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75화 (75/177)

[75] Ep.11 : 오케스트라 대회에서 생긴 일. (2)

“내년에 민준이가 떠날 때에도 모두 그렇게 웃으면서 보내줬으면 좋겠다…”

며칠 전 송 실장에게서 미리 이야기를 듣게 된 오 선생은 방과 후 민준이를 따로 불러 상담을 나눈 적이 있었다.

“친구들한테는 아직 말 안했니?”

“아직이요. 대회가 끝나고 나면 그때 하려고요.”

“설마 오케스트라 연습에 지장이 있을까봐?”

오 선생은 자신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민준이가 참으로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제자들이 모두 돌아간 교실 안에서 오 수정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민준이 참 착하네. 그래도 친구들이 나중에 알면 많이 서운해 하겠다.”

“그러겠죠…?”

“내년에도 너랑 같은 반 되고 싶어 하는 아이도 있었는데.”

“정말요? 그게 누군데요?”

“음~ 그건 비밀. 그 아이랑 아무한테도 말 안하기로 약속했거든.”

“치~ 그러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마시지. 괜히 더 궁금하게…”

“그랬나? 아이구, 우리 민준이가 선생님보다 생각이 깊네?”

올해 민준이를 만나 함께 해온 순간들을 떠올리면 어느새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오를 만큼 그녀에게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내년에도 아니 그 후에도 이 천재 소년이 커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싶은 게 오 선생의 작은 소망이기도 했다.

하지만 민준이는 마치 ‘미운 오리새끼’라는 안데르센의 동화처럼 더 이상은 오리들과 함께 할 수 없는 백조가 되어 가고 있었다.

정옥분 선생에게 갖은 구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버텨내 스스로 기회를 얻어낸 민준이의 모습이 여느 어른들보다 훌륭해 보이기까지 했다.

“우리 민준이라면 그곳에 가서도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선생님은 그렇게 믿어.”

“실은 저도 내년에 5학년이 되면 선생님께서 또 담임이 되어 주셨으면 하고 바랬던 적이 있어요.”

“정말?”

“네. 아마 발터 뮐러 선생님을 따라 오스트리아에 가도 선생님 생각이 많이 날거 같아요.”

“그럼 자주 편지라도 해.”

“네. 꼭 그럴게요.”

&

YMCA가 주관하는 오케스트라 대회는 아이들이 방학식을 치르고 난 주말에 열렸다.

예선이라고 할 수 있는 출전자격시험은 이미 한 달 전에 통과했기에 이제 최종적으로 본 대회만을 앞두고 있었다.

빠듯한 해외 공연 일정 속에서 겨우 시간을 빼낸 발터 뮐러는 대회가 열리는 당일 아침에서야 김포 국제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발터 뮐러다!!”

“우와아~!!”

입국장에 드러서자마자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카메라 플래쉬 불빛에도 그는 별다른 인터뷰 없이 바쁘다는 말 만 남긴 채 송 실장과 함께 차에 올랐다.

“오랜만이군. 미스터 송.”

“설마 그 지옥 같은 공연 일정을 뚫고 정말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전 반쯤 포기하고 있었거든요.”

“원래 내 직업이 겨울에 좀 바빠.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 전후로는 아주 끝내주지.”

“그런데도 민준이 공연을 직접 보겠다고 한국 내한 공연까지 직접 잡으신 건가요? 제자 사랑이 이토록 깊으신  줄은 몰랐네.”

“흥. 단지 내 눈과 귀로 직접 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러자 송실장은 발터 뮐러의 말에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 실망하진 않으실 겁니다.”

“당연히 먼 길 온 보람이 있어야겠지. 도착하면 깨워주게. 나는 잠시 눈 좀 붙일 테니.”

공항에 모여 있던 수많은 기자들은 인터뷰 조차 없이 공항을 떠나는 그의 차량을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아니,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어딜 저렇게 급히 가는 거지?”

“아마도 호텔은 아닌 것 같은데..”

“한번 따라 가볼까?”

“뭐? 정말?”

“궁금하잖아. 세계적인 거장이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저렇게 서두르는 이유. 어차피 이대로 돌아가 봐야 편집장한테 혼나기 밖에 더하겠어? 인터뷰도 제대로 못 땄는데, 뭘로 기사 쓸 거냐고 길길이 날뛰는 꼴 보느니. 하루 버린 셈치고 한번 따라가 볼란다.”

잡지사 기자들 중 몇몇은 서둘러 차에 올라 송 실장의 차를 쫓기 시작했다.

&

“푸하하~ 야, 송민석. 너 배 좀 어떻게 해 봐. 단추 터지겠다.”

“시, 시끄러. 이상하다. 분명 두 달 전에 샀을 때는 딱 맞았었는데…”

“두 달 사이에 네가 학교 앞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좀 먹었냐? 그러게 뭐 하러 미리 옷을 사.”

“치, 너야 말로 머리 좀 어떻게 해보지? 무스를 얼마나 발랐길래 머리에서 광택이 다 난다.”

“그러게, 승우야. 너 머리가 헬멧 같아.”

“야, 공근상. 너도 그 나비넥타이 완전 웃기거든?”

연서 국민 학교의 대기실에는 서로의 옷차림을 지적하며 놀려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때 대기실 문이 살짝 열리며 어여쁜 옷차림의 대학생 누나가 고개를 내밀며 진아를 찾았다.

“진아야~”

“어? 민하 언니!!”

자신에게 오보에를 가르쳐준 과외 선생님이자, 친한 언니의 등장에 소희와 이야기를 나누던 진아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언니~!!”

“그래. 잘 지냈어?”

2학기에 접어들면서 민하 역시 대학 오케스트라 연습으로 진아를 봐줄 시간이 별로 없었기에 오랜만에 본 제자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민하는 연두색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진아의 모습에 웃으며 진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옷 이쁘네. 어머니가 골라주셨니?”

“네. 언니도 잘 지냈어요?”

“말도 마. 언니가 여기 나오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 엄청난 경쟁을 뚫고 당당하게 오보에 수석을 차지하기까지 정말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지.”

뭔가 장황해 보이는 그녀의 화법에 진아는 이대로 민하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시작하면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릴 것 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언니네는 몇 번째 차례에요?”

“우리 대학은 2번째. 너흰 몇 번째니?”

“우리는 가장 마지막이에요.”

“아, 그래? 좋겠다. 우리도 마지막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떨려..”

“저는 차라리 첫 번째였으면 좋겠어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배부른 소리 한다.”

“언니 공연 잘 볼게요. 화이팅~!!”

“그래 나도 잠깐 얼굴이나 보려고 들린 거니까. 민준이는 잘 있지?”

“지금 지휘자실에 있어요.”

“오올… 그래도 지휘자랍시고 폼 좀 잡나본데?”

“누가 아니래요~”

진아는 반대편 쪽에 보이는 지휘자용 대기실을 바라보며 빼꼼 혀를 내밀었다.

그러자 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고, 지휘자용 악보를 챙겨 든 민준이가 대기실에서 나왔다.

“헉!!”

“어? 진아야. 민하 누나?”

“민하 누나? 라는 그 의문이 가득 담긴 말투는 뭐지?”

“아, 맞네. 화장이 너무 진해서 못 알아볼 뻔했어요.”

“뭐!? 요게 어리다고 오냐 오냐 해줬더니~!! 뭐? 빨리 예쁘다고 말 못해?”

민하가 민준이의 두 볼을 꼬집은 채 주욱 늘리자, 어린 아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예어요. 징자 예어요~!!” (예뻐요. 진짜 예뻐요~!!)

그때 그들의 등 뒤에서 석 교수의 한심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하야. 그렇게 아이를 협박해서라도 예쁘단 소리를 듣고 싶니?”

“헉. 교수님. 아뇨. 이건 그냥 민준이가 너무 귀여워서.”

“그래? 음… 두 번만 더 귀여워했다만 민준이 볼이 양쪽으로 떨어져 나가겠던데?”

“에이, 교수님 설마 제가…”

“긴장 풀렸으면 그만 대기실에 가 봐. 동혁이가 아까부터 찾더라.”

“정말요? 얘들아. 언니 먼저 가볼게.”

J음대 대기실을 향해 민하가 후다닥 달려 나가자, 민준이는 아직도 얼얼한지 자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머릿속에서 정리는 다 끝냈냐?”

아이의 손에 들려진 악보를 바라보며 석 교수가 묻자, 민준이는 제법 자신 여유 있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 어떻게든 끝난 것 같아요.”

“본 공연 기대하마.”

“교수님네 공연도 기대할게요.”

그때 복도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알람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제 1회. YMCA 주최 오케스트라 대회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티켓을 소지하고 계신 관람객 여러분은 자리에 착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안내 말씀 드립니다. 잠시 후…”

대회 시작을 알리는 스피커 소리에 주위에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년을 넘게 준비한 오케스트라 대회를 향한 노력이 이제 곧 시험대에 오를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

방금 전까지 시끄럽게 떠들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첫 공연을 감상한 후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와아…”

“할아버지, 할머니들. 진짜 잘한다.”

공연의 첫 번째 문을 연 것은 제법 나이가 지긋하신 어른들의 공연이었다.

대부분 시향에서 은퇴하거나 오랫동안 악기를 다룬 사람들의 모임으로 이루어진 첫 번째 오케스트라의 악단 이름은 ‘실버 벨’ 사회자가 소개를 마치자, 객석에서 약간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바이올린 솔로를 동반한 리베르 탱고가 울려 퍼지자, 그 누구도 더 이상 웃음소리를 내지 못했다.

약 20명 정도로 구성된 작은 오케스트라는 금관이나 목관은 최소한으로 두고 대부분 현악기쪽에 치중되어 있었다.

스페인의 정열을 가득담은 탱고의 오케스트라 반주 속에서 무대 위에 홀로 선 노신사의 바이올린이 그 선율을 더하자 객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 모두 숨죽인 채 공연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객원 대부분이 연세가 좀 있는 터라, 조금 느긋한 탱고 연주를 예상했지만 생각과는 달리 아주 경쾌하게 치고 나가는 탱고의 선율은 사람들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기에 너무나도 충분했다.

“이거… 첫 상대부터 쉽지가 않겠는데?”

객석에서 오 교수와 함께 무대를 지켜보던 석 교수는 어르신들의 수준 높은 공연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바이올린 솔로의 독주 부분에서는 목덜미에 소름이 잡힐 정도로 감각적인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오랜 세월 바이올린과 함께해온 그분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스킬이 아닐 수 없었다.

민준이가 이끄는 아이들의 오케스트라만으로도 아슬아슬한데 이런 훌륭한 복병까지 숨어 있을 줄이야…

그때 석 교수의 옆 자리로 송 실장과 함께 발터 뮐러가 모습을 드러냈다.

놀란 마음에 비명이 나오려던 입을 겨우 손으로 틀어막은 석 교수는 그저 고개를 꾸벅이며 그에게 인사를 전했다.

“첫 공연이군요.”

“다행히 늦지 않았군.”

어둠 속에서 객석에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은 흐뭇한 표정으로 무대를 지켜보았다.

“리베르 탱고라. 첫 곡부터 선곡이 화려하군. 아주 신선해.”

발터 뮐러는 무대 위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단원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

한편 송 실장의 차량을 끝까지 쫓는데 성공한 잡지사 기자 몇몇이 주차장에 차를 대고 모습을 드러냈다.

공연장으로 향하기 전 담배를 꺼내 문 선배 기자는 쌀쌀한 날씨에 몸을 움츠리며 입을 열었다.

“뭐야 여긴? YMCA 잖아?”

“아, 그러고 보니 여기서 오늘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대회가 있다고 하던데요? 우리 잡지사 기자 몇 명도 오늘 여기 취재 나갔거든요.”

“으잉? 거장 발터 뮐러가 한국에서 열리는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대회에 참석하다니. 이게 무슨 일이지?”

“글쎄요. 저도 잘은 모르겠는데..”

“일단 마에스트로가 여기 있는 것은 확실하니 한 번 들어가 볼까?”

“날씨도 추운데, 어서 들어가서 몸 좀 녹이죠.”

잠시 후. 1층 로비로 들어오자마자 귓가에 울려 퍼지는 리베르 탱고의 선율에 선배 기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이, 오늘 여기서 열리는 공연 정말 아마추어 대회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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