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92화 (92/177)

[92] Ep.14 : 오래된 피아노. (1)

피아니스트 J의 데뷔.

민준이를 한국에 데려올 때부터 송 대표가 원했던 밑그림이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냈다.

드라마를 통해 자연스럽게 대중들 속으로 녹아든 민준이의 피아노는 그의 데뷔 무대를 통해 더욱 큰 화제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 증거로 발매된 OST 안에 담아 두었던 민준이의 공연 티켓은 어제부로 모두 등록이 완료되었으니까.

티켓 머니를 받는 대신.

강선우의 피아노를 진심으로 좋아했던 사람들을 위해 랜덤으로 티켓을 뿌리는 것을 택한 석혜인의 마케팅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인터넷 최고 금액으로 장당 100만원 까지 올라간 공연 티켓은 사기를 방지하기 위해 홈페이지를 통해 시리얼 넘버가 모두 등록되었음을 알렸다.

혹여 별도로 정식 공연 티켓을 판매 하지 않을까 고객들의 문의가 쏟아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준이의 공연은 9월의 마지막 날.

단 하루로 정해졌다.

그리고 자신의 공연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민준이는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작은 동네를 헤매고 있었다.

북가좌동 157-3번지.

대로의 부동산에서 대략적인 위치를 알아본 민준이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걸어 골목을 굽이 돌았다.

지금 민준이가 찾아가는 곳은 일전에 박찬수 선생님의 도움으로 손에 얻은 수위 권순철 할아버지의 집 주소였다.

지난 5월. 촬영장을 오가던 중 쪽지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현재 사용되지 않는 전화번호라는 안내 음성을 듣고 씁쓸히 통화를 종료한 적이 있었다.

촬영 도중 민향숙 작가가 강선우의 캐릭터를 부각시키며 촬영 일정이 긴박하게 돌아감에 따라 할아버지의 집을 직접 찾아가는 것은 나중으로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가 엄청 많네. 어디가 어딘지도 잘 모르겠다.”

부동산 직원에게 들었던 설명을 떠올리며 아파트 단지 외각을 따라 걷자, 잠시 후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재개발이 멈춘 오래된 주택 단지가 나왔다.

열 발자국 단위로 심어진 전봇대 위에는 복잡하게 뻗어 나간 전기 줄이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이쪽인가?”

근처의 대문 앞에 쓰여진 번지수를 확인한 민준이는 다시 한 번 쪽지를 살피며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90년 대 중반만 하더라도 좁은 골목을 뛰어 노는 아이들로 가득했지만, 2003년인 지금 민준이가 어릴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진아에게 듣기로는 최근 아이들은 PC 방을 자주 이용하기에 예전처럼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은 드물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골목 안까지 제법 깊숙이 들어온 민준이는 이윽고 쪽지에 적혀진 주소를 찾을 수 있었다.

“157-3번지.. 여기다.”

2~3층짜리 빌라가 가득 들어선 골목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이 집은 다른 집들과는 달리 작은 마당을 가진 단층집이었다.

까치 발을 들고 담벼락 안쪽을 살쳐보았지만, 딱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후우..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권순철 할아버지에 대해 물어 볼까?’

오래된 초인종의 버튼을 누르자, 베토벤 선생님의 엘리제를 위하여가 단조로운 전자음으로 울려 퍼졌다.

그때 대문 안쪽에서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실례합니다만 이곳에 살았던 권 순철 할아버지를 찾아왔는데, 혹시 알고 계신가요?”

“권 순철이면 저희 시아버님이신데, 어떻게 알고 오셨는지?”

‘헉.. 아직도 여기 살고 계셨구나!!’

민준이는 벅차오르는 마음에 차마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 순간 푸른 대문이 딸칵 열리며 분홍색 앞치마를 두른 아주머니 한분이 걸어 나오셨다.

왠지 어두워 보이는 아주머니의 표정에 살짝 긴장한 민준이는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아, 그게.. 제가 어릴 때 학교에서 권순철 할아버지를 뵌 적이 있어서요.”

“저희 아버님을? 그럼 혹시 연서 국민학교 학생이었나요?”

“네. 맞아요. 차민준이라고합니다.”

민준이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자, 아주머니 민준이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중얼대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민준이에게 재차 물었다.

“그런데, 저희 집에는 무슨 일로?”

“혹시 할아버지 안에 계시나요? 인사드릴 겸 찾아왔는데..”

그러자 아주머니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되려 민준이에게 물었다.

“저희 아버님 꽤 오래전에 돌아가셨는데, 모르셨어요?”

“네…?”

“지병으로 2년 정도 병원에 머물다 95년도 봄에 돌아가셨는데..”

그 순간 민준이는 커다란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95년도 봄이면 민준이가 발터 뮐러를 따라 오스트리아로 떠난 직후 였으니까.

하지만 그 것보다 더욱 소름 돋는 사실은 95년 이전부터 병원에 머물렀다는 아주머니의 말이었다.

94년 할아버지와 처음 만났을 때. 친구들과 가가멜이라 부르며 무서운 아저씨라고 피해 다니곤 했었는데, 그런 그가 병원에 있었다니..

“쯧쯧.. 모르셨구나. 하긴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니. 그럴 수 있죠..”

“저기 제가 학교에서 할아버지를 만난 게 1994년인데, 그 당시 병원에 계셨다구요?”

“네? 94년에요? 그럴리가요. 저희 아버님은 91년도 말에 일을 그만 두셨는데.”

거기까지 말을 꺼낸 아주머니의 표정은 방금 전보다 더욱 어두워졌다.

앞치마를 움켜쥔 채 잠시 민준이를 올려다보던 아주머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저희 아버님을 만난 년도를 착각한 모양인데, 잠시 안으로 들어오시겠어요? 차라도 한잔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잠시 후. 아주머니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온 민준이는 그녀의 권유로 거실에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차가운 음료수 한잔을 쟁반에 담아온 아주머니는 탁자에 컵을 올려두며 입을 열었다.

“사실 제 딸도 그 학교에 다녔었으니까. 확실히 기억하고 있어요.”

“아주머니의 따님도요?”

“만약에 아무 일 없이 쭈욱 컸다면 그쪽이랑 비슷한 나이였겠네요.”

“따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조차 거의 없겠지만, 그 당시 연서 국민학교에서 한 아이의 실종사건이 있었어요. 방과 후 피아노 연습 중에 돌연 사라져서…”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아주머니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득 고여 있었다.

사라진 아이..

어릴 때 학교에서도 쉬쉬하는 바람에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아이들에게선 일종의 괴담처럼 떠돌던 이야기였다.

“저도 그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어요. 제가 갓 입학하고나서 벌어진 일이라 자세히는 모르지만, 당시 여학생 하나가 연습 중에 사라졌다고…”

“역시 우리 선이랑 비슷한 나이였구나..”

거기까지 말한 아주머니는 앞치마에 얼굴을 포갠 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아주머니의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랐던 민준이는 착잡한 심정에 고개를 돌려 다른 곳에 시선을 두었다.

요즘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낡은 TV와 오래된 벽시계.

기묘한 형태의 소품들이 잔뜩 놓여진 장식장에는 할아버지 한분과 그의 손녀로 보이는 사진이 작은 액자에 담겨 있었다.

‘내가 알고 있던 할아버지다. 그렇다면 저 옆에 아이는?’

가만히 액자를 바라보는 민준이에게 어느 정도 마을을 가라앉힌 아주머니가 말을 건네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시아버님께서 젊었을 때 피아니스트로서 제법 이름을 알렸다고 해요. 덕분에 해외에 자주 다니셨는데, 한 번씩 해외에 다녀오시면 여기저기서 독특한 물건을 들여오시곤 했어요. 심지어는 피아노까지 큰돈을 들여 가져오셨었는데..”

“피아노를요?”

“굉장히 유명한 작곡가의 피아노라는데, 손녀를 위해 해외에서 직접 들여오셨죠. 굉장히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인데..”

그 순간. 민준이는 구교사에 있던 오래된 피아노를 떠올렸다.

“혹시 그 피아노를 저희 학교에 기증했었나요?”

“어머.. 학생도 그 피아노를 알아요?”

“네. 잘 알고 있어요. 당시 할아버지께서 제가 그 피아노를 칠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었거든요.”

“저희 아버님이 학생한테?”

“네. 그런데 며칠 전 학교에 가보니 학교가 전부 리모델링되어서 피아노도 사라진 것 같던데..”

“실은 당시 학교에 기증했었지만,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뒤. 학교에 부탁해서 다시 가져왔어요. 어차피 사용하고 있지도 않고, 딸이 좋아했던 피아노라..”

“그럼 그 피아노가 여기에 있다는 말씀이세요?”

“저기 안쪽 방에..”

아주머니께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은 거대한 피아노를 들이기 위해서 인지 양쪽으로 열리는 문으로 개조 되어 있었다. 잠시 그곳을 바라보던 민준이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 시키며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한번 들어가 봐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오랫동안 사용을 안 해서 소리가 제대로 날지 모르겠지만…”

“그럼 잠시만..”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민준이는 아주머니께서 알려준 방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마룻 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 탓일까?

아니면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피아노와의 재회 때문일까?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기묘한 느낌 속에 한쪽 문고리를 잡고 돌리자, 살짝 벌어진 문틈으로 검은색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아…”

조그만 창가를 통해 들어오는 오후 햇살 사이로 오래된 피아노는 그 모습 그대로 민준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항상 비스듬히 세워져 있던 그랜드 피아노의 덮개는 덮어져 있었지만, 분명히 어린 시절 그가 사용했던 피아노가 맞았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연인을 대하듯 부드럽게 피아노를 쓰다듬는 민준이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아주머니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살며시 문을 닫아 주었다.

“할아버지. 오랜만이에요..”

한참동안 피아노를 쓰다듬던 민준이가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새하얀 건반 위에 손가락을 대고 가볍게 누르자, 틱틱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처음 피아노를 만졌던 그날처럼..

그때였다.

“그 피아노는 건반이 무거워 너 같은 아이가 다루긴 힘이 들 텐데?”

“······.”

“키가 많이 컸구나..”

뒷짐을 진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친 민준이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학교에서 기다린다고 하셨잖아요.”

“허허.. 설마 내 며느리가 피아노를 도로 가져갈 줄은 몰랐지.”

&

“피아노를 새로 샀다고?”

“응.”

작업실에 피아노를 새로 들였다는 민준이의 말에 진아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아니, 회사에서 마련해준 새 피아노를 내버려두고 그것도 중고 피아노를 구입하다니…

“작업실에 그 피아노는 어쩌고?”

“사실 그 피아노도 나쁘지 않은데, 두 대나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으니, 도로 가져가 달라고 해야 하나…?”

잠시 후. 민준이의 작업실에 도착한 진아는 작업실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은 오래된 피아노의 모습에 기가 차는지 헛웃음을 삼켰다.

“이거 소리는 잘 나는 거야?”

“물론이지.”

“됐고, 대체 얼마에 산거야?”

“음.. 실은 그냥 나에게 주겠다고 하셨는데, 그럴 순 없어서 천 만원 드렸어..”

“처.. 천만원!?”

“그리고 내 몫으로 할당된 공연 티켓이랑. 공연 꼭 보러 오신다고 하시더라.”

“아고.. 머리야. 대표님이랑 혜인이 언니한테 뭐라고 설명해야하지…”

“아, 저기 어차피 설명하는 김에 하나만 더 부탁할게 있는데..”

“뭔데? 불안하지만 일단 들어줄게.”

“내 공연 때 사용할 피아노. 이걸로 연주하고 싶은데..”

“이걸 또 연주회에 가져가자고?”

“응. 꼭 이걸로 연주하고 싶어.”

“그곳에 훨씬 더 훌륭한 피아노를 준비할건데. 꼭 이걸 써야겠니..?”

그러나 민준이는 진아의 만류에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좋아. 그럼 피아노에 이상이 없는지 내가 한번 확인해 봐야하니까. 한곡 쳐 봐.”

소파에 몸을 기댄 진아는 마치 송 대표처럼 팔짱을 낀 채로 민준이를 재촉했다.

“어서 쳐보라니깐?”

“으음.. 알았어. 대신 하나만 약속해줘.”

“뭘…?”

“지금부터 어떤 일이 벌어져도 놀라지마.”

“얘가 피아노 한 곡 치면서, 무슨 그런 겁을 주고 그래?”

그때 피아노 앞에 앉은 민준이가 손가락 관절을 풀며 천천히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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