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Ep.9 : 증명의 시간.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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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은 이게 전부니?”
마지막으로 낡은 밥솥을 차에 실은 남자는 뺨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아이에게 물었다.
“네. 짐이 별로 없죠?”
“거 참. 단촐 해서 좋구나.”
1톤 트럭의 채 절반도 채우지 못한 민준이와 할머니의 살림살이..
안테나가 부러진 조그만 브라운관 TV와 허름한 장롱.
그리고 언제나 할머니와 함께 마주 앉아 식사를 하거나 학교 숙제를 하던 조그만 상.
그 외로 잡다한 식기라던가, 여름을 제외하곤 언제나 포근하게 덮고 자던 두터운 이불 보따리까지..
달동네라 차가 올라올 수 있는 곳까지 한계가 있었기에 짐을 옮기며 높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만 제외하면 이사는 굉장히 수월했다.
다리가 불편하신 할머니를 위해 직접 차를 끌고 온 오 선생은 직접 할머니의 팔짱을 끼고 계단을 내려와 자신의 차에 태웠다.
“할머니도 괜찮으시다 하시니, 이제 출발하면 되겠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민준이 너. 나중에 훌륭한 사람 되면 선생님 꼭 기억해야 돼?”
“네. 나중에 제가 어른이 되면 꼭 TV는 사랑을 싣고에서 꼭 선생님 찾을게요.”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는 것이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지 후다닥 이사 트럭에 오르는 제자를 바라보며 오 선생은 생각했다.
‘음? 잠깐만 저 말은 학교 졸업하면 한동안 나를 안보겠다는 말인가?’
유명한 스타가 나와 TV에서 자신의 스승을 찾는 프로그램은 최근에 굉장히 유명하는 방송 중 하나였다.
어쩌면 민준이 나름대로 자신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한게 아닐까 결론 지은 오 선생은 트럭 운전사에게 주소를 건네준 뒤에 차를 출발 시켰다.
“자~ 그럼 우리도 가볼까?”
가뿐하게 트럭에 오른 운전수가 자신의 옆자리에 타고 있는 꼬마를 바라보며 입을 열자, 아이가 대답했다.
“잠깐만요. 아주 잠시만..”
민준이는 해질녘마다 집을 향해 오르던 계단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을 나간 할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저 계단에 앉아 기다렸던 추억.
커다란 계단을 오르내리며 동네 친구들과 놀았던 기억들..
그 아이들 모두 이 동네를 떠나고, 이제는 자신마저 떠난다고 생각하니, 괜히 가슴이 뭉클해졌다.
기억이란게 생겨났을 때부터 살아오던 정든 집.
민준이는 계단 위에 가리워진 자신의 집 현관을 떠올리다가 이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가요. 아저씨.”
“그래. 때마침 선생님 차도 출발하는 구나.”
탈탈탈~ 부르릉~
오래된 엔진음과 함께 아슬아슬 언덕 위에 대어 놓은 차가 스르륵 밑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파른 경사 덕분에 거의 롤러코스터 느낌으로 골목을 굽이 돌자, 학교 갈 때 사탕을 주시던 아저씨네 구멍가게가 보였다.
“민준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 이삿날이었구나.”
“네. 아저씨. 건강하세요~”
“이거 가져가서 심심할 때 먹어라~”
빼꼼 열린 창문 틈으로 신호등 사탕과 막대 사탕 초콜렛 등을 넣어주신 구멍가게 아저씨는 민준이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가끔은 놀러와라~”
“네~!! 아저씨. 아주머니한테도 항상 고마웠다고 전해주세요~”
장사를 마치고 두부나 콩나물이 남을 때면 집에 가는 민준이 손에 들려주시던 구멍가게 아주머니. 허름하고 가난한 동네였지만, 이웃들 간에 인심만큼은 풍족했던 그런 곳이었다.
가게 앞을 청소 중이던 구멍가게 아저씨는 덜컹거리며 떠나는 트럭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중얼 거렸다.
“이젠 우리 동네도 조용해지겠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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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언덕을 내려와 제법 평탄한 도로를 달리던 트럭은 그리 멀지 않은 주택가에 차를 세웠다.
민준이가 살던 달동네에서 새로 이사한 집까지 차로 걸린 시간은 불과 15분 남짓?
먼저 도착한 오 선생과 할머니가 골목에서 트럭을 기다리자, 잠시 후 으르렁 거리는 엔진 음과 함께 파란색 트럭이 모습을 보였다.
“어머, 오늘 이사 오셨나 봐요?”
근처 슈퍼에서 장을 봐오던 젊은 엄마가 딸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걸어오다가 할머니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때 엄마 옆에서 새빨개진 입술로 스크류바를 돌돌 돌리던 여자 아이는 할머니와 함께 서있는 오 선생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 소리쳤다.
“선생님!?”
“어? 진아야? 너 여기 근처에 사니?”
“아, 네. 엄마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이셔.”
“뭐!? 어머, 얘는 왜 그걸 지금 말해.”
진아 엄마는 입에 물고 있었던 빠삐코를 황급히 숨기며 허리를 숙였다.
“아휴~ 선생님. 안녕하세요. 진아 엄마에요.”
“안녕하세요. 어머니. 오수정이라고 합니다.”
“진아한테서 얘기 들었어요. 전에 담임선생님 퇴직하시고 새로 부임하셨다고, 제가 한 번 학교에 찾아 갔어야했는데..”
“아뇨. 괜찮습니다. 나중에 제가 따로 학생 가정 방문 일에 찾아뵐게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 그게…”
그때 민준이를 태운 트럭이 골목에 멈춰서며 시동이 꺼졌다.
짐을 내리기 위해 운전석에서 내리는 아저씨와 함께 맞은 편 조수석 문이 열리더니 민준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그 모습을 본 진아가 또 한번 놀라며 민준이를 불러세웠다.
“어? 차민준?”
“으잉? 천진아. 네가 여긴 왜?”
“왜긴 왜야. 저기 앞이 우리집이니까 그렇지.”
그랬다. 민준이가 이사 온 주택가 골목은 진아가 살고 있는 집 근처였다.
송 실장에게서 받은 후원금과 대회 상금으로 민준이 할머니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집을 옮기는 일이었다.
할머니의 원래 계획대로라면 민준이가 학교를 입학하기 전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하고 싶었으나, 일을 다니며 타고 다니던 버스가 어느 날 급정거를 하면서 좌석 손잡이에 무릎을 찍혀 크게 다치는 사고가 있었다.
며칠 병원에 다니며 집에서 쉬었으면 그래도 나았겠지만, 당장 먹고 살게 걱정인 할머니는 그 후로도 직장과 달동네 집을 오가며 관절이 더욱 안 좋아졌다.
덕분에 이사를 위해 모아둔 돈과 기초 생활 수급으로 근근히 버텨야만했던 할머니에게 최근 요 며칠은 정말이지 꿈만 같은 날들이었다.
“우리 집은 여기야.”
민준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은 3층으로 이루어진 주택 건물의 반 지하였다.
600짜리 반 지하 전세.
반 지하여도, 제법 넓은 안방과 부엌을 겸한 좁은 거실과 함께 세평 남짓한 작은 방도 하나 포함되어 있었다.
전에 살던 단칸방에 비하면 거의 궁전과도 같은 집이었다.
그중에서도 민준이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한 것은 넓어진 안방도 자신만의 공부방도 아니었다.
바로 화장실이었다.
이제 더 이상 볼일을 보기 위해 연탄 창고를 겸한 공용 화장실을 이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아이에겐 굉장히 신나는 일이었다.
진아는 자신의 집과 불과 두 집 건너인 이곳에 민준이가 이사를 온 것에 대해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굉장히 기뻤다.
“여기는 우리 할머니야.”
“안녕하세요. 민준이랑 같은 반 친구인 천진아입니다.”
“아이구, 예쁘기도 해라. 커서 미스코리아 나가도 되겠네.”
민준이 할머니는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미소 짓는 진아가 손녀딸처럼 예뻐 보였다.
이사를 오자마자 알게 된 이웃과 인사를 하는 동안 민준이네 짐들은 하나 둘씩 바닥으로 내려지고 있었다.
“인사도 좋지만, 골목이 좁아서 이삿짐 빨리 날라야겠는데요?”
“아, 네. 금방 옮길게요.”
워낙에 단촐 한 짐이었기에 크게 옮길 것도 없었다.
냉장고는 워낙에 오래 되어 버리고 왔으니, 무게가 나가는 것이라곤 장롱과 TV 정도 뿐?
장을 봐오던 진아와 진아 엄마까지 덩달아 바닥에 놓인 간단한 물건들을 옮기자 이사는 정말 순식간에 끝이나 버렸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 그리고 아주머니.”
민준이네 할머니 역시 이사를 도와준 진아네와 선생님을 향해 연신 허리를 숙였다.
그 날 저녁.
조금은 어색하기도 한 새집에서 어느 정도 정리를 마친 민준이와 할머니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
안방이 훨씬 더 넓었지만, 이들에겐 전에 살던 단칸방 비슷한 거실이 왠지 더 마음이 편했다.
“민준아.”
“네. 할머니.”
“할미 무릎이 안 좋아서 그동안 고생이 많았제?”
“괜찮아요. 저는 전에 살던 그곳도 별로 불편한게 없었으니까.”
“못난 할미 덕에 어린 네가 고생이 많았구나.”
“에이~ 진짜 괜찮다니깐요.”
“오히려 이 할미가 손주 덕에 이렇게 집다운 집에도 살아보고, 호강하는구나.”
“아, 맞다. 할머니. 전에 왔던 백화점 아저씨가 그러는데, 이제 매달 저희한테 돈을 입금 할 거라고, 할머니 통장을 가져다 달라던데요?”
“내 통장을? 아니, 이렇게 큰 돈까지 주시고 또 돈을 준단 말이야? 아무런 댓가도 없이 계속 받기만 하고 그러면 안 되는디…”
“괜찮아요. 그래서 제가 대신 일을 하기로 했어요.”
“네가 일을 한다고? 어디서?”
“아저씨네 백화점에서요.”
‘아니, 이제 고작 11살짜리 꼬맹이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고….’
‘일’을 하게 되었다는 민준이의 말에 할머니의 미간에 세로 주름이 잡혔다.
괜히 자기 때문에 손자가 고생하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어린 네가 어른들 다니는 백화점에서 무슨 일을 한다는 거여?”
“그게 매일은 아니고, 손님이 몰리는 주말에만 하면 된데요.”
“거기서 허드렛일이라도 하는겨?”
“아, 그게… 10층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피아노를 쳐달라고.”
“으음?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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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들을 위한 피아노 연주요?”
“그래. 그리고 또 한 가지 조건이 있단다.”
“그게 뭔데요?”
“이제 베토벤의 피아노는 잊어라. 너는 앞으로 그곳에서 ‘쇼팽’의 피아노만 쳐야해.”
“쇼팽이요?”
뜬금없는 송 실장의 제안에 민준이는 두 눈을 껌뻑였다.
그러자 그의 등 뒤에서 종이컵에 믹스 커피를 마시던 발터 뮐러가 빙긋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방금 전 민준이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들은 그는 한 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였으나, 이제 조금 흥분이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특히나 혼신을 다한 월광 소나타의 3악장에서는 들고 있던 종이컵을 바닥에 떨어 뜨릴 정도로 놀란 그였다.
“아주 훌륭한 피아노였어. 과연 미스터 송이 굳이 멀리 있는 나에게 전화까지 걸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 과연 쇼팽 콩쿨을 노려봐도 될 만 한 실력이야.”
“그래도 저는 걱정입니다. 그 까다로운 폴란드 심사위원들이 동양인 꼬마에게 후한 점수를 줄는지..”
“그거야 해보지 않고선 모르지. 쇼팽의 피아노는 굉장히 여린 피아노야. 지금의 꼬맹이 실력으로 쇼팽의 여린 감성을 담아내기엔 너무나 부족해. 하지만 아직 우리에게 시간은 남아 있어. 그때까지는 무조건 쇼팽의 피아노를 쳐야만 해.”
두 어른의 대화를 좌우로 살피던 민준이는 커다란 의자 위에서 고개를 갸웃 거리며 혼잣말을 중얼 거렸다.
“아직 베토벤 선생님과 제대로 된 화해도 못했는데, 일단 할아버지를 먼저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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