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Ep.10 : 쇼팽 or 베토벤. (3)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제5번 봄.
자신의 바이올린을 턱 끝에 고정시킨 발터 뮐러는 어린 피아니스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So starten.” (시작하지.)
바이올린 위에 활을 걸친 발터 뮐러의 목소리는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연습실에서 아이들을 위해 지휘봉을 잡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발터 뮐러는 고개를 끄덕인 아이의 작은 어깨에 살짝 힘이 들어간 그 순간.
손에 쥔 활대를 비스듬히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키이이잉~!!
단~ 다라라라란~
‘봄의 소나타’ 라고도 불리우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 5번은 곡에 붙인 별명처럼 봄의 싱그러움을 가득 품고 있었다.
마치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서로를 향해 노래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이 곡은 easy listening. 즉 듣기 편한 곡 중에서도 항상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베토벤의 대표곡 중에 하나였다.
반복해서 울리는 바이올린의 주제음을 피아노가 잔잔하게 받쳐주자, 두 사람의 협주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가에 어느새 환한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와아. 저 노신사분 굉장히 멋지다.”
“꼬마 아이와 할아버지의 협주라니, 너무 보기 좋지 않아? 꼭 손자랑 함께 연주하는 것 같잖아.”
“정말 그러네? 호호호.”
“저기 아주머니들. 죄송한데, 목소리 좀 조금만 낮춰 주세요. 연주에 방해 되지 않게…”
하지만 발터 뮐러가 연주하는 중후한 선율에 맞춰 건반을 두드리는 민준이에게는 사실 주변 사람들의 소음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도전이 가져다주는 독특한 감각에 민준이의 입가에는 어느새 살짝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것이 협주라는 것이구나.’
건반을 두드리면 기다렸다는 듯이 치고 들어오는 바이올린의 정확한 타이밍에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민준이가 누군가와 협주를 해본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1798년의 과거 속에서 귀족의 영애인 수잔과 함께 모차르트의 2대의 피아노를 이용한 협주곡을 쳐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 민준이의 역할을 정확히 따진다면 수잔의 서포트 역이라 할 수 있었다.
그때의 자신이 수잔의 피아노를 더욱 돋보이게 해야 하는 존재였다면, 지금 발터 뮐러와의 협연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마에스트로의 바이올린 선율은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었다가도, 어느 순간 총총히 앞장서서 자신을 이끌어주기도 하였다.
‘재밌다. 정말 재밌어.’
그렇게 앞서거니, 뒷서거니 발터 뮐러와의 협주에 빠져든 민준이의 피아노는 점점 무아지경에 빠져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발터 뮐러도 마찬가지였다.
‘이 녀석 좀 보게…?’
자신의 바이올린에 조금도 기죽지 않고 바싹 쫓아오는 민준이의 실력이 제법 대견하게 느껴진 것이다.
베토벤은 생전 총 10개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발표하였는데, 사실 모든 곡들마다 상당한 바이올린 기교를 필요로 했기에 가정에서 가볍게 연주를 하던 사람들은 어렵기 만 한 그의 소나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따라서 초기 그의 작품은 별 유명세를 타지 못했지만, 그래도 5번 만큼은 발표와 동시에 대중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렇게 초여름 날에 레스토랑에서 울려 퍼진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성을 전해주고 있었지만, 그와 비교되게 레스토랑 밖은 발걸음을 멈춰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냥 돈을 드릴테니, 안에 좀 들어가게 해주세요.”
“네? 그건 안 됩니다. 고객님. 안에 식사하시는 손님들에게 방해가 되기도 하고…”
“저기 안에 보니 자리도 비어 있는 것 같은데, 저기에 좀 앉으면 안돼요?”
“그건 이미 예약이 된 자리인지라…”
아주 가끔 음악에는 묘한 끌림이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평소 자주 거니던 길에서…
평소 자주 듣던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자신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힘…
유난히 귓가에 파고드는 그런 때가 누구나 한 번 쯤은 있을 것이다.
민준이와 발터 뮐러가 함께 만들어 가고 있는 봄의 소나타는 분명히 그 힘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레스토랑 지점장은 현재 굉장히 난처한 상황에 몰려 있었다.
어느 순간 하나 둘 입구에 모여든 사람들이 호기심을 불러와 사람을 모으고, 그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을 모으는 기묘한 행태가 몇 번 반복하자, 레스토랑 앞에는 어느새 스무명 정도의 사람들이 몰려들어있었다.
사실 레스토랑 안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자는 송 실장의 제의가 처음 들어왔을 때.
점장은 별로 탐탁치가 않았다.
피아노를 둘만한 자리를 따로 빼고 나면 테이블들의 배치도 다시 신경만 써야했고, 홀 직원들의 동선에도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클래식 음악쯤이야. 지금도 실내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식사를 즐기는 손님들 중에서 음악에 신경 쓰는 이는 여태까지 단 한 사람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 실장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는 이유가 딱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매출이었다.
백화점에서 운영하는 고급 레스토랑인 만큼 넓은 공간을 비롯해 내부 인테리어와 산지에서 신선한 식자재를 들여 오긴 했지만, 그런 노력에 비해 레스토랑을 이용하는 손님 수가 턱없이 적었다.
직원들의 인건비와 재료값. 거기다 백화점 입점 수수료까지 떼고 나면 매달 적자를 면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송 현우도 이미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홍보실 실장이기 이전에 백화점 운영에도 어느 정도 신경을 써야 만하는 그로서 백화점을 대표하는 고급 레스토랑이 오픈한지 얼마 되지 않아 무너지는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 않은 풍경이었다.
그런 시기에 민준이의 피아노를 다시 듣고 싶어 하는 고객들의 요청은 굉장히 적절한 타이밍에 내려온 한줄기 빛이었다.
일단 밑져야 본전이겠더니 하고 민준이를 받아들인 그는 리허설 겸 연주한 아이의 피아노 실력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건반 하나 하나의 움직임에 즉각 반응하는 피아노 현의 맑은 소리는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난잡한 소리는 질이 달랐기 때문이다.
마치 굳어진 손가락을 풀어헤치듯 빠르게 건반을 내려치는 아이의 연주에 얼마 남지도 않은 그의 머릿카락이 쭈뼛 세워지는 기분.
그 소름 끼치는 기분을 지금 레스토랑 안에 있는 사람들 역시 느끼고 있었다.
약 10분간 이어지는 두 사람의 협주 속에서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은 분명 마음속으로 제 각각의 ‘봄’을 만끽하고 있었으니까…
이윽고 함께 절정에 오른 두 사람의 연주가 서로 엉키며 종반에 다다르자, 사람들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바이올린을 연주한 발터 뮐러 역시 무엇보다 상쾌한 기분에 휩쓸려 끝맺음 부분에는 화려하게 활대를 높이 들어 올리는 퍼포먼스까지 취하자 테이블에서 엄청난 박수가 들려왔다.
“멋져요~”
“브라보오~!!”
민준이는 발터 뮐러와의 연주를 마치고 나서야, 주변 소리가 서서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쇼팽의 녹턴과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까지 약 20분 정도 이어진 연주에 아이의 체력은 금세 녹초가 되었다.
“하아.. 하아…”
보통 자신의 피아노를 연주했다면 이정도로 지치진 않았을 텐데.
발터 뮐러와의 협연에 자신도 모르게 그의 선율을 쫓기 위해 무리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힘드냐?”
“네? 아, 네…”
“무리도 아니지. 내 바이올린에 이토록 충실히 따라온 녀석이… 어디보자.. 둘, 셋, 넷… 네가 한 아홉 번째 정도 되겠구나.”
“그렇게나 많아요?”
그러자 발터 뮐러는 아이의 물음에 빙긋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첫 협주에 이렇게 끈질기에 따라온 녀석은 네가 처음이구나.”
발터 뮐러는 진심을 담아 이야기 했지만, 민준이의 생각은 달랐다.
그의 바이올린은 마치 음악이라는 숲속을 거니는 것처럼 자신을 뒤에서 받쳐주기도 하고 때로는 멀리서 기다려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까?
함께 숲을 빠져 나왔지만, 거친 숨을 몰아 쉬는 자신에 비해 마에스트로의 표정은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이로서 너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구나.”
“네? 뭐가요?”
“너의 피아노 성향 말이다.”
‘나의 피아노 성향?’
고개를 갸웃 거리는 민준이를 뒤로 한 채 케이스에 자신의 바이올린을 집어넣은 발터 뮐러는 낡은 가방을 들고 송 실장이 기다리는 테이블로 돌아왔다.
“훌륭한 연주였습니다.”
“후우… 말도 마. 뒤쳐지지 않으려고 진땀 뺐군.”
“그런 것 치고는 목소리가 너무 평온하신데요?”
“일부러 그런 척 하는 거야. 어린 제자한테 당황스러운 표정을 보일 순 없잖아.”
“네…?”
평소에도 농담을 좋아하는 그였지만, 음악에서 만큼은 절대로 빈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그를 보아온 송 현우가 장담할 수 있었다.
발터 뮐러는 목이 타는지 유리컵에 담긴 차가운 물을 벌컥 벌컥 삼켰다.
결국 컵에 담긴 물을 모두 비워낸 그는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두며 입을 열었다.
“저 녀석 피아노 배운지 얼마나 됐다고 했지?”
“정식으로 피아노를 친 것은 이제 겨우 석 달 정도 되었을까요?”
“고작 석 달이라고?”
송 현우는 발터 뮐러의 놀란 표정에 내심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휴식을 위해 피아노에서 내려오는 민준이와 눈이 마주친 그는 살짝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때 멀어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발터 뮐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와 전에 본 대학 교수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저 아이와의 협주에서 내가 느낀 솔직한 감상을 털어놔주지.”
“미안한 얘기라뇨…?”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지금의 저 아이에게 쇼팽의 피아노를 치게 하는 것은 무리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디서 어떻게 피아노를 배워왔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내 바이올린을 통해 느낀 것은 그대로 설명 하자면, 거의 베토벤 그 자체였다네.”
“······.”
발터 뮐러가 세계적인 지휘자로 인정받는 것에는 그의 탁월한 지휘 능력도 있었지만, 중부 유럽 오페라, 교향곡 등의 일급해석자라는 평가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하이든을 시작으로 모차르트와 베토벤, 슈베르트와 쇼팽. 라흐마니노프에 이르기까지 클래식과 일생을 함께해온 그의 방대한 지식은 작곡가의 성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해석하는데 특화되어 있었다.
그런 그가 연주를 마치자마자 단숨에 물 한잔을 비워낸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마치 유령이라도 따라 붙은 것 마냥. 저 어린 소년의 손끝에서 느껴진 것은 의심할 것도 없이 베토벤 그 자체였던 것이다.
‘저런 녀석한테 쇼팽 콩쿨에 나가보라고 했다니. 내 귀도 맛이 간 모양이군. 쯧쯧… 그나저나 저 녀석을 이제 어쩐다. 쇼팽의 영혼까지 느끼는 폴란드 심사위원들한테 어중간한 피아노는 먹히지도 않을 테고….’
그러기를 잠시..
어느 정도 머릿속으로 정리를 마친 발터 뮐러는 고개를 돌려 송현우를 바라보았다.
“민준이 나이가 지금 11살이랬나?”
“네. 그렇습니다.”
“흐음. 자네가 준비하는 오케스트라 대회가 올해 말이랬지?”
“네.”
“그 대회가 끝나고나면 민준이를 내가 좀 맡아도 될까?”
“마에스트로께서 직접이요?”
“그럼 저 아이를 언제까지 한국에 데리고 있을 텐가? 재능이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빈에 데려가는 게 낫지 않겠어?”
“물론 그렇긴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도 다음 달 일본에서의 공연이 끝나면 한동안은 바빠질 거야. 대신 이거 하나는 약속하지. 자네가 준비하는 오케스트라 대회에 꼭 참석하겠네. 민준이를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는 그 때가서 다시 이야기 하지.”
송 현우는 민준이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는 발터 뮐러의 제안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분명 민준이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단지 민준이의 할머니에게 어떤식으로 이야기를 꺼내야할지 굉장히 망설여졌다.
그리고…
아주 약간의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
1994년 12월.
YMCA 주최 오케스트라 대회를 일주일 앞둔 어느 날부터 다시 이야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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