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Ep.12 : 재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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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으로!!”
자신을 마크 중이던 수비수를 제치며 안쪽으로 쇄도하는 승우의 등 뒤로 후배의 크로스가 올라왔다.
‘젠장. 조금 부족해.’
별 수 없이 파고드는 속도를 늦추자, 또 다시 그의 앞을 가로 막는 수비수.
그 순간. 승우는 자신의 등 뒤로 떨어지는 공을 발 뒷꿈치를 이용해 툭하고 차올림과 동시에 허벅지 힘을 주어 낮은 자세로 몸을 가속 시켰다.
“뭐, 뭐야!?”
낙하 포인트에서 당연히 멈춰 설 줄만 알았던 수비수는 마치 눈앞에서 승우가 공과 함께 사라지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감각적인 테크닉으로 골키퍼와 1:1 상황에 놓인 승우는 눈앞에 떨어지는 공을 그대로 걷어차 골대 오른쪽 구석에 밀어 넣었다.
촤라라락!!!
“우와아아~!!”
공과 함께 수비수를 제치는 그림 같은 장면에 그의 플레이를 바라보던 기자들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저런 플레이어가 작년 월드컵에 출전했었더라면 결승도 노려 볼 수 있었는데…”
“부상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죠. 히딩크 감독도 아쉽지만 선수의 미래를 위해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했으니. 대신 우리에겐 청소년 월드컵이 있지 않습니까.”
그때 대표팀의 연습 경기가 한창인 운동장 안으로 미모의 여성이 두 기자의 대화에 맞장구치며 들어왔다.
“맞아요. 또한 덕분에 다음 월드컵 역시 기대해 볼만하지 않겠어요?”
“설마? 스포츠 투데이 강윤하 아나운서…?”
축구 팬들 사이에서도 제법 인지도가 높은 강윤하 아나운서는 타고난 건강미를 뽐내듯 착 달라붙는 청바지 위에 단추 몇 개를 풀어낸 새하얀 블라우스로 남성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다들 정신 똑바로 안 차릴래!?”
주장인 승우의 외침에 잠시나마 그녀에게 향했던 선수들의 시선이 빠르게 공을 쫓았다.
따스한 봄의 햇살 아래 땀 흘리는 선수들의 경기를 지켜보던 그녀는 이윽고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 카메라맨에게 사인을 보냈다.
“조승우 선수? 스포츠 투데이에 강윤하 아나운서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후배에게서 건네받은 스포츠 타올로 흐르는 땀을 대충 닦아낸 승우는 다음으로 벤치에 놓여진 이온 음료를 집어 들었다.
“저기 바쁘지 않으시면 잠시 인터뷰 좀 응해주시겠어요?”
강윤하 아나운서의 은근히 노골 적인 패션에 캡틴 주위에서 음료수를 삼키던 선수들의 눈빛이 힐끔힐끔 그녀의 가슴 쪽을 향했다.
아주 약간의 바람이라도 불어준다면 그녀의 블라우스 안쪽이 슬쩍 보일 것도 같은데, 오늘 따라 바람 한 점 없는 하늘이 이토록 원망스러울 줄이야..
“죄송한데, 제가 오늘은 좀 바빠서요. 다음에 인터뷰 해드리면 안될까요?”
“네? 조승우 선수 지난주에도 그런 식으로 빠져나가시고, 오늘도 이러시면 저 국장님께 혼나요.”
“끄응… 어쩌죠? 제가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요.”
다급하게 스포츠 백에 자신의 물건을 챙겨 넣는 승우 선수의 움직임에 강윤하는 서둘러 대표팀 감독을 향해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미리 대표팀 감독과 오고 간 이야기가 있어서 일까?
청소년 축구팀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나 승우에게 외쳤다.
“마, 인터뷰 잠깐 해줘라. 아나운서님 땡볕에 자꾸 불러내지말고..”
“감독님. 그게… 오늘은 진짜..”
“됐고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텐데, 후딱 해주고 가면 될 거 아냐?”
“네.. 알겠습니다.”
결국 감독의 명령에 승우는 자신의 가방을 벤치에 내려놓고 강 아나운서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경기장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에 그녀와 마주 앉은 승우는 영 익숙치 않은 인터뷰 자리에 헛기침을 내뱉었다.
“드디어 조승우 선수와 인터뷰를 하게 되네요.”
승우를 향해 살갑게 웃어 보이는 강윤하 아나운서의 모습에 멀리서 구경 중인 선수들의 표정에 부러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승우는 초조한 얼굴로 시계만 바라볼 뿐이었다.
“많이 급하신가봐요. 혹시 여자친구랑 데이트?”
“네? 아, 아뇨.”
“에이~ 특종하나 걸리는 줄 알았더니, 쉽게 안 넘어 오시네.”
아쉽다는 표정으로 대본을 정리한 그녀는 카메라맨에게 큐 사인을 보내며 본격적인 인터뷰를 시작하였다.
잠시 후. 녹화를 알리는 녹색 불이 들어오자, 그녀는 마치 승우를 처음 만난 사람처럼 목소리 톤을 높이며 인사를 건넸다.
“드디어 저희 스포츠 투데이에서 조승우 선수와의 단독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요. 안녕하세요~ 조승우 선수.”
“네. 안녕하세요. 조승우입니다.”
“방금 전 연습경기에서 멋진 골을 선보이셨는데요. 정말 지켜보는 제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멋진 슛이었습니다.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걸까요? 어쩜 그렇게 뒤에서 날아오는 볼을 정확하게 툭하고 쳐낼 수 있었는지. 정말 축구 천재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플레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우선 작년에 입은 발목 부상은 이제 완치가 되신 건가요? 2002년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한 탓에 팬들의 아쉬움이 많았었는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네. 부상은 완전히 치료 되었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할 뿐입니다. 하지만 국가대표 선배님들께서 훌륭한 업적을 달성해 주셔서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승우 선수의 말대로 작년 여름은 전 국민이 하나로 붉게 물든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텐데요. 기적과도 같은 월드컵 4강에 힘입어 곧 있을 세계 청소년 축구 대회도 그 관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표님의 주장으로 각오 한 마디 부탁드려요.”
“우선 국민 여러분의 관심에 너무나 감사드리며 세계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열심히 뛰겠습니다.”
“혹시 우승을 노리시나요?”
“물론입니다. 스포츠 선수로서 우승을 노리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조승우 선수의 확고한 대답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는데요? 저희 스포츠 투데이에서도 조승우 선수와 대한민국 대표팀의 선전을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여기서 개인적인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통상적인 질의응답으로 인터뷰가 끝난 줄로만 알았던 승우에게 강 윤하는 여우같은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네. 뭐…”
“혹시 여자 친구 있으신가요?”
“아뇨. 없습니다.”
“그렇다면 연습이 없는 휴일에는 보통 어떻게 지내시나요?”
“연습이 없는 날에도 볼 트래핑은 계속 하고 있습니다.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습관처럼 반복해오던 연습이니까요.”
“어머, 그럼 혹시 식사 중에도 트래핑 연습을 하세요?”
강윤하의 어이없는 질문에 말문이 막히자, 그녀는 웃으며 농담이라는 말로 분위기를 환기 시켰다.
“그럼 정말 축구 말고 또 다른 취미는 없으신가요?”
집요하게 물어뜯는 그녀의 질문에 승우는 반쯤 포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가끔 혼자 있을 때 트럼펫을 불기도 합니다.”
“트럼펫이요? 어머, 멋져라. 조승우 선수에게 이렇게 멋진 취미가 있을 줄이야. 지금 쯤 TV를 보고 계시는 여성 팬들의 비명이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 합니다. 그럼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 다면 트럼펫 시범을 좀 보여주셔도 될까요?”
“네…? 여기서요?”
그러자 준비했다는 듯이 카메라맨 옆에 있던 촬영 관계자의 손에는 어느새 황금색 트럼펫이 들려 있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어차피 사전 조사로 인해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물어보고 그걸 또 눈앞에서 시켜보기까지 하는 방송 관계자들의 태도에 승우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한 곡 부탁드려도 될까요?”
강윤하 아나운서의 대본에 놀아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여기서 거절하면 언론의 질타를 받게 될 것이 뻔하기에 승우는 하는 수없이 트럼펫을 손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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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경기병 서곡의 첫부분을 연주한 후에야 강윤하 아나운서의 인터뷰를 빠져나온 승우는 마지막 인사를 마치자마자 총알 같이 자신의 가방을 챙겨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폰을 꺼내어 보니 부재중 통화가 8통이나 걸려와 있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급히 핸드폰을 펼치고 어디론가 통화하며 달려가는 승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강윤하 아나운서는 서둘러 자신의 카메라맨을 불러 승우의 뒤를 쫓았다.
‘저 반응은 분명 여자 친구야. 확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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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칵..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공중전화박스를 빠져나온 민준이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뭐야. 도착하면 전화하라더니. 받지도 않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민준이는 하는 수 없이 가장 앞줄에 대기중인 택시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잠시 후.
2003년 4월의 어느 날. 신촌 젊은이의 거리.
“우와… 사람이 엄청 많네..”
실로 오랜만에 찾은 서울의 번화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보다 더 많은 사람들도 붐비고 있었다. 정말이지 예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늘어난 자가용과 버스를 바라보던 민준이는 가장 먼저 보이는 공중 전화박스에 동전을 넣고 전화를 걸었다.
잠시 통화음이 가고,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민준이니?”
“아, 바로 알았네. 응 맞아. 진아야 오랜만이다.”
“차민준. 너 지금 어디야? 승우가 조금 늦게 나와서 지금 나랑 같이 공항으로 가고 있는데.”
“어, 그게 나 지금 신촌인데?”
“뭐어? 신촌!? 언제 거기까지 간 거야!?”
“그러니까 괜찮다고 했잖아. 택시타고 오면 된다고… 내가 애도 아니고.”
“너 그래서 택시비 얼마 냈어?”
“어? 그게… 18만원이었나?”
“시.. 18만원!? 아이고 머리야. 아무튼 너 지금 신촌 어디야.”
“그, 글쎄.. 아, 저기 젊은이의 거리라는 큰 팻말이 있고.. 대충 어렸을 때 연습실 근처 같은데?”
“알았어. 승우랑 바로 차 돌려서 갈 테니까. 거기서 딱 기다려.”
“응. 알았어.”
여전히 귓가에 따갑게 울리는 진아의 목소리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수화기를 내려둔 민준이는 다시 신촌 거리로 나섰다.
“여기서 꼼짝 말라고 하긴 했는데… 뭐 잠깐은 괜찮겠지.”
그렇게 잠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민준이의 눈앞에 거리 한복판에 방치된 피아노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어라? 웬 피아노가 길거리에 버려져 있지?’
대충 봐도 관리가 매우 소홀해 보이는 업라이트 피아노의 모습에 그는 천천히 다가가 건반을 눌러보았다.
딩… 딩.. 틱..
‘우와.. 심하다. 심지어 몇 개는 현이 끊어진 것 같은데?’
하지만 이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마냥 친구들을 기다리기 심심했던 민준이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안 그래도 심심했는데, 한곡 쳐볼까?’
결국 버려진 피아노 앞에 놓여진 허름한 의자에 앉은 민준이는 주변에 오가는 사람들을 시선에도 불구하고 슬쩍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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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컷~!! 거기까지 아주 좋았어~!!”
카메라 모니터를 통해 배우들의 연기를 관찰하던 감독의 컷 사인이 떨어지자, 배우들은 짧게 숨을 내쉬며 다음 씬을 위해 서로 대본을 확인했다.
“좋아. 다음은 거리에 버려진 피아노를 연주하는 주인공 씬. 어이, 조 감독 피아노 준비 됐어?”
“저기 감독님. 그게 미리 준비는 해 놓았는데..”
“준비 해놨으면 바로 바로 설치하고 다음 장면 준비해야지. 지금 뭐하는 거야?”
“아뇨. 그게 작은 문제가 생겨서…”
“문제? 무슨 문제?”
“촬영 동선에 방해 될까봐. 잠시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놔두었는데..”
“놔두었는데?”
“웬 희한한 녀석이 하필 거기 앉아 피아노를 치고 있어서요.”
“뭘 그런 것 같고, 호들갑이야. 촬영 중이니까 얼른 쫓아 보내.”
“아니. 그런데 그게.. 쉽지 않을 듯한데요?”
“뭐? 어째서?”
“그 사람 주변에 사람들이 엄청 많이 모여 있어요.”
“으잉?”
잠시 후. 조 감독과 함께 피아노를 두었던 곳에 도착한 촬영 감독은 수많은 인파속에 울리는 피아노 소리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어이, 조 감독. 저거 고장 난 피아노. 헐값에 들여온 거 아니었어?”
“네. 맞아요.”
“그런데 저 사람은 어떻게 연주를 하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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