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Ep.13 : 얼굴 없는 음악가. (3)
* * *
밝은 아침 햇살이 비치는 서재 안에서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던 중년의 여성은 잠시 후 자신의 뒷목을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는지 아주 바짝 말라있었다.
“물.”
그와 동시에 뒤에서 드라마 원고의 오타를 봐주던 여성 어시스턴트가 벌떡 일어나 거실로 달려갔다. 분명히 아침이건만 그녀의 퀭한 눈동자는 긴 밤을 지새워 작업에 열중했음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윽고 머그컵에 물을 담아온 어시스턴트가 컵받침 위에 잔을 내려놓자, 천천히 한 모금 삼킨 그녀는 곧바로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따듯한 물로 가져왔어야지!”
“아, 죄송합니다. 작가님. 다시 가져다 드릴게요.”
젊은 어시스턴트는 곧바로 그녀를 향해 머리를 숙이며 도로 머그컵을 가져갔다.
그리고 잠시 후. 조심스레 그녀의 책상에 다시 머그컵을 올려두자, 곧바로 한 모금 삼킨 그녀는 목구멍이 데이는 느낌에 소리를 빽하고 내질렀다.
“야!! 넌 따듯한 물이랑 뜨거운 물이랑 구별도 못해!?”
“죄송해요. 작가님. 제가 다시..”
“됐어. 나보고 물을 얼마나 마시라는 거야?”
“죄송합니다.”
“아무튼 진짜 센스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는지. 기가 막혀서 원..”
드라마 작가 민향숙.
대한민국 역사상 드라마 시청률 1, 2위를 다투었던 작품들 중에는 그녀의 작품이 대부분이 들어가 있을 만큼 각 방송사에도 주목하는 대형 작가 중 한 사람이었다.
양 끝이 하늘로 솟은 붉은 뿔테 안경은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이자, 불꽃같은 성격 대변해 주었는데, 그녀의 밑으로 들어간 어시스턴트 중에서 석 달을 버티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굉장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방송국 국장도 그녀 앞에서는 쩔쩔 맬 정도로 까탈스러웠지만, 일단 드라마만 냈다하면 연일 대박을 터뜨리니 방송국 입장에선 굉장히 탐나는 인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모든 걸 쏟아냈다고 자신한 ‘봄의 왈츠’는 이미 발표 단계에서부터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자신의 작품을 위해 민향숙 작가는 배우 캐스팅부터 피아노 연주자까지 모든 것을 직접 선별했는데, 까다로운 그녀의 취향을 맞춰주다 보니 담당 PD만 벌써 세 차례나 교체되어 그것 역시 제법 화제가 되고 있었다.
“저기, 오늘 오후 1시에 주인공의 라이벌 역할인 강선우의 대역 연주 할 사람이 있다고 한번 검토해 달라던데요.”
“그래? 어디 대회 수상 경력은 있고?”
“그게 딱히 그런 건 없는 것 같은데, SHW 대표가 적극 추천하는 인물이라고..”
“송 대표가 직접? 흐음…”
수상 경력 하나 없는 연주자라니. 딱히 구미가 당기진 않았지만, 아무리 그녀라도 송 대표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특히나 그의 동생인 송 안나 같은 경우엔 그녀의 전작 드라마에서 까메오로 출연해 상큼한 연기를 보여 준 적이 있기에 눈여겨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한 번 들어보기나 할까? 어차피 마음에 안 들면 거절하면 그만이니….’
그녀는 몰려오는 졸음에 두 눈을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딱 2시간만 잘 테니까. 이따가 좀 깨워줘.”
“네. 알겠습니다. 편히 주무세요.”
“교정 다 끝났으면 너도 눈 좀 붙여 둬.”
민향숙 작가는 긴 하품을 내지르며 자신의 침실로 발을 옮겼다.
&
“민준아..”
“······.”
“차 민준!?”
“응?”
진아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운전 중이던 그녀가 살며시 눈을 흘기며 민준이에게 물었다.
“아까부터 멍하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무것도 아냐.”
“너 어제 우리 학교 다녀갔었다며?”
“응.”
“그럴 거면 나한테 얘기하지 그랬어? 나도 오랜만에 가보고 싶었는데.”
“그냥 혼자 생각할게 좀 있어서. 미안.”
“네~ 네~ 그러시겠죠~”
진아는 어제 민준이의 행동이 내심 서운 했는지 빈정거리는 말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화났어?”
“응. 조금.”
보통 화났냐고 물으면 절대 아니라면서 속에 담아 두는 것이 일반적인 여자들의 반응이었지만, 소꿉친구라 할 수 있는 진아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마치 에어컨이라도 틀은 것처럼 냉랭해지는 분위기에 민준이가 자신의 볼을 손가락으로 긁어내리자, 한동안 딱딱하게 굳어있던 진아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그 버릇은 여전하네.”
“응?”
“괜히 분위기 어색해지면 뺨을 긁던 버릇 말야.”
“아, 이거? 어라 듣고 보니 그러네. 지금까지 버릇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민준이는 자신도 눈치 채지 못한 사실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는 진아의 관찰력에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잠시 후. 진아의 차가 미팅 장소에 도착하자, 그녀는 사이드 기어를 채우며 민준이에게 다시 한 번 당부했다.
“절대로 작가님의 신경을 건드리는 행동을 해서는 안 돼. 굉장히 까다롭기로 소문난 분이니까. 알았지?”
“응.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서 내리자, 때 마침 다른 곳에서 오전 스케쥴을 마친 송 대표가 석혜인과 함께 도착했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응. 너희도 제 시간에 도착했구나.”
헐겁게 풀어져있던 넥타이 끈을 다시 조이며 차에서 내린 송 대표는 대충 머리를 만진 뒤 약속 장소인 호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아이구~ 송 대표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안녕하세요. 홍 감독님.”
송 대표가 모습을 드러내자 먼저 도착해 있던 드라마 관계자들이 웃으며 반겨 주었다.
“민향숙 작가님은 아직이신가요?”
“곧 도착하신다고 합니다.”
“여전히 약속 시간은 철저하신 모양이군요.”
그리고 잠시 후. 약속 시간인 오후 1시 정각.
약간 화려한 차림의 민향숙 작가가 자신의 어시스턴트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키에 깡마른 체격.
어깨 뽕이 다소 과해보이는 그녀의 옷차림에 민준이는 하마터면 그녀를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민향숙은 사람들의 인사에 슬쩍 고개를 숙이다가 민준이와 눈을 마주치자, 자신의 빨간 뿔테 안경을 슬쩍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인가요?”
“그렇습니다. 민준아. 작가님께 인사드려”
“안녕하세요. 차민준이라고 합니다.”
“민향숙이에요.”
인사와 함께 민준이가 자신의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안경을 고쳐 쓰며 자리에 앉았다.
악수를 위해 내민 손이 무안해진 민준이는 그저 웃으며 손을 거두어야만 했다.
“오면서 이력서는 봤어요. 나이가 생각보다 젊더군요?”
“네. 올해로 스무살입니다.”
“다행히 강선우 배역을 맡은 한동준씨랑 키도 비슷하고, 체형도 비슷해서 대역으론 괜찮은데, 문제는 피아노 실력이네요. 수상 경력은 일체 없고, 빈에서 음악 학교를 나온 것 말고는 딱히 눈에 띄는 점은 없던데?”
마치 대기업 면접을 치르듯 민준이를 훑어 내리는 듯한 작가의 말투에 민준이 보다 오히려 진아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러자 송 대표가 민준이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13살 때 쇼팽 콩쿨의 주니어 부분에서 제법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약간 사정이 있어 수상을 거부했습니다.”
“그거야. 뭐 실력을 보면 알겠죠. 그럼 다들 바쁜 사람들인데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 갈까요? 차민준씨 준비 됐나요?”
“네. 바로 가능합니다.”
민향숙 작가의 주문에 자리에서 일어난 민준이는 반듯이 허리를 세운 채 피아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사전에 양해를 구해놓은 터라 민준이가 피아노 앞에 앉자, 스피커에서 울리던 음악소리가 사그라 들었다.
잠시 양쪽 손목을 주무르던 민준이는 이윽고 작은 숨을 내쉬며 부드럽게 손을 올렸다.
마치 건반 위에 깃털이라도 내려앉은 것처럼 부드러운 그의 동작에 민준이를 지켜보던 드라마 관계자들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파가니니. 피아노 연습곡. La Campanella. (라 캄파넬라.)
종소리를 뜻하는 라 캄파넬라는 본래 바이올리니스트인 파가니니가 작곡한 곡이었지만, 이렇게 바이올린이 아닌 피아노를 통해 들으니 굉장히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피아노의 고음에서만 낼 수 있는 청량한 소리를 반복적으로 울려주는 것이 특징인 이 곡은 마치 최면에 걸린 듯 그의 피아노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리던 파가니니가 만든 곡이 오죽 하겠는가?
하지만 모두의 감탄 속에 단 한 사람만은 영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녀석도 참. 적당히 좀 치라니까….’
두 손을 깍지 낀 채 민준이를 바라보던 송 대표는 자신의 곤란한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살짝 고개를 갸웃 거리며 이를 악 물었다.
그런 송 대표의 마음도 모르고 온전히 피아노에 빠져든 민준이는 쉴 새 없이 건반을 옮겨 다니며 레스토랑 가득 악마의 유혹이 가득 담긴 선율을 실어 보내고 있었다.
평범하게 식사를 즐기던 손님들마저 하나 둘 포크를 내려놓은 채 그의 음악에 빠져들 때 즈음. 민준이의 라 캄파넬라가 절정에 오르며 엄청나게 빠른 고음을 반복해서 내었다.
“저거 정말 피아노 소리 맞아..?”
반복적으로 치열하게 울려 퍼지는 고음의 맑은 소리는 언 듯 듣기에 성당에서 미사 때 사용하는 종소리와 비슷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가 차츰 잦아들 때 즈음 이번엔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한 폭풍 같은 연주와 함께 라 캄파넬라의 웅장함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피아노의 기교에서부터 건반의 터치까지 민준이의 피아노는 어린 시절의 모습을 탈피해 그 완성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저런 녀석한테 적당히 치고 오라 했다니.’
송 대표는 애초에 자신이 한 부탁 자체가 민준이에게는 무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잠시 후.
민준이의 라 캄파넬라가 끝을 맺자. 온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너무 멋있어..”
“방금 그거 무슨 곡이지? 어디서 들어본 거 같기도 한데?”
“그치? 내가 알기론 바이올린 곡으로 알고 있는데. 피아노로 쳐서 잘 몰랐어..”
그때였다.
연주가 끝난 줄도 모르고 민준이의 피아노에 온전히 빠져있던 민향숙 작가가 화들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잠시나마 자신이 넋을 놓고 보았다는 사실에 당황했는지,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린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 좋아요. 이 정도면 제 드라마에 써도 괜찮을 거 같아요.”
그 순간. 민향숙 작가의 오케이 사인에 드라마 관계자들의 표정에 경악이 스쳤다.
아무리 일류 연주자를 데려다놔도 성에 차지 않아 했던 그녀가 단번에 승낙할 줄이야…
&
잠시 후.
계약서에 사인을 마치고 나온 송 대표는 민준이와 함께 주차장으로 걸어 나오며 입을 열었다.
“녀석. 적당히 좀 치라니까. 뭘 그리 열심히 쳐. 하마터면 네 실력이 다 드러날 뻔했잖아.”
그때였다.
찌익… 찌이익…
수상한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민준이가 자신의 팔을 걷어 부치며 손목부터 팔뚝까지 데어 있는 고무 밴드를 떼어 내고 있었다.
“응? 너.. 손목에 그거 뭐냐?”
“아, 오늘은 적당히 쳐달라고 하시 길래. 임시방편으로 써본 건데요?”
“뭐…라고?”
“혹시. 더 못 쳤어야 했나요?”
“아니. 그게..”
어쩌면 적당히 쳐보라던 송 대표의 주문은 민준이에게 너무 광범위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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