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Ep.12 : 재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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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W 엔터테인먼트.
사명에서도 어렴풋이 느껴지듯 SHW 엔터테인먼트는 송 현우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세운 국내 최고 수준의 연예기획사이다.
백화점을 이어 받으라던 아버지 송회장의 제안을 담담히 거절한 그는 되려 아버지를 설득하여 효율적인 운영으로 제법 덩치를 불린 백화점을 국내 유명 그룹사에게 통째로 매각했다.
유난히도 짧았던 대한민국의 경제 호황은 국제통화기구에 도움을 청한 1997년 12월로 끝이났다.
연이은 기업들의 부도와 인수 합병 속에서 서민 경제가 무너져 가는 시기..
단지 운이 좋아서였을까? 아니면 한 수 앞을 내다본 송 현우의 선견지명이 빛났던 것일까?
IMF가 터지기 직전. 사상 최대 매각가로 미래 그룹에 백화점을 넘긴 송 회장 일가는 국가 재난에 버금하는 경제적 위기를 그렇게 모면해낼 수 있었다.
송 회장은 자신이 세운 평생의 업적을 그대로 다른 기업에 넘겨줘야한다는 것이 영 껄끄러웠지만 IMF 이후. 은행이 고금리 체제로 돌아서면서 줄줄이 무너지는 기업들의 뉴스에 며칠간 식사도 제대로 못 할 만큼 큰 충격에 빠졌다.
한때 그레이스 백화점과 라이벌 관계였던 미도파 백화점 마저 IMF 한파에 큰 어려움을 겪으며 어느 한 대기업과 여러 차례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송 회장은 회사의 모든 권리를 송 현우에게 넘긴 뒤 부인과 함께 해외로 떠났다.
“아, 그래서 백화점 이름이 바뀌어있던 거구나.”
“넌 인터넷도 안 보고 사니? 아무리 해외에 나가 있어도 그렇지. 어쩜 그렇게 우리나라에 관심이 한톨도 없니?”
“미안하지만, 한국이랑은 다르게 비엔나에서는 아직 인터넷을 하기가 좀 힘들어.”
“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화도 한통 안하고…”
그러자 좁은 방송국 차량 안에서 진아의 눈치를 살피던 민준이가 어색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래도 우리나라가 작년에 월드컵 4강까지 간 건 알아.”
“으이구~ 잘났어 정말. 내가 말을 말아야지.”
팔짱을 끼며 토라지듯 고개를 돌리는 진아의 모습에 강윤하 아나운서는 그만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미안해요. 그런데 셋이 정말 친하신가 봐요?”
승우는 강윤하의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 뭐. 저랑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거든요. 그런데 아나운서님께서는 신촌에 어쩐일로?”
“네? 아.. 그게…”
잠시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할까 고민하던 강 윤하는 하는 수 없이 짧게 숨을 내쉬며 사실을 털어 놓았다.
“그러니까 저를 따라오셨단 말씀이세요?”
“어머, 아무리 언론이라도 승우한테도 개인 사생활이 있는데, 너무하신 거 아녜요?”
“제가 욕심이 좀 지나쳤죠? 미안해요. 진아…씨? 라고 불러도 되죠?”
“저야 어떻게 불러도 상관없지만, 아무튼 조심해주세요.”
마치 자기의 일인 것 마냥 승우를 대신해 불같이 화를 내는 진아 덕분에 승우는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죄송해요. 승우씨. 앞으로 절대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승우씨가 워낙 인터뷰를 허락해 주지 않으니, 저희 스포츠 투데이도 힘든 점이 너무 많아요. 위에서는 어떻게든 인터뷰 따오라고 시키지. 승우씨는 절대 취재 요청에 응해주시지도 않지. 오죽하면 제가 감독님까지 찾아가서 부탁했겠어요…”
가여운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삐죽 내미는 강윤하 아나운서의 모습에 승우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선수는 경기장 안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 가장 좋은 답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 민준이와 진아가 동시에 승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 친구 조승우 완전 출세했네~”
“그러게 맨날 교실 뒤에서 축구공 갖고 놀다가 칠판에 이름 적혔던 주제에..”
“야, 그 말을 지금 왜 해?”
“정말요? 조승우 선수 어릴 때는 엄청 개구쟁이셨구나.”
“끄응..”
나름 청소년 대표팀의 카리스마 적인 존재였던 그는 친구들의 입담에 곤란했는지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민준이 넌 이제 아예 한국에 들어온 거야?”
“아, 응. 뭐 국제 대회가 있을 때는 잠시 외국에 나갈 수도 있겠지만, 뮐러 선생님의 화가 아직 안 풀리셨거든…”
“아.. 아직 그 때 일로 화가 많이 나셨구나.”
“뭐 그 사건 이후로는 어떤 초청 공연도 응하지 않고 계시지만, 나는 차라리 잘 된 것 같아. 이제 제법 나이도 있으시니. 쉬는 것도 좋지.”
그러자 민준이의 말에 수긍하듯 두 사람 모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윤하는 잠시 어두워지는 세 사람의 분위기에 어색하게 웃으며 조승우 옆자리에 앉은 남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키는 한 184정도?
다부진 체형의 승우 선수에 비해 호리호리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마른 것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군더더기 없는 슬림 한 몸매랄까?
따듯한 눈매에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살짝 비치는 새하얀 치아.
가느다란 손가락에는 테두리에 은색 실선이 새겨진 검은색 반지가 인상 적인 남자였다.
“아~ 발터 뮐러 선생님 이야기 들으니 보고 싶다.”
“너희도 기회가 되면 한 번 선생님 만나러 가 봐. 아마 굉장히 좋아하실 거야.”
“에이~ 설마 선생님이 우리를 기억이나 하시겠어?”
“음? 무슨 소리야. 당연히 기억하시지. 지금도 가끔 우리 대회 때 찍었던 사진 서재에 두고 꺼내 보시는데.”
“정말?”
“그렇다니깐.”
뭔가 심상치 않은 세 사람의 대화 내용에 강 윤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기.. 혹시 아까부터 말씀하시는 발터 뮐러가 독일의 거장인 그 분을 말씀 하시는 건가요?”
강윤하의 조심스러운 질문 내용에 민준이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마에스트로 발터 뮐러.”
“헉.. 그 분과 직접 아는 사이세요?”
그러자 화제를 돌리려던 목적에 성공해서 일까? 이번엔 승우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알다 뿐인가요? 그 분의 직속 제자인데.”
그 순간. 승우의 대답에 강 윤하 아나운서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스포츠 전문 아나운서였지만, 클래식에도 제법 조예가 깊었던 그녀는 학생 시절 인상 깊었던 뉴스 하나를 떠올렸다.
[세계적인 지휘자. 마에스트로 발터 뮐러. 국제 피아노 대회중 하나인 쇼팽 콩쿨 주니어 부분의 심사위원들에게 격분.]
“저기.. 그럼 그 때 그 신문에 났던 한국인 꼬마가…”
그때 강윤하 아나운서의 말을 잘라내듯 진아의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려 댔다.
무려 64화음으로 이루어진 베토벤의 7번 교향곡. 벨소리에 민준이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진아야. 너 그 벨소리..”
“뭐가 어때서 나한테는 굉장히 소중한 곡이라고.”
민준이의 말을 끊으며 핸드폰 폴더를 열어젖히자, 수화기를 통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아야. 혹시 민준이 만났니?”
“네. 언니. 지금 만나서 가고 있어요.”
“하도 연락이 없길래. 혹시나 해서..”
“죄송해요. 언니. 민준이가 한국에 오자마자 사고 치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뭐? 벌써? 아무튼 그 녀석은 알아줘야 해.”
“누가 아니래요.”
“나도 방금 녹화 마치고 사무실로 가는 길이니까. 이따 다 같이 보자.”
“네. 언니 이따 봐요~”
상큼하게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닫는 진아의 모습에 민준이가 입을 열었다.
“안나 누나야?”
“응. 바꿔줄 걸 그랬나?”
“아냐. 어차피 이따 볼 텐데.”
“미안.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일이 너무 많지? 할머니도 보고 싶을 텐데?”
“할머니한테는 내일 아침 일찍 가서 인사드리려고..”
“혼자가도 괜찮겠어? 나도 같이 가줄까?”
“음… 아냐. 괜찮아.”
또 다시 어두워지는 두 사람의 분위기에 강윤하 아나운서는 그만 아까 전 질문을 다시 물어 볼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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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민준이는 잘 도착했나보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발터 뮐러의 목소리에 송 실장.. 아니 송 대표는 웃으며 대답했다.
“제자가 그리 걱정 되시면 같이 오시지 그러셨습니까?”
“내가? 아냐. 이제 이 늙은이가 가기엔 한국은 너무 멀어.”
“그런 것 치고는 목소리가 정정하신데요? 쇼팽 콩쿨 때 바르샤바에서 심사위원들에게 호통 치던 그 때 그대로입니다.”
“크흠. 그 날 일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으니 더 이상 말하지 말게.”
“제가 실수 했군요.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나저나 그렇게 어렸던 민준이도 벌써 스무살이군. 아무튼 세월 참 빨라.”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민준이를 한국에 부른 이유가 대체 무언가?”
“글쎄요. 딱히 무얼 해보라고 권하진 않을 생각입니다. 잠시 여유를 두고 지켜봐야지요.”
“그것도 재밌겠군. 그 녀석이라면 분명 어느 곳이든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가지를 뻗어 나갈테니까..”
“저 역시 그 점이 기대가 됩니다. 그럼 민준이를 만나고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나도 피곤하니 이만 쉬어야지. 나도 늙었나 벌써부터 민준이의 피아노가 그리워지는구만..”
발터 뮐러와의 통화를 마친 송 대표는 오랜만에 만나는 재회에 가슴이 두근 거렸다.
‘바르샤바를 뒤집어 놓았던 꼬맹이가 벌써 스무살이라….’
소매에 단추를 채우던 송 대표는 문득 떠오르는 옛 기억에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1996년 열린 쇼팽 콩쿨의 주니어 부분에서 민준이는 본선까지 심사위원들의 높은 평가를 받으며 치고 올라갔으나 안타깝게도 우승의 문턱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민준이가 본선에 올라갔다는 소식에 J 음대의 두 교수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건너온 송 현우에게도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 역시 민준이의 무대를 직접 보고 우승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쇼팽의 여린 감성과 터치를 그대로 재현해낸 민준이의 수준급 연기에 관객들의 함성과 박수가 바르샤바의 홀을 가득 메웠던 그 순간.
그 누구도 동양인 아이의 우승을 의심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역사와 전통을 가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쿨에서 단 한 번도 순위에 올라본 적 없던 유색인종이 대상이라니. 쉽게 인정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 해의 우승은 폴란드 출신의 한 아이에게 돌아가게 되었고, 민준이는 2위에서도 밀려 3위에 입상하였지만, 당시 발터 뮐러는 언론을 통해 쇼팽 콩쿨의 심사위원들을 맹렬히 비난하며 수상을 거절하였다.
덕분에 클래식계와 사이가 틀어져 버린 발터 뮐러는 이후 어떠한 공연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하기사 직접 무대를 지켜본 관객들마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 심사위원들의 판정덕분에 언론도 제법 떠들썩했지만, 결국 작은 동양인 꼬마의 쇼팽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항상 콩쿨이 끝나면 그 해의 수상자들의 곡을 모두 모아 음반을 내곤 했는데, 발터 뮐러의 요청으로 민준이의 쇼팽은 결국 실리지 않았다.
‘가장 완벽한 쇼팽의 피아노를 스스로 외면한 당신들에게 내 제자의 피아노를 들려줄 가치가 없다.’
실제 민준이가 참가했던 쇼팽 콩쿨의 음반이 발매 되던 날.
한 신문사를 통해 발터 뮐러가 남긴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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