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Ep.13 : 얼굴 없는 음악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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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조명 팀 거기서 뭐해. 빨리 와서 다시 세팅 안 할래?”
“네. 지금 갑니다~!!”
“빨리 빨리 좀 해라. 이러다 해 떨어지겠다.”
확성기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사람들을 부리는 조 감독의 모습을 바라보던 진아는 길게 하품하며 입을 열었다.
“대체 우리 차례는 언제 오는 거야..”
그러자 진아 옆에 있던 민준이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왜? 심심해?”
“아니, 뭐.. 너야 솔직히 촬영 분량도 얼마 안 되는데, 후딱 찍고 보내주면 좋잖아. 시간 아깝겠시리..”
“뭐. 나름 사정이 있나보지.”
난간에 등을 기댄 채 여유 있는 미소를 지어 보이는 민준이의 모습에 진아는 영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여튼 속 편한 건 알아줘야 해.”
“나는 오히려 재밌기만 한데?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이런 기회를 얻어서 TV에도 나오고.”
“TV에 얼굴이 나와야지. 주연들 대신해 등짝이랑 손만 나오면 누가 알아줘!?”
“아, 그런가? 그래도 할머니가 보셨다면 분명 알아 봐 주셨을 텐데.”
살짝 쓴 웃음을 내비치는 민준이의 표정에 진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거야 당연히 알아보셨겠지. 할머니가 널 얼마나 사랑하셨는데.”
“그렇겠지? 고마워.”
분주히 움직이는 스탭들 사이로 주연 배우들이 대본을 읽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던 그 때 진아가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민준이에게 말을 걸어왔다.
“민준아. 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물어 봐도 돼?”
“응? 뭔데?”
“너 6학년 때 쇼팽 콩쿨에 나간 적 있었잖아. 비록 결과는 안타까웠지만…”
“응. 그랬지. 그때 발터 뮐러 선생님. 엄청 화가 많이 나셨었어. 정말이지. 그렇게 화내는 선생님 모습은 처음이었다니깐? 물론 그 이후로도 본 적이 없을 만큼..”
“그러셨겠지. 발터 뮐러 선생님도 널 무지 아끼셨으니까. 오죽하면 너를 오스트리아까지 데리고 가셨겠어? 아무튼 나는 그래서 더욱 이해가 안 돼.”
“뭐가?”
“그런 식으로 부당하게 우승을 빼앗긴 거라면 다른 콩쿨에라도 나가서 네 실력을 입증 시켜줬어야지. 봐라. 이게 내 진짜 실력이다. 그렇게 사방팔방 알리고 다녀야 그때 심사를 보았던 사람들 모두 반성하지 않겠어?”
그러자 진아의 말을 모두 들은 민준이는 입술 주위를 실룩 거리다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어쭈? 사람이 진지하게 이야기 하는데 웃어?”
“미안~ 방금 그 말은 내가 가진 실력으로 심사위원들과 싸우라는 이야기로 들려서..”
“싸웠어야지~ 바보야. 멍청하게 당하기만하고 돌아오면 어떻게?”
“그랬나..? 나도 뮐러 선생님과 같이 싸웠어야했나?”
“그게 무슨 말이야?”
“사실 그때의 나는 콩쿨엔 별로 관심이 없었거든.”
“그게 정말이야? 그런데 왜 그 먼 오스트리아까지 간 거야?”
“할머니가 원하셨으니까.”
“뭐?”
그때 난간에 등을 기대어있던 민준이가 몸을 빙글 돌려 가슴에 대었다.
하늘에 떠있는 해가 서울이라는 도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잠시동안 지켜보던 민준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 속물 같이 느껴겠지만, 그 때 내 마음 한 구석에는 ‘돈’이 제법 중요했거든..”
“돈…?”
“그래. 돈. 물론 처음 피아노를 쳤을 때는 그 것 만으로도 한 없이 기뻤는데, 대회에 참석하고 상금을 얻으니. 할머니와 함께 하는 삶이 조금씩 나아지더라? 동사무소에서 나눠주는 라면 박스를 손에 들고 달동네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던 11살짜리 꼬마아이의 기분. 진아 너는 이해 할 수 있을까?”
“아…”
아무 대답도 못한 채 그저 입술만 벌리고 있는 진아의 모습에 민준이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마 이해하지 못 할 거야.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왔지. 너도 알다시피 우리가 함께 했었던 오케스트라. 그때 대표님께서 받은 돈으로 너희 집 근처로 이사 갈 수 있었던 거야.”
“설마. 그럼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이 맞아. 모든 건 우리 할머니를 위해서였어. 그 때 그렇게라도 돈을 받지 못했다면 어쩌면 할머니는 달동네 단칸방에서 더 쓸쓸하게 돌아가셨을지도 모르지. 할머니는 내 미래를 위해뮐러 선생님과 함께 해외로 나가길 바라셨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어. 2년 뒤 더 성공해서 돌아와 할머니랑 함께 살 생각이었지.”
초 저녁 싸늘해지는 바람 때문일까? 거기까지 말을 마친 민준이는 짧게 코를 훔치며 붉게 물드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런 나쁜 생각 탓에 벌을 받은 걸지도 몰라. 대회가 끝나자마자 들려온 할머니 소식에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더라고, 할머니를 한국에 두고 온 것이 후회 되기도 하고… 한국에 돌아와 장례를 마친 뒤, 뮐러 선생님이 내 후견인이 되어주신 그 날 밤. 선생님은 내 손을 잡고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 하시더라. 자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며.. 나는 자꾸 아니라고 하는데도.”
밀려드는 옛 기억에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진 민준이는 애써 웃으며 손끝으로 고인 눈물을 훔쳐냈다.
“실은 그때 다짐했어.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콩쿨은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지만, 만약에 언젠가 다시 콩쿨에 나가고 싶은 기분이 든다면 그 첫 번째는 무조건 쇼팽 콩쿨 일 거라고, 주니어 부문 따위가 아니라. 세상에 모든 실력자들이 경쟁한다는 성인 부문에서.. 그게 뮐러 선생님과 돌아가신 할머니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랬구나.. 미안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괜찮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래도…”
진아가 민준이를 향해 우물거리던 그때..
곧바로 촬영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 중이던 스탭들의 입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 송 안나다.”
“뭐? 진짜? 어디!? 어디야!?”
“저기 바깥 쪽에 인마~!!”
“우워~!! 진짜다. 캬~ 이렇게 멀리서 봐도 엄청 예쁘네..”
“글쎄 뭔가 예쁘다는 말 보다는 뭐라고 할까. 청순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이쁘면 그냥 이쁜 거지. 뭘 그런 것까지 따져.”
“아니야. 뭔가 보면 볼수록 묘한 매력이 있단 말야.”
“웃기고 있네.”
한편 촬영장을 온통 뒤져도 안보이던 민준이와 진아가 밖에서 대화 중인 걸 발견한 안나는 반가운 마음에 크게 이름을 불렀다.
“야~ 차민준.”
“어? 안나 누나?”
“언니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
“어쩐 일이긴 스케쥴이 일찍 끝나서 너희들 구경 왔지. 그런데 뭐야? 벌써 촬영 끝났어?”
“아뇨. 아직 시작도 못했는데요.”
“뭐야? 그럼 한 컷도 못 찍었단 말야?”
“그게 주인공 역할의 배형준씨가 아직 감정 이입이 제대로 안 되었다고 계속 퇴짜 놓는 바람에..”
“헐~ 감독도 아니고 배우가?”
“배형준씨가 원래 좀 성격이 까칠하잖아요.”
“아이구.. 누가 보면 헐리웃 스타라도 나신 줄 알겠네. 진짜..”
“쉿. 언니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흥~ 들으라면 들으라지.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언니 이미지가 있는데, 팬들이 언니 입에서 그런 소리 나온 거 알면 까무러칠걸요?”
그때 촬영 스탭 하나가 유리문을 열고 나와 민준이를 향해 외쳤다.
“차민준씨. 바로 슛 들어갈 테니까 들어와서 준비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난간에 기대어있던 민준이는 굳어 있던 몸을 풀어내듯 길게 기지개를 켠 뒤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잠깐 다녀올게.”
그러자 안나가 민준이의 등을 퍽치며 입을 열었다.
“설마 연주 씬에 NG 내진 않겠지? 후딱 끝내고 닭발 먹으러 가자. 나 무지 배고파.”
“언니. 국민 여동생이 닭발이라니요!!”
“왜? 국민 여동생은 닭발 먹으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
“아니, 그건 아니지만..”
민준이는 그녀들의 어린 시절 모습을 떠올리며 기분 좋게 바라보다가 촬영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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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 시각. 민준이의 피아노 실력에 질겁한 송 대표는 오스트리아에 있는 발터 뮐러와 통화 중이었다.
“허허~ 그것 참 자네 얼굴이 볼만했겠구만.”
“말도 마십시오. 대체 그런 실력을 가지고서 여태 국제 콩쿨 한 번 안 나갔다니..”
“민준이에게 콩쿨은 별로 관심사가 아니니까.”
“그래도 피아노는 꾸준히 친 모양이군요. 팔뚝에 고무 밴드를 달고서도 그 정도라니. 대체 어떤 수업을 하신 겁니까?”
“바이올린 전문인 내가 민준이에게 피아노를 어떻게 가르치겠나.”
“네? 그럼 혹시 그쪽에서 따로 선생님이라도?”
“아냐. 나는 따로 그 아이에게 뭘 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았네. 그저 스스로 이곳에 있는 거리의 음악가들과 소통하고 협주하며 키워낸 실력이지.”
“그럼 정말 민준이 혼자서 키워낸 실력이란 말입니까?”
“믿기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밖에 대답할 길이 없군.”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발터 뮐러의 목소리에 송 대표는 마른침을 삼켜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마에스트로가 보기에 현재 민준이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요?”
“글쎄… 하지만 이거 하나는 자신 있게 말해 줄 수 있네.”
“그게 뭡니까?”
“그 녀석 16살 이후로 단 한 번도 자기가 가진 진짜 실력을 내보이지 않았어.”
“네…?”
“말 그대로 라네. 민준이는 언제나 힘을 빼고 적당히 치고 있지. 그런 녀석에게 더 힘을 빼고 치라했으니, 갈피를 잡지 못한 것도 당연하지.”
“아니. 그럼 민준이가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겁니까?”
“그거야.. 나도 알 수가 없지. 혹시 그런 때가 온다면 나도 꼭 좀 불러주게.”
“이거야 원. 농담인지 진짜인지 갈피를 못 잡겠네요.”
그러자 잠시 후.
수화기 너머의 발터 뮐러가 다소 진지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럼 어디 한 번 우리 억지로라도 확인해 볼까?”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3년 뒤에 열리는 쇼팽 국제 콩쿨. 이번에야 말로 정식으로 한 번 도전해보는 건 어떨까?”
“그 말 진심이십니까? 마에스트로께서 쇼팽 콩쿨 위원회랑 화해하시려는 거세요?”
“이 늙은이가 죽기 전에 위원회 놈들에게 엿 먹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지 않은가?”
말을 마친 발터 뮐러는 마치 호기심 가득한 어린 아이처럼 큰 소리를 내어 웃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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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룻뚜~ 뚜두룻~ 두둠~”
막대 사탕을 입에 문 채 편집실에 들어온 드라마 봄의 왈츠 총괄 PD는 고생 중인 직원들에게 막대 사탕을 돌리며 털썩 자리에 앉았다.
“후우.. 진짜 드라마 한회 찍는 게 다른 드라마 열편 찍는 것 보다 힘들네. 작가에 배우에 다들 아주 나를 들들 볶는구나..”
“누가 아니래요. 진짜. 내일은 세트장 촬영인데 벌써부터 숨이 턱턱 막힙니다.”
“힘들어도 조금만 버텨 봐. 일단 시청률만 대박 나면 인센티브 두둑하게 챙겨줄 테니까. 아 참, 그 영상에 덧씌울 샘플링 다들 보내왔나?”
“네. 방금 받아서 작업 중입니다.”
“오케이. 그거 소리 좀 키워 봐. 나도 같이 검토 좀 하게.”
“알겠습니다.”
편집실 담당이 건네주는 헤드폰을 뒤집어쓰자, 귓가에 울리는 치열한 피아노 연주에 집중하던 그는 곧이어 두 번째로 울리는 피아노 곡에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캬~ 역시 국내 최고 수준의 피아니스트라더니. 시작부터 비교가 되긴 되는 구나. 이래서 민향숙 작가님이 피아니스트를 둘이나 뽑은 거구나.”
“PD님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같은 곡이더라도 두 번째 곡이 훨씬 좋죠?”
“응. 그러네..”
“아, 젠장. 큰일 났네…”
“왜? 뭐 문제 있어?”
“그 두 번째 곡이 송 대표가 추천한 무명 연주자 곡이에요…”
편집팀 직원의 말에 멍하니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던 PD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얌마. 주인공 라이벌이 주인공보다 피아노를 더 잘 치면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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