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68화 (68/177)

[68] Ep.9 : 증명의 시간. (6)

“아주 잘했어…”

발터 뮐러의 입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말은 서툰 발음이긴 했지만 분명히 ‘한국어’였다.

잠시 후 그가 지휘봉을 내려놓자마자, 아이들의 입에서는 제 각각 신음소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나의 악기를 다룬 다는 것은 사실 정신뿐만 아니라 체력적으로도 굉장히 힘든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연주자들이 앉아서 악기를 연주한다고, 편할 거라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큰 오산이다.

특히나 방금 전 합주 같은 경우에는 힘들다고 혼자 연주를 중단할 수도 없기에 힘들어도 이를 악물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또래 중에서 폐활량만큼은 자신있어하던 승우마저도 거친 숨을 몰아쉬며 헉헉대고 있었다.

‘얼굴 터지는 줄 알았네….’

혀끝과 볼 안쪽이 불에 데인 것처럼 얼얼하다.

그저 가끔 아버지를 따라 약수터에 오르면 새벽 공기를 맞으며 불었던 트럼펫과는 차원이 달랐다. 조금이라도 숨이 차 뒤쳐진다 싶으면 어김없이 발터 뮐러의 지휘봉 끝이 자신을 가리켰으니까.

솔직히 틀린 부분도 많았다.

따라서 완벽한 연주는 아니었다.

하지만 발터 뮐러는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케스트라를 처음 해보는 아이들에게 처음부터 완벽한 합주는 바라지도 않았던 것처럼…

곧이어 지휘자 단상에서 내려온 발터 뮐러는 자신을 바라보는 민준이를 향해 빙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지휘란 이렇게 하는 것이란다.”

미스터 송이 극찬할 정도의 영특한 아이라면 자신의 말에 담긴 속뜻을 금세 알 수 있겠지…

발터 뮐러는 그렇게 민준이에게 숙제 하나를 던져 주고는 송 현우와 함께 연습실을 나섰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연습실로 돌아온 송 실장은 자신의 비서 석 혜인과 J 음대의 두 교수. 그리고 오 선생에게 점심 식사를 제의 했다.

“우리가 다 가버리면 아이들은요?”

“조금 있다 저희 홍보팀 직원들이 와서 도시락을 전해줄 거예요. 저희들이 내내 지켜보는 것 보단 아이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마에스트로가 그러더군요.”

그러자 오 선생을 비롯한 두 교수 역시 송 실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제안에 따랐다.

&

“크흐~ 역시 이 맛에 한국에 온다니깐~!!”

발터 뮐러는 보기보다 엄청난 대식가였다.

백화점 근처에 위치 한 대형 음식점인 한우정.

이 곳에 오자마자 그는 어느새 물냉면 두개와 소불고기 3인분을 눈 깜짝 할 새에 먹어 치웠다.

‘내가 발터 뮐러와 함께 신촌에서 불고기를 먹고 있어….’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 꿈만 같은 현실 속에서 석 교수는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냉면을 사발째 들이키고 있는 발터 뮐러를 바라보았다.

“발터 뮐러가 한국의 냉면을 좋아했다니, 이럴수가…”

오 교수 역시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방금 전 아이들에게 보여준 지휘 스킬은 그가 진짜 발터 뮐러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냉면 한 그릇으로 간단히 식사를 마친 송 현우는 티슈로 입 주위를 닦으며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정말 오늘 오전에 도착하신 겁니까? 어제라도 연락 주셨으면 바로 마중 나갔을 텐데.”

“다음 달에 일본에서 초청 공연이 있어 겸사겸사 들린 것뿐이야. 마침 불고기와 냉면 생각도 났고 말이지.”

발터 뮐러는 어느새 깔끔히 비어 있는 자신의 냉면 그릇을 들어 보이며 빙긋 웃었다.

오스트리아의 지휘자들 사이에서도 괴짜로 소문난 그는 거침없는 행동과 날선 발언으로 주변에 적을 많이 두었으나, 실력하나 만큼은 모두가 인정하는 정통파였다.

그런 그가 일본에 초청되기 전, 한국을 방문 한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벌써 신문에 났어도 크게 났을만한 대사건이었는데, 언론에서 이리도 조용하다니…

그때 음식점에 틀어 놓은 TV에서 오후 뉴스가 흘러나왔다.

“다음은 해외 소식입니다. 세계적인 바리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마에스트로 발터 뮐러씨가 내달 일본에서 열리는 초청 공연을 앞두고 현재 행방이 묘연 하다고 합니다. 지난 신년 음악회를 마지막으로 현재 안식절을 맞고 있던 그는 가족들에게 낚시를 간다는 말을 남기고 종적을 감췄는데요. 경찰 조사에서 그는 이미 독일의 한 공항을 이용해 해외로 떠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

“······.”

“저거 날 찾고 있는 뉴스 맞지?”

“저기, 매니저한테는 연락을 안 하고 오셨나 봐요?”

“낚시를 떠나려던 것은 맞아. 단지 가방에 여권이 들어 있었을 뿐이지. 하하하~”

마치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자신의 뉴스를 바라보며 호탕하게 웃는 발터 뮐러를 향해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 둘 그에게로 향했다.

“저기 저 외국인 혹시…?”

“그러게 좀 닮았나?”

“에이 설마. 저런 사람이 신촌에서 냉면을 먹고 있진 않겠지.”

“그, 그렇지?”

TV 속의 사진과 발터 뮐러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 거리는 사람들의 반응에 송현우는 재빨리 웃고 있는 마에스트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으하하~ 어억!!”

“다 드셨으면 가시죠. 선량한 시민 국제 사범 만들지 마시구요.”

“뭘 벌써 들어가려고 그래. 아이들에게도 따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니까!? 아, 맞다. 그리고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그건 꼭 마시고 들어가야지!!”

“또 뭘 드시게요?”

“그거 있잖아. 그거. 환상의 커피!!”

“환상의 커피?”

&

“아~ 좋다. 역시 이 맛이야. 독일에는 왜 이 커피가 없을까? 이 황금 같은 비율이 가져다주는 천국의 맛. 진짜 끝내 주는군…”

냉면에 이어 또 다시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석 교수는 다시 한 번 묘한 기분에 사로 잡혔다.

‘내, 내가 지금 발터 뮐러와 함께 길거리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있어….’

“독일에서 온 마에스트로라는 분. 보기완 달리 굉장히 소박하시네요.”

오수정 선생의 말에 오 교수와 석 교수는 백번 공감하는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자판기 커피 매니아인 발터 뮐러 덕분에 길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게 된 그들은 근처의 공터로 걸음을 옮겼다.

초여름의 오후 햇살이 기분 좋게 내리고 있는 벤치에 발터 뮐러가 엉덩이를 붙이자, 송 실장이 그에게 물었다.

“마에스트로가 보시기에는 어떤가요?”

“뭐가?”

“뭐긴요. 민준이 말입니다.”

그러자 발터 뮐러는 송실장의 질문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뭘 보여줬어야 평가를 하지. 그렇지 않은가?”

“어차피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오시기 전에 이미 어느 정도 파악하신 것 아니었나요?”

“이봐 미스터 송. 나도 신은 아니야. 단 한번 듣고 어떻게 모든 걸 평가 할 수 있겠나? 나는 단지 점심을 먹으러 나오기 전 약간의 힌트를 주었을 뿐이야. 그 아이가 내 충고를 어떻게 받아 들였을지 그 결과가 나는 더 궁금하군.”

“아니, 그 짧은 시간에 힌트를 주셨습니까?”

그러자 발터 뮐러는 종이컵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전해 주었지.”

그 때 옆 벤치에 앉아 있던 오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송 실장에게 다가 왔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실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 교수님께서 저에게요?”

“때마침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마에스트로 발터 뮐러씨께서 한국에 방문 하셨으니, 민준이에게도 좋은 기회가 아닌가 싶기도 해서요.”

“무슨 말씀이신지?”

“지난 피아노 대회 본선에서 민준이의 실력을 보고 석 교수와 상의를 해보았는데, 2년 뒤 민준이를 국제 피아노 콩쿨에 내보낼까 합니다.”

“국제 피아노 콩쿨이라면…”

송 현우는 국제 피아노 콩쿨이라는 단어에 자동으로 떠오르는 대회가 있었다.

“설마?”

“네. 생각 하시는 쇼팽 피아노 콩쿨입니다.”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쿨.

폴란드 출신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프레데릭 쇼팽을 기리기 위해 5년마다 개최되는 국제 피아노 콩쿨.

굉장히 엄격하고 까다로운 심사 기준으로 적절한 대상자가 없을 경우엔 아무리 대회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더라도 1위를 공석으로 두는 권위 있는 피아노 대회 중 하나였다.

아무리 민준이의 실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동양인에게는 함부로 출전 기회조차 주지 않는 그런 곳에서 과연 민준이는 받아 줄지가 의문이었다.

오 교수과 석 교수 역시 그 점을 고려해 내내 고민해왔지만, 오늘 연습실에서 발터 뮐러를 보는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두 교수가 아무리 정성들여 추천서를 낸다고 하더라도 씨알도 먹히지 않겠지만, 추천서의 후견인이 발터 뮐러라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랐다.

그때 대화 내용으로 어느 정도 상황을 유추 했는지 발터 뮐러가 송 현우에게 말했다.

“지금 혹시 쇼팽 콩쿨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건가?”

“네. 맞아요. 아무래도 민준이를 쇼팽 국제 콩쿨에 참가 시킬 생각인가 봅니다.”

“호오.. 재미있군. 한국인 피아니스트가 쇼팽 콩쿨이라니. 민준이가 지금 몇 살이라고 했지?”

“11살. 대회에 참가하는 2년 뒤면 13살이군요.”

“그렇다면 쥬니어 대회로군.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참가 조건이 굉장히 까다로울 텐데?”

“그래서 마에스트로께서 추천서를 써주길 부탁드린다는데요.”

“아~ 그랬군. 뭐 내가 써주는 추천서라면 예선 문고리 하나 정도는 열어 줄 수 있으니까.”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발터 뮐러의 대답에 송 실장이 깜짝 놀라 입을 열었다.

“정말 해주시겠습니까?”

“단 조건이 있어.”

“조건이라면?”

“내 기대를 충족시켜줄 만한 실력을 가졌는지. 한번 지켜봐야겠지. 자~ 그럼 맛있는 커피도 마셨고 어디 아까 내준 숙제를 검사하러 가볼까?”

벤치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그는 공원 쓰레기통에 종이컵을 넣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 어떻게 이야기가 잘 된 건가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민준이의 실력을 직접 확인해본다고는 하는데…”

“결국 민준이 손에 모든 게 달렸군요.”

&

잠시 후. 다시 연습실을 찾은 그들의 귓가에 베토벤 7번 교향곡이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여러 악기의 소리가 하나의 화음을 이루었던 방금 전의 연주와는 다르게 현재 연습실 안에서 들려오는 악기들 소리는 도저히 들어줄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마에스트로의 힌트에도 불구하고 민준이의 오케스트라는 전보다 오히려 퇴보한 느낌이 들었다.

‘민준이는 결국 마에스트로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걸까…?’

오 선생은 안타까운 마음에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그것은 송 실장과 다른 두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한숨을 내쉬며 송 실장이 연습실 문고리에 손을 가져가자, 발터 뮐러는 재빨리 그를 제지하며 검지 손가락을 자신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쉿. 잠시만 기다리게…”

“네?”

“조용히.. 두 눈을 감고 천천히 들어 봐. 이제 곧 기적이 일어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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