의 피아노에 빨려들어 가고 있었다.

사전에 미리 녹음을 시켜둔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예리하게 울려 퍼지는 피아노 선율에 월간 클래식 송대영은 마른침을 삼키며 의자에 바싹 몸을 기대었다.

‘또 시작이야….’

마치 놀이기구를 타고 있는 것처럼 등골을 타고 흐르는 소름이 상하운동을 반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리 계단 위에 옥구슬 하나를 튕긴 것처럼 고음부터 저음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쓸려 내려가는 화려한 기교를 선보인 민준이의 연주에 석교수는 질수 없다는 듯이 두 팔을 넓게 벌려 크게 호를 그렸다.

그러자 J음대의 오케스트라는 석 교수의 지휘에 따라 일제히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소리라는 것을 파도에 비유한다면 지금 오케스트라의 합주는 거대한 해일과도 같았다.

하지만 민준이의 피아노는 그 해일 반으로 갈라내듯이 번개처럼 깔끔하게 관통해 버렸다.

‘거짓말. 이 화음에도 따라 올 수 있다고!?’

석 교수가 깜짝 놀란 만큼 연주 중이던 학생들 역시 피아니스트의 엄청난 실력에 기가 찰 노릇이었다.

‘우와.. 저거 정말 사람 맞아?’

‘말도 안 돼.’

‘손끝이 다 떨려와서 제대로 코드를 못잡겠어….’

하지만 놀라긴 아직 일렀다.

1악장 5분대 구간에서 보여주는 피아니스트의 솔로는 건반을 가지고 논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의 연주에 집중하는 피아니스트와 석 교수의 지휘봉을 믿고 힘차게 악기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의 모습은 치열함 속에서 조화를 찾아 가고 있었다.

&

누군가가 말했다.

지구상에 피아노라는 악기가 사라진다하여도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유명세는 사그러들지 않을 것이라고..

그리고 또 누군가는 말했다.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마치 화음의 폭포를 연상케 한다고..

장대한 오케스트라의 화음 속에 고고히 빛나는 피아노의 선율은 이윽고 관객의 마음마저 관통시켜 버렸다.

피아니스트 J의 피아노 협주곡 속에서 어떤 이는 아득히 먼 과거를 다녀왔고..

어떤 이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았다.

누군가는 천국을 다녀왔다고 했고, 누군가는 용광로처럼 타오르는 불꽃을 느꼈다고도 했다.

약 1시간에 달라는 피아노 협주곡이 끝났을 때..

아무도 무대 위의 연주자들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았다.

단지 연주자들의 거친 숨소리만이 들려왔을 뿐..

챔버홀의 출입문을 지키던 예술의 전당 관리자는 당연히 들려올 줄만 알았던 관객들의 함성이 들려오지 않고 쥐죽은 듯한 고요가 찾아오자, 궁금함을 참지 못해 출입문을 열어 보았다.   실내 안에서 느껴지는 후끈한 열기에 한 발짝 물러난 그가 용기를 내어 육중한 문을 활짝 열어 젖힌 그 순간. 한줄기의 차가운 바람이 챔버 홀을 휘저으며 사람들을 깨웠다.

짝..

짝짝짝..

짝짝짝짝짝…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듯 관객들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박수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 관객들은 환상에서 깨어나 비명 같은 환호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

“이런 게 클래식이었나..”

“한 시간 동안 꿈을 꾼 것만 같아..”

“대체 이게..”

아직도 환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은 공연이 끝났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지 하지 못해 어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던 송 대영은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대체 이 공연의 리뷰를 어떻게 써야할까…?”

그러자 옆에 앉은 후배 역시 그 말에 동의하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오케스트라 무대가 끝나고 석 교수와 민준이는 목이 탔는지 2리터짜리 생수병을 벌컥벌컥 삼켰다.

거의 한통을 다 비우고 나서야 석교수는 조금 진정이 되는지 아직도 물을 삼키고 있는 민준이를 꾸짖었다.

“이 녀석아. 적당히 좀 하지 그랬냐.”

“교수님께서 자꾸 도발하시니까 그랬죠.”

“그렇다고 80명 오케스트라 단원들한테 정통으로 시비 거는 연주자가 어딨어?”

“이기지 못하면 최소한 비기기라도 하려고요.”

“내가 졌다. 졌어..”

1시간동안 지휘를 하느라 땀에 흠뻑 젖은 석교수는 두 팔이 떨어져 나갈 지경이었다.

아마 또 다른 연주자 대기실에 있는 자신의 제자들도 비슷한 지경일 거란 생각이 들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때 전부 비워낸 생수통을 구기며 민준이가 석교수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하고 많은 곡들 중에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이었나요?”

그랬다.

공연 마지막 피아노 협주곡의 선곡은 민준이가 아닌 석 교수의 부탁이었던 것이다.

민준이의 물음에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 내리던 그는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그건 말이지..”

“네.”

“내가 교수가 되기 전 피아니스트로서 이름을 알리던 어느 날. 노년의 신사가 어린 손녀를 데리고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단다. 이름이 권..선 이랬나?”

순간 민준이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석교수에게 되물었다.

“권선이라고요..?”

&

피아니스트 J의 공연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차에 오른 부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예술의 전당을 빠져나간 차가 사거리 신호등에 멈추었을 때. 조수석에 앉아 있던 부인이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참 오랜만이네요. 우리 선이가 참 좋아했던 곡인데..”

“······.”

“차민준이라고 한데요. 오늘 무대 위에서 아버님의 피아노를 쳤던 그 남자..”

“잘.. 치더군..”

“당신.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병원에서 했던 말 생각나요?”

“물론이지.”

“요새 들어 저는 그 아버님의 말이 사실이었으면 하고 생각해요. 누군가가 우리 선이 나쁜 마음먹고 데려간 게 아니라. 아버님 말대로 피아노 속으로 사라진 거라고..”

“······.”

“난 우리 딸이 그렇게라도 건강히 살아만 있어 준다면 소원이 없겠어요..”

고개 숙인 채 눈물을 흘리는 아내의 어깨를 토닥이던 남편은 녹색 신호등 불빛에 천천히 엑셀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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