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90화 (90/177)

[90] Ep.13 : 얼굴 없는 음악가. (7)

&

-봄의 왈츠의 마지막 무대에 시청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다음 날.

홈페이지에 올라온 팝업 메시지 하나는 네티즌에게서 엄청난 반응을 이끌어 냈다.

방송국 공개홀을 통째로 빌려 대미를 장식하게 된 봄의 왈츠는 이색적인 엔딩 방식으로 인터넷을 비롯해 각종 언론에서 뜨거운 주목을 받게 되었다.

소식이 발표 되자마자 연예계 기자들은 퇴원 수속을 밟고 나온 민향숙 작가에게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작가님. 봄의 왈츠 마지막 회에 대해 시청자들의 반응이 무척이나 뜨거운데요. 이런 독특한 엔딩을 처음부터 염두하고 계셨던 겁니까?”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수줍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내젓는 민향숙 작가의 대답에 곧바로 다음 질문이 날아왔다.

“그렇다면 혹시 이러한 전개를 선택하신 계기가 있으신가요?”

“특별한 계기는 없습니다. 단지 주인공 한준일과 라이벌인 강선우. 두 캐릭터 중 하나를 선택하기가 저에게는 너무나 힘든 결정이었습니다. 단지 주인공의 라이벌이라는 이유로 강선우라는 캐릭터를 내치고 싶지 않았거든요. 따라서 시청자 여러분들께서 직접 그들의 연주를 듣고 결정해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씀은 주인공인 한준일이 우승하는 게 아니라 마지막에 강선우가 역전할 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그것은 직접 시청자 여러분께서 판단해 주실 겁니다.”

“이번 작품이 끝나고 따로 생각해두신 차기작이 있으신가요?”

“아뇨. 일단은 한동안 머리를 비우고 쉬고 싶네요.”

어느 정도 기자들의 질문에 답을 했다 생각한 민향숙 작가는 자신을 부축 중인 어시스턴트에게 사인을 보내었다.

“이제 질문은 그만해주세요. 작가님 병원에서도 대본 작업하시느라 매우 피곤하신 상태입니다. 안정이 필요해서요. 그럼 이만..”

“작가님!? 작가님. 조금만 더 인터뷰에 응해주세요~!!”

하지만 민향숙 작가는 기자들의 질문을 뒤로하고 차에 올라 곧바로 자택으로 떠나버렸다.

안타까운 마음에 차를 두들기던 기자들은 이내 병원을 빠져나가는 차량의 뒤꽁무니만 허망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바로 자택으로 모실까요?”

어시스턴트의 질문에 민향숙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회에 대한 사람들 반응은 어때?”

“오전에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 받자마자 지금 난리도 아니에요. 500명 초대에 신청자 수만 만명이 넘었다고 하던데요?”

“나쁘지 않네..”

“그런데 작가님 진짜 대단 하세요..”

“뭐가?”

“어떻게 병원에서 이런 독특한 엔딩을 생각하신거세요? 작업실에선 아무 말씀도 없으시고..”

“그게 바로 센스라는 거야. 그 사람이 가진 재능. 알겠어?”

김PD를 통해 그녀가 제시한 기획이 통과되자마자, 기발한 아이디어에 방송 국장에게서 직접 연락이 온 만큼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공개홀 역시 마지막 회를 위해 사전부터 대여해둔 상태였기에 딱히 큰 걸림돌은 없었다.

강선우의 캐릭터 성을 부각 시킬 때부터 내내 고민해오던 엔딩이 설마 자신이 아닌 송 대표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줄이야..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송 대표라면 어디 가서 자신과 한 이야기를 떠들고 다닐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굳이 스스로 입 밖에 꺼내어 명성을 깎아 먹을 필요는 없다.

‘그래. 나도 원래는 이런 식의 결말을 생각해두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눈을 감았다.

&

[봄의 왈츠. 마지막 연주회 초대권에 당첨됐어요~!!]

[아~ 진짜 부럽다. 나도 꼭 가고 싶었는데…]

[오늘 밤 7시 M방송국 공개홀에서 녹화한다던데.]

[그럼 결말 부분 누가 이기는지 스포일러 당하는 거 아닌가요?]

[방송국에 들어갈 때 촬영 장비 일체 못 가져 들어가고 인터넷에 유포 금지 서약서까지 써야한다고 하던데요? 만약 인터넷에 유포 될 경우 IP 추적해서 법적 책임 묻는다고..]

[허얼~ 그래도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서약서 100개라도 써줄 수 있는데..]

[한준일이랑 강선우의 피아노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니. 너무 설레이네요.]

인터넷으로 공개신청을 받고 나서 5일 뒤.

드디어 인기 드라마 봄의 왈츠의 마지막 촬영일이 다가왔다.

방송국 공개홀의 무대 위에는 피아노와 함께 배우의 얼굴을 원적에서 촬영하기 위한 초소형 카메라까지 모든 설치가 완료 되었다.

송 현우의 제안에 따라 피아노는 객석에서 배우들의 손이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45도 각도로 틀어져 있었고, 민준이를 비롯한 연주자는 무대에 내려진 커튼 뒤에서 연주를 하기로 했다.

두 캐릭터의 피아노 연주를 처음부터 끝까지 통째로 담아내기에 연주에 할애한 시간만 해도 약 30분. 물론 녹화가 끝나고 나서는 직접 공개홀에 찾아온 시청자들을 위해 특별 연주회를 30분 더 진행할 예정이었다.

“꼭 무슨 콩쿨 회장에 온 것 같네.”

민준이는 핏이 꼭 들어맞는 슈트를 걸치며 진아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런데 굳이 나까지 이런 차림으로 연주해야 돼? 어차피 나는 안 보이잖아.”

“자리가 사람을 만들 듯.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마음가짐도 달라지는 거 몰라?”

“음~ 그럴 듯한데?”

“자, 다 됐어. 이제 가 봐.”

민준이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준 진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다녀올게.”

목을 조이는 넥타이 끈을 조금 풀어낸 민준이는 아무도 바라 봐 주지 않는 무대 뒤편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혹여 그림자라도 비출까 전체적으로 실제 무대보다 빛이 약한 무대 뒤에서 민준이는 자신에게 배정 받은 피아노 앞에 앉았다.

건너편 무대 끝자락에는 주인공 한준일의 피아노를 대신 연주하는 연주자가 자리에 앉았다.

민준이는 오늘도 잘 부탁드린 다는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지만, 역시나 되돌아오는 인사는 없었다. 정말이지 마지막까지 어울리기 힘든 사람이었다.

‘후우.. 오늘만하면 강 선우 대역도 이제 끝이구나….’

가끔 촬영이 길어져 힘들기도 했지만, 나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누군가가 마련한 이야기 위해 자신의 피아노 선율을 실어본 것은 처음이다.

비록 배우들의 뒤에 숨어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높아져가는 강선우에 대한 관심이 꼭 자신에 대한 칭찬처럼 느껴졌던 나날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오늘로 끝.

피아노 위에 준비된 악보를 살피던 민준이는 빙긋 웃으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마지막은 쇼팽인가…?”

그 순간 커튼 너머 객석 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을 체크해보니 오후 6시 40분.

녹화 20분 전. 봄의 왈츠의 마지막 무대를 직접 보기 위해 녹화 방송에 참여한 사람들이 입장한 모양이었다.

곧이어 입장한 관객들에게 주의사항을 전달하는 스탭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관객들의 박수와 함께 본격적인 봄의 왈츠의 마지막 무대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웬일로 강선우가 마지막 연주자네….’

항상 드라마의 극적인 연출을 위해 강선우 보다 항상 뒤에 연주하던 한준일이었는데, 오늘은 웬일로 연주 순서가 뒤바뀌어 있었다.

덕분에 민준이는 앞에서 주인공이 준비한 세 가지 곡을 모두 듣고 나서야 강선우의 연주를 할 수 있었다.

마지막 무대에서 주인공 한준일이 준비 해온 곡은 역시 쇼팽의 곡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제법 잘 알려진 녹턴 2번과 왈츠를 위주로 선택되어 있었다.

평소보다 격앙된 연주로 인해 이마에 흘러내린 땀을 닦아 내던 주인공의 대체 연주자는 잠시 민준이를 바라보다 무대를 빠져 나갔다.

결국 무대 뒤에서 방송 스탭과 함께 둘만 남게 된 민준이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여성 스탭에게 물었다.

“저기 전 언제 시작하죠…?”

“지금 강선우가 무대에 올라오고 있어요.”

그리고 잠시 후. 무대를 향해 인사를 했는지 객석에서 엄청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봄의 왈츠에서 강선우의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이 들 정도로 정말 어마어마한 박수 소리였다.

민준이 곁에서 강선우의 무대를 살피던 여성 스탭은 민준이에게 신호를 주기 위해 돌돌 말은 종이 뭉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잠시 후. 연주 준비를 마친 배우 한동준이 스탭을 향해 신호를 보내자,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종이 뭉치를 빠르게 내리며 속삭였다.

“지금이에요..!!”

그동안 배우 한동준과 수도 없이 타이밍을 맞춰본 민준이는 그의 움직임에 맞춰 곧바로 첫 음을 울렸다.

쇼팽 녹턴 20번.

소름 끼칠 정도로 쓸쓸한 시 한편을 읽어 내려가듯 가슴에 사무치는 피아노 선율은 그 순간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단숨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봄의 왈츠 마지막 회.

이제 강선우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던 가족들의 기대는 이미 무너졌고, 자신의 운명이 누군가의 실수로 뒤바뀌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사랑했던 애인은 그의 무심함에 지쳐 떠나가 버렸고, 이제 남은 피아노 실력마저 주인공에게 미치지 못해 자리를 내줘야하는 지금…

그는 오히려 힘이 들어간 연주 대신 쇼팽의 녹턴 20번을 택했다.

마치 낡은 흑백 영사기가 돌아가듯. 쓸쓸한 회상을 잔뜩 담은 이 곡은 쇼팽의 유작이었다.

빠르게 건반을 오가면서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정확하게 내리 꽂히는 민준이의 연주에 옆에서 지켜보던 여성 스탭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것은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나 어떡해. 자꾸 눈물 날 거 같아..”

“연주가 좋은 것은 알았지만 TV에서 듣던 거랑은 차원이 다르다…”

강선우가 첫 번째로 준비한 녹턴 20번을 모두 들은 객석은 그저 숨죽인 채 그의 다음 곡을 기다렸다.

두 번째 역시 다소 조용한 분위기의 발라드를 연주한 그는 아직 첫 번째 곡의 감동에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관객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아, 역시.. 강선우 연주가 훨씬 가슴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

“진짜. 첫 번째 곡 듣고 너무 슬펐어..”

그리고 잠시 후..

두 번째 곡까지 모두 마친 뒤. 배우 한동준은 강선우의 마지막 곡을 연주하기 전 천장의 조명을 바라보며 한줄기의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대본에는 없는 그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다.

자신의 대역인 차민준의 피아노를 지금은 자신이 대역 삼아 연주하는 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무대 뒤에서 차민준의 연주가 그의 가슴에 더욱 사무치게 파고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잠시 후..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건반 위에 손을 올린 그가 스탭을 향해 신호를 보내자.

봄의 왈츠의 마지막 곡이 공개홀에 울려 퍼졌다.

쇼팽의 에튀드 10번. 이별의 곡.

그 날 차민준이 연달아 연주한 쇼팽의 곡은 객석에 앉아있던 모든 이의 마음을 그대로 관통 시켰다.

&

봄의 왈츠 신드롬은 성공적인 마지막 회와 함께 끝이 났다.

결국엔 누가 이겼냐고?

그것은 무대를 향해 쏟아진 관객들의 박수와 함성이 대신해 주었다.

열린 결말을 이용해 누군가의 확실한 승리를 정해준 것은 아니었지만, 시청자들은 누가 마지막에 웃으며 무대를 내려왔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마지막 방송이 끝나고 인터넷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공개홀의 녹화 소감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칭찬 일색이었고, 대역을 맡은 연주자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는 네티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송 대표는 드라마의 성공적인 마무리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석 혜인과 함께 방송국에 도착했다.

물론 축하를 위한 작은 선물도 잊지 않았다.

오늘 그가 방송국에 온 이유는 봄의 왈츠 OST 제작에 관해 새로운 계약을 하기 위해서였다.

원 소스 멀티 유싱..

이만큼 성공한 드라마에 OST와 DVD가 팔리지 않을 리가 없었으니까.

이미 한 인터넷 까페에서는 소장용 DVD 제작을 촉구하는 서명 운동도 일어나고 있었다.

잠시 후.

OST 제작을 위해 회의 중인 민향숙 작가를 비롯해 관계자들과 악수를 나눈 그는 탁자에 손을 올리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번 OST 제작에 들어가기 전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워낙 드라마가 좋게 끝나서 일까?

OST 역시 발매와 동시에 대박을 예감하고 있었기에 김 PD는 기분 좋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 말씀하세요. 송 대표님.”

“이번 봄의 왈츠 OST. 강선우 버전은 저희 SHW에서 따로 발매하겠습니다.”

“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