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Ep.11 : 오케스트라 대회에서 생긴 일. (4) (3권 끝.)
“대신 내가 이기면 나한테 소개팅 10번 시켜주는 거다.”
“켁, 10번이요? 아니. 저도 여자 친구가 없는데, 그걸 어떻게 들어드려요!?”
당황한 후배가 살짝 언성을 높이자, 주변에서 기자들을 향해 따가운 시선이 쏟아져 내렸다.
매너 없는 행동을 꾸짖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푹 숙인 채 프로그램을 살펴보자, 놀랍게도 무대 위에 아이들은 이번 대회에 정식으로 자격 심사에 통과한 악단이었다.
‘이벤트성 악단이 아니었어?’
하지만 그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프로그램에 적혀 있는 연주 목록이었다.
-베토벤 제 7번 교향곡. 제 1악장과 4악장.-
-베토벤 9번 교향곡 中 제 4악장.-
그 순간 함께 연주 목록을 살피던 월간 클래식 기자들은 동시에 서로를 마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선배님. 베토벤 9번 교향곡의 4악장이라면…”
“그러게, 4악장은 합창이잖아?”
“그렇죠? 제가 착각한 게 아니죠? 그런데 합창단은 어딨죠?”
“몰라. 그걸 내가 어떻게 알냐? 쉿. 조용해 봐.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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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를 시작하기 전 민준이는 단원들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그 동안의 추억을 떠올려 보았다.
하도 연습을 많이 해서 한쪽 팔이 유난히 굵어졌다며 투덜대던 바이올린 연주자 누나.
간식 시간마다 민석이랑 빵 하나라도 더 먹기 위해 투닥 거렸던 트럼본 연주자 형.
지난여름 합숙 때 유난히 마을 회관 할머니 할아버지를 잘 따랐던 착한 호른 연주자 누나.
첼로를 기가 막히게 연주하지만, 다소 여성스러운 성격을 보였던 동갑내기 친구 등등..
때로는 마치 영원히 안볼 것처럼 싸우다가도, 화해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세상 누구보다 친하게 지냈던 단원들.
이제 그들과 함께했던 모든 연습의 결과를 관객들에게 내보일 차례였다.
마지막으로 안나를 향해 민준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석 바이올린 연주자인 안나는 자신의 악기를 들어올렸다.
차라라락.
지휘자 간결한 손놀림과 동시에 악기를 들어 올리는 모습부터가 관객들에게 뭔가 예사롭지 않은 느낌을 전해주고 있었다.
지휘봉의 양쪽 끝을 잡은 채 아이들을 바라보던 민준이의 두 팔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튕기듯 바닥을 향해 내려친 순간.
오케스트라 악단. 리틀 스타의 첫 음이 공연장에 울려 퍼졌다.
콘서트마스터인 송안나의 주도 아래 15개의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일제히 활을 켜자, 그 속에서 수줍은 듯이 진아의 오보에 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반년 전보다 더 우람해진 체격의 민석이는 마른 침을 삼키며 민준이의 요청에 따라 현악기의 리듬 위에 팀파니의 소리를 얹었다.
‘좋아….’
과감하게 초반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던 민준이는 잠시 후. 자신의 입가에 플룻을 가져다 대는 소희를 향해 왼 손을 뻗으며 손가락 하나를 치켜세웠다.
‘아직. 조금만 기다려줘.’
이미 수도 없이 연습을 반복해온 아이들은 민준이의 손끝 동작과 눈동자만 보아도 무얼 말하려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소희는 악보를 살피며 언제라도 민준이가 원하는 타이밍에 연주에 들어갈 수 있게 마음의 준비를 다졌다.
곧이어 다시 한 번 민준이의 지휘봉 끝이 정확히 자신을 향한 순간.
온갖 악기의 선율로 가득했던 오케스트라 라는 숲 속에서 플룻의 잔잔한 소리가 옥구슬처럼 또르르 구르기 시작했다.
“아…”
순간 객석에서 민준이의 공연을 바라보던 발터 뮐러조차도 지휘자와 플룻 연주자가 만들어낸 환상적인 타이밍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들의 연주를 지켜보던 월간 클래식의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부분은 아주 완벽했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완벽한 타이밍.
그리고 잠시 후. 고요해진 무대 위에서 1악장의 하이라이트라고도 할 수 있는 플룻의 독주가 잠들어 있는 악기들을 하나 둘씩 깨우듯 반복적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마치 어미 새의 뒤를 쫓는 어린 새 마냥 조금 씩 음을 높여 가던 플룻의 음색이 가장 높은 음에서 청하하게 빛을 낸 그 때. 민준이는 힘차게 양팔을 휘두르며 무대 위의 모든 악기들에게 명령했다.
‘지금이야.’
그 순간. 민준이의 무대를 지켜보던 관람객들의 머리 위로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 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허억..!!”
등줄기를 짜릿하게 타고 흐르는 이 느낌은 소름이라는 감각을 넘어선 전율이었다.
제각각 아이들이 손에 들려 있는 서로 다른 악기가 지금 이 순간. 단 하나의 주제를 연주하고 있었다. 환희라는 이름의 벅차오르는 감정을 노래하고 있었다.
오케스트라 첫 무대에서 실버 벨이 비발디의 사계로 차가운 겨울 폭풍을 관객들에게 보여 주었다면 민준이의 오케스트라는 지금 관객들에게 봄날의 화창함을 선사하고 있었다.
&
“오메… 저것이 무엇이당가…”
대회 최고령 악단인 실버벨의 단원들은 자신들과 상반 되는 최연소 악단 리틀 스타의 공연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허헛~ 이것 참.”
실버 벨의 수장이었던 바이올린 솔로 연주자. 권영삼은 자신의 손주뻘 되는 아이들의 공연에 기가 차는지 큰소리로 껄껄 웃어대었다.
“이봐 권씨. 지금 웃음이 나오나? 시방 우승이 코앞에서 물거품 되게 생겼는디?”
“김씨. 뭘 그리 성을 내나. 우리가 뭐 우승하려고 여기 나왔나? 오래전 은퇴한 하릴없는 노인들끼리 친목이나 다지려고 만든 악단인데, 우연히 아마추어 대회가 열린다 길래 나와 본거지.”
“아이고~ 상금 타면 우리 손자 파워 레인저인가 뭔가 장난감 하나 사줄랬더니, 싹 털리게 생겼네.”
“자네 노인정에서 내기 장기만 관둬도 그거 10개는 사줄걸?”
“시꾸랏!! 이 영감태기가 무슨 망말을 하는겨?”
“허허허~ 그래도 좋지 않나? 나는 마치 우리 손주들이 연주하는 것 같아서 보기만 좋구먼.”
“뭐 그거야 나도 그렇긴 하지만..”
혀를 차며 무대를 지켜보는 노인들은 저마다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 무대 위에선 7번 교향곡의 1악장을 마친 아이들의 연주가 곧바로 4악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경쾌함이 특색인 4악장은 거의 모든 악기가 쉴틈 없이 빠르게 치고나가야 했기에 굉장한 체력이 필요로 했다.
‘하아.. 하아.. 아이고 죽겠네….’
트럼펫 연주자인 승우를 비롯해 목관 악기 연주자들은 아까부터 목이 바싹 말랐지만,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
7번 교향곡 4악장의 길이는 약 8분. 힘들어도 버텨야만 했다.
왜냐하면 자신들만 힘든 게 아니었으니까.
이번 4악장은 목관도 목관이었지만, 바이올린을 비롯한 현악기들이 중심이었기에 모두의 이마엔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었다.
반년 전만 해도 7번 교향곡의 1악장만으로 모두가 곧 죽을 표정을 지었던 것에 비하면 모두 체력적으로도 많이 성장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지휘자 단상에 올라와 있는 차민준.
마치 온몸으로 노래하듯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아이의 두 팔은 오케스트라 전체를 어우르면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보통 집중력이 아니야….’
무대를 지켜보던 선배 기자는 아까부터 지휘 중인 아이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1악장의 연주 시간만 해도 약 14분에 달한다. 거기다 4악장의 8분 연주까지 20분이 넘도록 저렇게 격렬한 연출이라니, 보통 아이라면 탈진하고 남겠지만 아이의 손끝은 여전히 절묘한 타이밍으로 연주자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이윽고 4악장의 절정 부분에서 아이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고 있다는 것을 관객들도 알아차린 것일까?
무대를 지켜보던 몇몇 사람들의 눈가엔 촉촉하게 눈물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딴!! 다다란!! 다다단!!
“브라보오!!!”
“와아!!!”
“멋지다. 최고였어~!!”
음악이 끝나자마자 쏟아지는 박수소리에 민준이는 뒤로 돌아 관객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객석 맨 앞줄 끝 쪽에서 오 선생님과 함께 앉아있던 민준이의 할머니는 새하얀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눈물을 뚝뚝 흘리고 계셨다.
“하아… 하아..”
잠시 양팔을 무릎에 댄 채로 숨을 몰아 쉬는 민준이에게 안나가 말을 걸어 왔다.
“너.. 괜찮아?”
“응. 괜찮아. 관객들 앞이라 조금 힘이 들어갔었나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주춤거리는 민준이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것은 비단 안나만이 아니였다. 욱신거리는 팔을 주무르던 진아와 소희도, 목이 말라 생수를 마시던 승우도,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모두가 민준이가 얼마나 힘들어 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잠시 긴 호흡으로 숨을 가다듬은 민준이가 천천히 허리를 세우자, 마지막 곡을 위해 모두 자신의 악기를 손에 쥐었다.
“물이라도 한 모금 마셔. 그러다 탈진하겠다.”
“고마워 누나.”
민준이는 안나가 건네주는 생수를 조금씩 번갈아 삼키던 중. 불현 듯 떠오른 수위 할아버지의 말에 서둘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안나 누나가 아니었으면 깜박할 뻔했네.’
민준이가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든 것은 조그만 반지였다.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시작하지 전에 이걸 손가락에 끼고 지휘 하거라.]
대회에 나가기 전 수위 할아버지에게 받은 선물..
조그만 손바닥 위에 올려둔 반지를 바라보며 민준이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이후에 할아버지는 별다른 말이 없으셨다. 단지…
[그리운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야.]
라고만 하셨을 뿐.
그런 할아버지의 말씀에 잔뜩 기대하며 오른손 중지에 반지를 끼웠지만, 딱히 무슨 일이 벌어지진 않았다.
“뭐야. 아무 일도 안 일어나네.”
그래도 자신의 손가락에 꼭 맞게 조여 오는 감각이 나쁘지 않았던 민준이는 스코어에 위에 올려져있던 자신의 지휘봉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어린 민준이의 눈앞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
1824년 5월 7일.
봄날의 산뜻한 밤공기가 기분 좋게 불어오는 비엔나의 밤거리.
화려한 귀족들의 마차가 슈테판 대성당 앞에 차례차례 멈춰서고 있었다.
오늘은 현재 비엔나를 대표하는 위대한 작곡가중 한명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제 9번 교향곡 초연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아이고, 주인님. 대체 그 몸으로 어떻게 지휘를 하신다고 그러세요?”
이제는 완전히 멀어버린 청력으로 인해 하인 한스는 새하얀 백지 위에 휘갈기듯 글씨를 써서 베토벤에게 보였다.
50이 훌쩍 넘은 백발의 베토벤은 자신과 비슷하게 늙은 한스의 어깨를 다독이며 작은 케이스에서 지휘봉을 꺼내들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얼마든지 지휘 할 수 있어. 30년에 걸쳐서 만들어낸 곡이야. 오직 나만이 지휘할 수 있지.”
“그러지 말고 그냥 대리인에게 맡기시는 게…”
거의 빛의 속도로 글씨를 써내려가는 한스의 손놀림을 바라보던 베토벤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리인이라. 뭐 그 녀석이라도 내 곁에 남아 있었더라면 맡겨 볼텐데 말이지.”
“설마 민준이… 말씀인가요?”
“그래. 그 이름도 오랜만에 듣는군. 빌어먹을 꼬맹이 녀석. 어디라도 갔으면 살았는지 죽었는지. 편지라도 한 통 해야 할 거 아냐. 안 그래?”
“그, 그렇죠.”
“후우… 벌써 9번째 교향곡인데도 초연은 항상 떨리는군.”
“정말 지휘를 하시려는 겁니까?”
“자꾸 두 번 세 번 말하게 하지 말게. 자네도 이제 나랑 같이 늙어가는 처지 아닌가. 입을 여는 것도 힘들다고.”
‘저는 글씨 쓰느라 손가락이 뽑혀나갈 지경입니다만….’
여전히 꿍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스에게 베토벤이 입을 열었다.
“아 참. 거기 책상 위에 반지 좀 주겠나? 깜박 할 뻔했군.”
“아, 네. 여기 있습니다.”
한스에게서 반지를 건네받은 베토벤은 자신의 오른손 중지에 검은색 반지를 끼워 넣었다.
살짝 손가락을 조이는 듯한 감각이 나쁘지 않았다.
“그럼 가볼까?”
“어휴.. 진짜 교황님 앞에서 공연 망치시면 어쩌시려고 저러실까…”
베토벤의 뒤를 따르는 한스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자신의 교향곡을 3악장까지 훌륭하게 지휘해낸 베토벤의 모습에 한스는 벌어진 입을 다 물줄을 몰랐다.
‘아니, 대체. 귀가 들리는 거야. 안 들리는 거야.’
자신의 스승의 초연을 위해 성당에 방문한 수잔 역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그의 모습에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3악장까지 지휘를 마치고 잠시 거침 숨을 몰아쉬던 베토벤의 시선이 수잔과 마주치자, 그는 초연한 표정으로 빙긋 웃어보였다.
‘오랜만이군. 꼬마 아가씨. 아~ 잠깐 이제는 꼬마가 아니던가? 나도 많이 늙었군.’
성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눈시울을 붉히는 수잔의 모습에 베토벤은 마지막 4악장을 위해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
‘그나저나 이번 4악장이 가장 까다로운 부분이긴 한데, 이를 어쩌나….’
이제 곧 연주를 시작 해야 하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이번 4악장은 진정 음악가로서 자신의 혼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그만큼 미세하고도 날카로운 지휘가 필요했고, 또한 합창이 시작되는 부분이 자칫 엉키기라도 한다면 역사에 길이 남을 개망신으로 기록될 수도 있었다.
‘지금이라도 자존심 그만세우고 대리 지휘자를 부를까? 솔직히 여기까지 했으면 됐잖아. 50먹은 늙다리 작곡가가 이만큼까지 했으면 됐지 뭐.’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은 그가 다시 고개를 든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한 아이의 모습에 두 눈이 부릅떠졌다.
26년 전 자신을 떠나 모습을 감추었던 아이가 그 모습 그대로 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손에 지휘봉을 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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