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Ep.11 : 오케스트라 대회에서 생긴 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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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민준이 역시 건너편에 보이는 베토벤의 모습에 그만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딱 보아도 눈물이 그렁그렁 한 아이의 표정에 노년의 베토벤은 살짝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이, 꼬맹이. 오랜만에 나타나서 괜히 나까지 울컥하게 만들지 마. 여기서 괜히 눈물을 보였다간 내가 만든 음악에 스스로 감동한 미친 늙은이처럼 보일 거 아니냐.”
마치 투명한 벽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의 시선에 서로의 오케스트라 악단이 비쳤다.
그때 천천히 베토벤을 향해 지휘봉을 들어 보이는 민준이의 행동에 방금 전까지 무대를 포기하고 내려가려던 그의 생각이 바뀌었다.
‘설마. 지금 나를 도와주려는 것이냐?’
자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의 모습에 베토벤은 실소를 내뱉으며 지휘봉을 집어 들었다.
“좋다. 그럼 마지막 수업을 시작하자꾸나.”
그리고 잠시 후.
마치 거울을 마주보는 것처럼 두 개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서로를 등진 채 악기를 들어 올리자, 베토벤과 차민준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은 포즈로 지휘봉을 바로 세웠다.
‘자~ 가볼까?’
베토벤 9번 교향곡. 제 4악장.
도입부에서 두 사람은 잔잔한 바닷가에 한조각의 배를 띄우듯 호른의 선율을 객석을 향해 실어 보냈다.
그 후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선율을 이어 붙이자, 무대라는 바다 위에 띄워진 작은 배는 현악기의 선율을 타고 순조로운 항해를 시작하였다.
한편 객석에서 민준이의 연주를 지켜보던 월간 클래식의 두 기자는 서로 내기를 걸었던 것조차 잊은 채 리틀 스타의 공연에 흠뻑 취해 있었다.
“일전에 선배님이 진짜 지휘자는 연주자들의 악기에서 직접 선율을 뽑아낸다고 하셨었죠?
“그랬지…”
“지금에서야 그때 선배님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네요.”
“사실 지금 와서 하는 말인데..”
“네?”
“그 말 실은 나도 선배 기자한테 들은 이야기거든.”
“어억…”
우수한 지휘자는 연주자의 악기에서 직접 소리를 뽑아낸다.
그 역시 선배에게서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무슨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법 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하긴 악기를 다루는 연주자는 따로 있는데, 지휘자가 뭐랍시고 소리를 끄집어낸다는 말인가?
하지만 후배의 이야기를 들고 난 그는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저 아이는 지금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악기를 연주하고 있어….’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마치 관객들의 심장을 농락 하듯 긴박한 리듬으로 잔뜩 긴장하게 만들다가도 이내 부드러운 화음으로 감싸주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한편 귀가 들리지 않는 베토벤은 민준이의 지휘법을 토대삼아 자신이 작곡한 9번 교향곡을 훌륭히 이끌어 내고 있었다.
‘귀가 들리지 않더라도 음악은 늘 나와 함께 있다. 비록 먹구름이 낀 하늘일지라도 그 위엔 분명 태양이 비추고 있을 테니까.’
베토벤은 민준이의 손끝에서 절대 눈을 떼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악단에게 칼 같은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어느 악기가 어느 자리에 앉아 있을지는 굳이 시선을 옮기지 않아도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민준이가 선도하고 있는 템포였다.
‘좋아.. 잘하고 있어. 꼬맹이.’
그렇게 두 명의 지휘자는 무대 위에 띄워진 작은 조각배에 어느 때는 폭풍같이 휘몰아치는 타악기의 선율을.. 그리고 어느 때는 따스하게 내비치는 비올라의 선율을 내리며 점차 4악장의 합창 부분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제 곧….’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흩날리는 땀방울 속에서 민준이와 베토벤이 서로를 향해 미소 짓던 그 순간.
폭풍 같이 휘몰아치던 수 많은 악기들의 화음이 일순 멈추었다.
죽어라 팀파니의 쳐대던 민석이이 역시 손으로 팀파니의 진동을 멈춘 채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 때…
어느새 무대 오른 편에 올라와있던 세 명의 아이가 동시에 객석을 향해 노래하기 시작했다.
O Freunde, nicht diese T?ne!
(오~ 벗이여. 이 선율이 아니오!!)
Sondern laßt uns angenehmere anstimmen, und freudenvollere!
(좀 더 기쁨에 찬 노래를 부르지 않겠는가~!!)
비록 바리톤의 묵직한 선율은 아니었지만,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아이들의 화음이 제법 들어 줄만 했다.
“저것은 미스터 송의 작품인가?”
“기왕이면 비슷한 나이대로 맞추려고 노력했죠.”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위해 따로 모집한 어린이 합창단의 등장에 무대를 지켜보던 관객들의 기대감은 더욱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한편 베토벤이 직접 지휘 중인 1821년의 비엔나 역시 갑작스런 바리톤의 등장에 관객들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실 이때만 하여도 교향곡에 인간의 목소리를 넣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베토벤이 직접 지정한 음이 너무나도 높았기에 선뜻 나서는 이도 없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오페라 극단에서 불러온 배우를 이용해 오케스트라 공연을 펼친 결과 살짝 불안하긴 했어도 나쁘진 않았다.
베토벤은 반주가 들어가는 타이밍을 잡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바리톤의 목울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지금인가? 젠장. 저 자식 살이 너무 쪄서 성대가 떨리는 건지. 살이 떨리는 건지. 알 수가 없군.’
하는 수 없이 그의 입모양을 따라 함께 노래를 부르며 전체적인 템포를 맞추기는 했지만, 한 번 중심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땀이 비오듯이 흐를 정도로 불안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바리톤과 테너가 주고받는 화음이 끝나고 나면 곧바로 9번 교향곡의 백미라 할 수 있는 합창의 순간이 펼쳐질 텐데, 과연 그 타이밍을 정확히 잡아 낼 수 있을까? 의문의 꼬리가 점점 길어지던 그때.
건너편에 있던 차민준의 손가락이 분명하게 자신을 가리 켰다.
그 순간 베토벤은 온몸에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 한 기분에 휩싸였다.
‘저 자식이… 나를 뭘로 보고….’
지휘자의 왼쪽 검지 손가락.
그것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는 경고의 의미였기 때문이다.
차오르는 분노에 부서질 듯 어금니를 꽉 깨물자, 뿌드득 이를 가는 기분 나쁜 소리가 귓구멍 안쪽을 통해 퍼져 나갔다.
그 순간. 베토벤에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제껏 고막 안쪽에 물이 차올라 멍멍하게만 들리던 소리가 한순간이나마 고인 물이 빠져 나가듯 쪼르륵 소리와 함께 상쾌한 바람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상쾌한 바람에 실린 바리톤의 목소리가 귀에 꽂힌 그 순간.
잠시 고개 숙였던 그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그려졌다.
‘들린다… 들려.’
누군가 신이 존재 하냐고 묻는다면 지금의 베토벤이라면 몇 백번이고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일 자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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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민준이가 누구에게 경고를 준거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민준이의 경고를 놓쳐 본 적 없는 안나였지만, 방금 전의 사인은 대체 누구를 향한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누군가에게 경고를 주고 난 민준이는 굉장히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 짓고 있었다.
한편 자신의 경고 후. 눈빛부터 완전히 달라진 베토벤과 마주한 민준이는 긴장감에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내가 너무 주제넘었나?’
막간을 이용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훔쳐낸 민준이는 작은 미소로 그에게 용서를 빌었다.
‘이제와 빌어도 소용없다. 이 녀석아. 너야 말로 지금부터 똑바로 나를 따라 오거라.’
한 순간이나마 두 귀가 멀쩡해진 베토벤에게 지금 두려운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윽고 바리톤의 목소리가 주도하던 곡의 분위기가 다시 오케스트라에게로 넘어오고, 베토벤은 정확한 타이밍에 예고음을 지시했다.
빰빰, 빰빰…
반복적으로 울려 퍼지는 호른의 선율 속에서 무대 뒤에 서 있던 합창단은 곧이어 다가올 자신들의 차례에 긴장했는지 마른침을 꿀꺽 삼켜냈다.
빰빰. 빰빰…
두 번째 예고음과 함께 바이올린의 선율이 더해진 그 순간.
베토벤과 차민준의 두 팔이 오케스트라가 아닌 무대 뒤쪽을 가리켰다.
파앗!!
그 순간 민준이의 무대 뒤에 가려져있던 커튼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새하얀 미사복의 성가대가 50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Freude, sch?ner G?tterfunken,
환희여, 아름다운 신들의 찬란함이여,
Tochter aus Elysium,
낙원의 딸들이여,
Wir betreten feuertrunken,
우리 모두 황홀감에 도취해,
Himmlische, dein Heiligtum.
빛이 가득한 성지로 들어가자.
Deine Zauber, binden wieder,
엄한 현실이 갈라놓았던 자들을,
Was die Mode streng geteilt,
그대의 신비한 힘으로 다시 연결시켜
Alle Menschen werden Br?der,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리니.
Wo dein sanfter Fl?gel weilt.
그대의 고요한 나래가 멈추는 곳에…
어린이 합창단의 환희의 송가가 울려 퍼진 그 순간.
객석에 앉아있던 관람객들 모두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차례차례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도저히 이 광경을 편히 앉아서 감상하기에는 끓어오르는 듯한 그들의 감정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으어억… 선배님. 이 느낌은… 대체..”
“나도 몰라… 묻지 마.”
천장에서 쏟아지는 강렬한 조명 빛. 그리고 귓가에 울려 퍼지는 어린이 성가대의 환희의 송가 속에서 민준이는 스르륵 두 눈을 감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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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아아아아!!!!!!!”
귀가 통째로 떨어져 나갈듯한 사람들의 함성에 퍼뜩 정신을 차린 민준이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아주 잠시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모든 연주가 끝나고 객석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때 콘서트마스터인 안나가 민준이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뭐해? 관객들에게 인사해야지.”
“어? 자, 잠깐만… 연주는?”
“무슨 소리야? 방금 모두 끝났잖아.”
“뭐라고?”
지친 기색이 역력한 안나에게서 시선을 돌리자, 저 먼곳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베토벤이 있었다.
건너편 세계에서도 모든 연주를 마쳤는지 베토벤을 향해 사람들의 박수가 쏟아지고 있었다.
“서, 선생님…”
관객에게 인사를 올리는 베토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민준이가 그를 부르자, 베토벤은 천천히 몸을 돌려 자신의 제자와 눈을 마주쳤다.
잠시 민준이를 향해 웃고 있던 그는 천천히 왼팔을 들어 검지 손가락으로 민준이를 가리켰다.
‘정신 똑바로 차려. 이 녀석아. 나머지 지휘는 너의 스승인 내가 대신 해주었다.’
“아… 선생님..”
‘만나서 반가웠고, 참으로 고마웠다. 꼬맹아.’
베토벤과의 짧은 만남은 그가 스코어에 지휘봉을 내려놓은 그 순간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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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였습니다. 주인님!!”
“정말이에요. 한스 아저씨 말대로 진짜 최고였어요. 선생님.”
“고맙다. 다들.. 이제 좀 쉴 수 있겠군.”
한스의 부축을 받아 무대에서 내려온 베토벤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수잔이 가져다준 물 한모금을 삼켰다. 약 1시간 10분간 이어진 9번 교향곡을 모두 마치자, 온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지켜보는 한스와 수잔을 바라보던 그는 턱까지 흘러내린 땀을 훔치며 입을 열었다.
“한스..”
“네. 주인님.”
“자네 목소리..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군.”
“헉.. 제 목소리가 들리세요?”
그러자 베토벤은 한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럭저럭…”
“설마 주인님의 청력이 돌아온 걸까요?”
“그건 아냐.. 자네 목소리가 점점 먹먹해지는 걸 보니, 곧 다시 멀겠군.”
“주인님…”
“다시 귀가 멀기 전에 자네에게 할 이야기가 있네.”
“그게 뭔가요?”
“그 녀석. 민준이를 봤어.”
“네에!? 어, 어디서요? 어디있습니까. 그 녀석!!”
“민준이를 보셨다구요? 선생님 정말이세요?”
곁에 있던 수잔 역시 베토벤 선생의 말에 깜짝 놀라 객석 쪽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객석에서 민준이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한스와 수잔의 모습에 베토벤은 의자에 기댄채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크크~ 아하하~ 그래.. 자네의 그 허둥대는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
“뭐라구요? 설마 지금 저희에게 민준이를 봤다고 거짓말을 하신 거예요?”
“하하.. 하.. 하아.. 미안하네. 거짓말이었어.”
“주인님!!”
“베토벤 선생님!!!”
“미안.. 미안하네.”
그 말을 끝으로 쓰러지듯 잠이든 베토벤의 두 눈가에는 작은 눈물이 고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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