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Ep.10 : 쇼팽 or 베토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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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이거 진짜야?”
“뭐가요?”
“오늘 런치 예약자 명단 말이야. 이거 진짜냐고?”
“아, 그거? 저도 혹시나 해서 점장님께 물어보니 정말이라던데요?”
“아니, 아무리 주말에 바쁘다지만, 이 정도면 거의 만석이잖아.”
가까운 친척의 장례를 치르느라 며칠 동안 레스토랑을 비웠던 쉐프는 뜬금없이 내려온 오더에 고개를 갸웃 거렸다.
주방에 복귀 후. 무식할 정도로 냉장고에 채워진 식재료에 혹시나 발주가 잘 못 들어간 게 아닌가 잠시 착각했지만, 예약자 명단을 확인해보니 레스토랑 오픈 이래 최대의 예약자 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일반 손님들은 아예 받지도 못할 정도인데, 누가 오늘 하루 레스토랑을 통째로 전세를 낸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직원들에게 재료 밑 작업 좀 해두라고 했을텐데, 하여튼 우리 점장 게으른 건 알아줘야 해. 이걸 쉐프인 나랑 상담도 없이 오늘 아침 알려주면 어쩌자는 거야. 전화라도 줬어야지.”
“우리나라는 아직 요리사에 대한 대우가 그리 좋지 못 하니까요. 그냥 음식이 저절도 뚝딱 만들어지는 줄 안다니까요. 쉐프님 요리가 얼마나 예술인데, 진짜 억울함이 뼈에 사무칩니다.”
그러자 붉은 스카프를 착용한 쉐프는 자신이 들고 있던 길다란 챱스틱 세워 보조 쉐프의 목구멍을 뚫어버릴 기세로 소리쳤다.
“인마. 사태가 이 지경이면 너라도 나한테 전화를 했어야지. 아오~ 진짜 입에 발린 말만 늘어놓고, 아무튼 정작 중요할 때는 하나도 도움이 안돼요.”
“죄, 죄송합니다.”
“알아들었으면 빨리 주방 애들 다 불러 와. 오늘 오전에는 다들 휴식시간 없다.”
“네!!”
쉐프의 명령에 직원들을 부르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가는 보조 쉐프를 바라보며 혀를 차던 그는 아무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씩씩대며 주방을 나와 홀의 지배인을 찾았다.
“얼씨구? 이건 또 뭐야?”
그는 홀 한가운데 설치된 새하얀 그랜드 피아노의 모습에 기가 차는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며칠 더 자리를 비우면 여기다 음악회라도 하나 차리시겠네. 아니 대체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들이 벌어진 거야?”
아무래도 레스토랑에 무슨 일이 벌어진건지 제대로 따질 생각에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아직 오픈 전임에도 레스토랑 창가에 앉아 와인을 즐기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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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제법 괜찮은 와인이군. 미스터 송. 자네도 한 잔 할 텐가?”
“마에스트로야 손님이지만, 저는 업무 중이거든요.”
“쩝. 아무튼 그 놈의 고집은 꼬맹이 시절부터 여전하구만.”
고급 와인이 담긴 잔을 가볍게 돌리며 투덜거리던 발터 뮐러는 입안에 머금고 있는 와인을 헹구듯 꿀꺽 삼켰다.
사실 이 둘이 처음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그러니까 어린 송 실장이 13살, 발터 뮐러가 41살이 되던 해였다.
당시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제법 인지도를 높혀가던 그에게 로열 필하모니에서 상임 지휘자를 맡아 달라는 제안이 들어온 적이 있었다.
여러 지휘자들의 콘서트 마스터로 선택 되며 지휘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은 있었지만, 막상 자신이 지휘자가 된다고 생각하니 불안한 마음이 일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 할 겸 옛부터 거리의 악사들이 자주 이용했다는 비엔나의 유명한 다리 위에 도착한 그는 잠시 후 자신의 바이올린을 꺼내 들었다.
불어오는 저녁 바람을 맞으며 중년 남자의 바이올린 연주는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하나 둘 멈추게 만들었다.
한 곡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사람들의 커다란 박수 소리가 들려오던 그 때. 사람들 사이에서 걸어 나온 꼬마 아이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동전을 털어 바이올린 케이스에 집어넣는 것이 아닌가?
발터 뮐러는 아이의 행동에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꼬마야. 이 돈 다시 가져가거라.”
“왜요?”
“왜긴? 아저씨는 괜찮으니까 도로 가져가서 사탕이라도 사먹으라는 거지.”
“저도 괜찮은데요? 훌륭한 연주를 들은 대가로 지불한 거니까. 아저씨는 충분히 그럴 자격 있어요.”
“… 꼬맹이. 너 몇 살 이냐?”
“13살이요.”
“허어…”
발터 뮐러는 맹랑한 아이의 답변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이는 시간이 늦었는지 엉덩이에 묻은 흙먼지를 대충 털어내고는 시크하게 돌아서서 제 갈 길을 가버렸다.
그것이 발터 뮐러와 송 현우의 첫 만남이었다.
이 후 몇 달 뒤.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지휘 건을 받아들인 그는 성공적인 첫 연주회를 마치고 돌아선 순간. 객석 맨 앞줄에서 자신을 향해 박수를 보내고 있는 어린 송 현우와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한국이라는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사업을 위해 오스트리아에 온 동양인 가족.
그렇게 송씨 일가와 친분을 맺은 그는 그들이 다시 한국으로 떠날 때까지 오스트리아에서 좋은 인연을 유지하였다.
이 나이 어린 꼬마 녀석은 어릴 때부터 제법 사람을 다룰 줄 알아. 간혹 발터 뮐러를 놀라게 하였는데, 악기를 다루는 것에도 어느 정도 소질이 있어보였지만 딱히 본인이 흥미를 가지진 않았다.
그런 아이가 유일하게 관심을 갖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었다.
몇 해가 더 흘러 현우가 한국으로 떠나기 며칠 전. 간소하게 차린 작별 파티에서 아이가 발터에게 말을 걸었다.
“마에스트로가 지금보다 훨씬 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면 그때 제 부탁 하나만 들어 주세요.”
“부탁이 뭔데?”
“언젠가 제가 어른이 되어서 진짜 어마어마한 실력을 가진 인재를 찾아낸다면 저 좀 도와주세요.”
“뭐…?”
보통 아이였다면 그저 웃어 넘겼겠지만, 그 말이 현우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자 발터 뮐러는 묘한 기대감이 생겨났다.
자세히 설명하기 힘들지만 현우는 어느 정도 사람의 가능성을 판별하는 혜안을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이제 막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는 그를 자신의 인맥으로 사로 잡아두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영특했던 어린 아이는 제법 멋진 모습의 성인으로 자라나 한통의 전화로 자신을 찾았다.
괴물 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는 한 아이를 찾아내서 말이지…
발터 뮐러는 서류를 검토 중인 송현우를 바라보며 마저 와인을 삼켰다.
그때 제법 덩치가 있는 쉐프 복장의 한 남자가 테이블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손님 죄송하지만 저희 레스토랑이 아직 오픈 전입니다만…”
그러자 송 현우는 업무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알고 있어요. 여기 점장님이랑 이야기 된 거니까. 쉐프님은 오후에 예약된 손님들 식사 준비만 잘해주세요.”
그때 홀에서 직원들을 교육 시키던 지점장이 바람 같이 달려와 쉐프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죄송합니다. 실장님. 저희 쉐프가 아직 뭘 몰라서…”
“저는 괜찮으니까. 점장님께서도 하던 일 마저 하세요.”
“아, 네.”
젊은 남자를 향해 깍듯히 고개 숙이는 지배인의 모습에 쉐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저 사람은 누굽니까?”
“자네는 여기 백화점 경영자의 아들도 모르나?”
“네? 저사람이 송 회장님 아들이라구요?”
“그래. 직급은 홍보팀 실장.”
“아니, 그런데 저희 레스토랑엔 아침부터 왜?”
“우리 레스토랑 매출 올려 주려고 일부러 이벤트까지 기획해 오셨단다. 덕분에 다음 달까지 일요일 예약 손님이 전부 찼어.”
“네!? 아니 대체 어떤 기획을 하셨길래…”
그때였다.
출입구에서 젊은 여사원과 함께 국민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오~ 그래. 민준군. 오늘 하루 잘 부탁한다.”
홀에서 어른들을 향해 꾸벅 인사하던 아이는 잠시 후. 창가 쪽에 앉아있던 발터 뮐러와 송 현우를 향해 쪼르르 달려왔다.
“주인공이 도착했군. 그럼 이제 일을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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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야~ 승재 엄마.”
“어머, 여기였구나.”
“레스토랑 분위기 엄청 좋네~”
점심 시간에 다다르자 하나 둘 모여드는 손님들의 목소리가 홀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발터 뮐러와 송 현우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조금 이른 식사를 끝낸 참이었다.
“곧 민준이가 연주를 시작하겠군.”
아침부터 마시던 와인을 홀짝이며 의자에 기대 앉은 발터 뮐러는 테이블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모습에 즐거운 듯 미소를 그렸다.
그때 홀에 울리는 작은 종소리와 함께 민준이가 모습을 드러내자, 테이블 마다 민준이를 바라보며 소근 거리기 시작했다.
“저 아이야?”
“맞아.”
“생각보다 엄청 어리네.”
아이의 연주를 다시 듣기 위해 레스토랑 찾아온 손님들은 아이의 인사에 박수를 보내 주었다. 이윽고 피아노 앞에 앉은 민준이는 잠시 손을 풀고는 천천히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미리 오전에 연습했던 곡을 떠올린 아이는 이윽고 부드럽게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쇼팽 녹턴 op.9 No.2
한국인이 쇼팽의 곡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1, 2위를 꼽으라면 반드시 나오는 곡 중에 하나였다.
민준이의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지자 방금 전까지 테이블 사이에 오가는 대화들로 웅성거렸던 홀 안은 굉장히 고요해졌다.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에 부딪히는 달그락 소리마저 아이의 피아노 소리에 방해가 될까.
식사 중이던 사람들은 잠시 식기를 테이블 위에 내려 두었다.
마치 외국의 고급 레스토랑을 떠올리게 만드는 감미로운 피아노 연주에 레스토랑 주변을 오가던 사람들도 하나 둘 씩 발걸음을 멈추고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기.. 혹시 안에 자리 있나요?”
누군가가 출입구 앞에 서 있는 점장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그는 안타까운 미소와 함께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만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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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준이의 첫 번째 곡이 끝나고 발터 뮐러는 비어 있는 자신의 잔에 와인을 쏟아 부었다.
“으음…”
“뭐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송실장의 물음에 발터 뮐러는 그저 가볍게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그 때와는 조금 느낌이 다르군.’
처음 민준이의 피아노를 들었을 때. 발터 뮐러는 손가락 끝이 저절로 떨려올 정도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분명 베토벤의 재림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신이 들린 듯 피아노를 연주한 아이가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였을 때 그것은 차라리 소름에 가까웠다.
하지만 민준이의 쇼팽을 듣고 있는 지금 발터 뮐러는 오스트리아 영재 스쿨에서 흔히 보아왔던 그 나이 또래의 실력에서 크게 벗어나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잠시 아이의 실력을 착각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민준이는 어쩌면…
모든 피아니스트들에겐 자신과 궁합이 잘 맞아 떨어지는 위인들이 있기 마련이다.
쇼팽을 기가 막히게 치는 사람도 모차르트의 곡은 다소 불안정할 때가 있으니까.
어쩌면 민준이는 베토벤의 피아노에 특화 된 피아니스트 일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잠시 확인을 해봐야겠군.”
“네?”
“여기서 기다리게.”
늙은 마에스트로는 언제부터 준비했었는지 테이블 밑에서 자신의 낡은 바이올린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아침부터 와인을 너무 마신 탓일까?
잠시 머리가 핑 돌긴 했지만,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지금 막 연주를 끝낸 아이의 피아노 앞에 다가가 피아노 선반을 톡톡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이 늙은이와 한 곡 어울려볼까?”
“네…?”
‘어라? 이건 예정에 없었는데?’
당황한 민준이 어쩔줄 몰라하자, 발터 뮐러는 아이의 귓가에 다가가 속삭였다.
“너… 베토벤이 치고 싶어 미치겠지?”
그리고 잠시 후.
바이올린을 꺼내든 발터 뮐러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건네자, 창가에 앉아 있던 송 실장은 못 말린다는 제스쳐로 고개를 흔들며 생각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지금 이게 얼마짜리 공연인지 감이나 잡을 수 있을까?’
세계적인 지휘자이자 바이올리니스트. 발터 뮐러
그리고 이제야 막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천재 피아니스트의 협주가 지금 바로 시작 되려 하고 있었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제5번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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