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83화 (83/177)

[83] Ep.12 : 재회. (5)

&

“네. 그럼 지금까지 KBS FM 라디오 97.2 에서 전해드린 ‘음악과 함께하는 밤’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해주신 송안나씨께 감사 드리구요. 마지막으로 이번 앨범 타이틀곡인 ‘네가 보고 싶은 밤’ 띄워 드리며 저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여러분 좋은 밤 되세요~”

따듯한 목소리를 가진 남성의 클로징 멘트와 함께 귀에 익은 안나의 목소리가 택시 안에 울려 퍼지자, 민준이는 자기도 모르게 살며시 미소 지었다.

“유독 네가 생각나는 오늘 밤. 일에 지쳐 돌아오는 길에. 골목 어귀 어딘가에서 네가 불쑥 나타나는 상상을 해~ 등 뒤에 숨긴 꽃다발의 은은한 향기가~ 지쳤던 내 마음을 달래주고~”

잔잔한 기타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청아한 목소리에 운전 중이던 택시 기사 아저씨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따, 노래도 좋지만 목소리가 끝내주네~”

올해로 데뷔 4년 차를 맞이한 싱어송 라이터 송 안나는 SHW를 대표하는 가수 중에 하나였다. 특히나 이번 앨범 같은 경우엔 발매 전부터 대중들의 관심이 쏠리며 발표와 동시에 곧바로 음원차트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해내고 있었다.

잠시 후. 청담동에 위치한 SHW 엔터테인먼트의 사옥에 도착하자, 세 사람은 차례대로 택시에서 내렸다.

“우와.. 사진으로도 보긴 했었지만, 실제로 보니 엄청 크네..”

“그러게 나도 실제로 와보긴 처음인데…”

3층 건물이었지만, 부지가 제법 넓고 외관이 모두 통유리로 꾸며진 터라 민준이 눈에는 굉장히 화려해 보였다.

“오는 길에 차가 너무 막혔어. 다들 기다리겠다. 빨리 와.”

택시비 계산을 마친 진아가 영수증을 지갑에 챙기며 앞장서자, 민준이와 승우는 여전히 건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그녀를 따랐다.

&

민준이의 귀국 파티는 사옥의 옥상에 꾸며진 야외 정원에서 조촐하게 진행 되었다.

조금 쑥쓰러운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낸 민준이에게 가장 먼저 송 대표가 악수와 함께 반가히 맞아 주었다.

“잘 왔다. 민준아.”

“오랜만이에요. 송 대표님.”

“대표님은 무슨 그냥 편하게 불러.”

그때 송 대표 뒤에 숨어 있던 안나가 불쑥 튀어 나오며 가볍게 민준이를 끌어안았다.

“멋져졌는데? 차민준?”

“누나도 엄청 예뻐졌네?”

“어쭈? 얘 말하는 것 좀 봐?”

“오다가 택시에서 누나 노래 들었어. 되게 좋더라.”

“말 돌리긴.. 한국에 도착했으면 곧장 여기로 와야지. 뜬금없이 신촌엔 왜 간 거야?”

“그냥, 나름 어린 시절 추억이 떠올라서.. 그런데 막상 가보니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더라.”

그랬다. 해가 바뀌자마자 오스트리아로 떠난 12살 아이에게 자신이 살던 동네와 신촌은 어쩌면 유일한 추억의 장소였으니까.

그때 테이블 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민준.”

“어…?”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왈칵 시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

“어머, 라면 한 박스를 들고 낑낑대며 인사하던 아이가 엄청 컸네.”

“오수정 선생님… 희경 누나..”

민준이는 오 선생을 보자마자 한 걸음에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제는 자신보다 키가 훌쩍 커버린 제자의 모습에 오 선생은 민준이의 등을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우리 민준이 멀리서 고생 많았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그녀의 다정한 목소리에 민준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도 잘 지내셨어요?”

“그럼. 네가 오는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맞아. 우리 언니 그저께부터 잠을 제대로 못자더라.”

잠시 후. J 음대의 두 교수를 비롯해 민준이와 친분을 나누던 모든 이가 도착하자, 송 대표의 간단한 인사와 함께 축하 파티가 시작되었다.

옥외 정원 한켠에 설치된 피아노를 치기도 하고, 안나의 신곡을 들으며 도란도란 퍼지는 이야기꽃은 끝날 줄을 몰랐다.

“뭐? 신촌 거리에서 피아노를 쳤다고?”

“그냥 거리에 덩그러니 놓여 있길래 심심해서 몇 곡 쳤던 게 그렇게 될 줄은 몰랐죠..”

“으음.. 피아니스트를 소재로 다루는 드라마라면… 혹시 우리가 지난 번 투자한 ‘꿈의 왈츠’인가?”

그러자 송 대표의 말에 석 혜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마도 맞는 것 같은데요? 젊은 천재 피아니스트 역으로 배형준씨가 캐스팅 되어서 화제인 드라마입니다. 다음 달부터 KBS에서 방송 될 예정이구요.”

“흐음.. 거기 촬영 감독이 자네를 눈독 들였다 이거지?”

잔에 남아 있던 샴페인을 마저 비워낸 송 대표는 잠시 동안 혀를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민준이 네 생각은 어떠냐?”

“네?”

“그 피아노 대역 역할 말이야. 딱히 지금 할 일이 없다면 그거라도 해보는 건 어때?”

송 대표의 발언에 석 혜인을 비롯해 안나와 진아까지 황당한 눈으로 송 현우를 바라보았다.

“싫으면 안 해도 돼. 대신 그곳에 가면 피아노를 칠 수 있고, 배우들 연기도 볼 수 있으니 나름 나쁘지 않을 거야. 더구나 그 드라마 흥행이라도 한다면 드라마 OST도 제작될 테고 어때?”

이렇게 듣고 보니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단지 대역 배우라면 연기력에도 크게 지장도 없을 테니 말이다.

“민준군이 허락한다면 제가 내일 한번 드라마 관계자에게 연락을 넣어보겠습니다.”

“저는 괜찮아요. 안그래도 한국에 오는 비행기 안에서 무얼할까 고민했었는데 잘 됐네요. 어차피 한가하기도 하고.. 대신 내일 당장은 무리에요. 할머니를 보러가야 해서…”

“아, 그래. 알았다. 따로 일정이 나오면 연락하마.”

&

다음 날.

회사에서 잡아준 호텔 침대에서 눈을 뜬 민준이는 이마에 손을 얹은 채 몸을 일으켰다.

창가를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벌써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즐거운 파티였다.

이렇게 자신이 한국에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반겨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 민준이는 잠시 후 찬물로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오랜만에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

그는 자신이 가진 옷 중에 가장 깔끔한 검은색 정장을 차려 입었다.

“후우…”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눈물을 보이진 않았다.

그냥 담담하게 입을 굳게 다물고 거울을 한번 살핀 그가 문을 열고 나서려던 그때..

벨이 울렸다.

“어…? 누구지?”

이미 현관 문 앞에 서있던 민준이는 벨소리가 울리자마자 곧바로 문을 열었다.

그러자 되려 문 밖에 서있던 진아가 깜짝 놀라 뒷걸음칠 치는 모양새가 되었다.

“진아야. 네가 여긴 어쩐일이야?”

“아, 그게.. 저기..”

“음?”

“오, 오늘부터 내가 너 매니저야.”

“으잉? 내 매니저?”

“그러니까. 내가 널 데리고 다녀야하고, 너 핸드폰도 없지? 우선 그거부터 맞추러가자.”

“자, 잠깐만. 나 지금 할머니 만나러 가야하는데.”

“알아. 그러니까 내가 데려다 줄게. 오늘은 회사차 가지고 나왔으니까.”

“너 운전도 할 줄 알아?”

“무, 물론이지.”

입을 앙 다문 채 차키를 보이는 진아의 모습에 민준이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진아가 다급한 목소리로 뒤에 말을 이었다.

“아, 알아. 오늘 혼자 가고 싶어 하는 거. 하지만 나도 너희 할머니 보고 싶단 말야. 네가 없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너희 집에 찾아 갔었고, 할머니 돌아가신 뒤에 나도 너만큼 많이 울었고, 그동안 할머니 외로우실까 봐 기일마다 찾아간 것도 나고…. 그리고 또..”

“미안. 내가 생각이 짧았네..”

“그러니까 나도 너랑 같이 갈래. 우리 같이 할머니 보러가자.”

“그래. 그러자.”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