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67화 (67/177)

[67] Ep.9 : 증명의 시간. (5)

“민준아… 너?”

“왜 그러세요?”

“언제부터 독일어를 할 수 있었던 거야?”

“네? 아…!!”

그제서야 자신이 발터 뮐러와의 대화에서 독일어를 사용했다는 걸 깨달은 아이는 서둘러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헉. 어쩌지?’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한번 뱉을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어릴 때부터 해외에서 살다온 아이였다면 독일어를 할 줄 아는 것에 별로 놀라지 않겠지만, 민준이의 가정 형편을 생각하면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상황.

그때 발터 뮐러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 녀석 악센트가 왜 저 모양이지? 어릴 적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각나는 말투로군. 너 대체 누구에게서 독일어를 배운 거야?”

“아, 그게…”

당황한 민준이가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몰라 어물거리자, 발터 뮐러는 마치 상관없다는 듯 툭하고 말을 내뱉었다.

“뭐,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알 수 없는 판국에 송 현우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발터 뮐러와 민준이를 번갈아 쳐다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 연습실 문이 또 한 번 삐걱 열리며 J 음대의 두 교수가 안으로 들어왔다.

프로젝트 오케스트라의 연습을 감독하기 위해 찾아온 오 교수와 석 교수는 다소 썰렁한 연습실 분위기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좀 늦었… 컥. 설마 저 사람 발터 뮐러!?”

“뭐? 헉!! 진짜로군. 저 사람이 어떻게 이곳에?”

발터 뮐러.

1939년 오스트리아 출생의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인 그는 중부 유럽의 오페라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유일한 해석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은 일급 지휘자 중 한명이었다.

클래식 세계에선 살아 있는 전설로 취급 받을 만큼 유명하기에 오 교수와 석 교수는 그를 만났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지금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보게 석 교수. 이게 지금 꿈은 아니겠지?”

“아무래도 진짜 같기는 한데, 오늘 아침 신문에 저 사람이 한국에 방문한다는 내용은 단 한 줄도 없었는데? 이럴 수가 있나?”

일류 마에스트로가 뿜어내는 보이지 않는 기운에 눌려서 일까.

두 교수는 섣불리 다가오지도 못하고 근처에서 숙덕이고 있었다.

“미스터 송. 저 사람들은 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저기서 저러고 있는 거야?”

“아마도 마에스트로가 이곳에 있다는 것에 상당히 놀란 모양입니다.”

“그렇지~!! 그래. 바로 이런 반응이라고, 저것이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당연한 반응인데…”

발터 뮐러는 말을 내뱉으며 힐끗 차민준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 녀석은 지휘봉까지 들고 있으면서도 이 나를 모른다 이거지?”

“원래 지휘를 전문으로 배운 학생이 아니에요. 본래는 피아노를 다루던 아이였습니다.”

“호오~ 그래? 그럼 피아노나 칠 것이지. 엄한 지휘봉은 왜 들고 서 있는 거야?”

그러자 송 현우는 마에스트로의 대답에 신음을 흘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마에스트로 당신도 원래는 바이올린 전공이셨잖아요.’

“미스터 송. 너 지금 속으로 나도 한때 바이올린 전공 아니었냐고 흉 봤지?”

“들켰습니까…?”

워낙 독일어 발음의 억양이 드센 편이라 그런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둘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나이 지긋한 발터 뮐러가 송 실장을 혼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한편의 콩트와도 같은 그들의 대화 내용에 그만 민준이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요 버릇없는 녀석. 우리 대화가 그렇게 웃기냐?”

“아하하. 죄송해요. 마에스트로..”

“쳇. 이제야 나에게 제대로 된 호칭을 붙여주는 구나.”

세계적인 마에스트로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연습실 안은 다소 삭막한 분위기가 연출 되었지만, 발터 뮐러는 보기와는 달리 그렇게 딱딱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국어를 잘 할 줄 몰랐기에 송 실장이 대신 아이들에게 발터 뮐러에 대해 소개해주자, 어느 정도 클래식을 알고 있던 아이들 입에서 탄성이 세어 나왔다.

“옳지, 옳지. 그래. 더 놀라도 좋아.”

그때 석 교수가 어줍 잖은 독일어를 사용해 뮐러에게 말을 붙이자. 그는 태연하게 영어를 사용하며 입을 열었다.

“그냥 영어로 말하시오. 독일어 실력이 저기 꼬마보다 형편없군.”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에스트로. 그런데 한국엔 어쩐 일이신가요?”

그러자 발터 뮐러는 한 걸음 물러나 송 실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민준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전에 미스터 송이 내가 관심을 둘만한 재미있는 아이가 한국에 있다고 꼬드기는 바람에 이렇게 넘어 왔지.”

석 교수는 발터 뮐러의 대답에 송 현우 실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세계적인 마에스트로를 단지 그 말 한마디로 여기까지 불러올 수 있다니, 저 사람 대체 인맥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 거야?’

잠시 후. 아이들에게 마에스트로에 대해 짧게 설명을 마친 송 현우는 발터 뮐러를 단상으로 불러 들였다.

흰 머리가 희끗 희끗 내비치는 그는 단상에 오르자 어린 연주자들을 향해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허리를 세우자. 어느새 그의 오른 손에는 마법 같이 지휘봉이 쥐어져 있었다.

“베토벤 심포니. No.7 내 주특기이기도 하지.”

손에 들린 지휘봉을 빙글 돌리며 아이들의 시선을 주목 시킨 그는 옆 자리에 앉아 있는 민준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한 수 가르쳐 주마.”

그 순간. 여태까지 그저 괄괄해 보이기만 했던 발터 뮐러의 표정이 마치 이웃 집 할아버지와 같은 평온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자~ 애들아. 즐거운 음악시간이다.”

그러자 아이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 자신의 악기를 천천히 집어 들었다.

안나 역시 짧게 독일어를 배운 경험이 있었기에 발터의 말에 바이올린을 목 언저리에 가볍게 올렸다.

“네가 이 악단의 콘서트 마스터구나?”

마에스트로의 질문에 안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잘 부탁한다. 아가씨.”

마지막 말과 함께 발터 밀러의 두 팔이 크게 원을 그리며 연주의 시작을 알렸다.

이번에도 역시 소희의 플룻이 오보에의 주제음을 대신했는데, 발터 밀러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정확히 지휘봉 끝으로 소희를 가리켰다.

벌터 뮐러는 민준이 와는 정반대로 왼팔을 크게 휘저으며 현악 파트를 주도하였고, 지휘봉 끝으로는 소희와 끊임없이 눈을 마주치며 그녀를 이끌었다.

소희는 마치 단상에 서 있는 할아버지가 자신을 향해 이렇게 말을 걸어 주는 것만 같았다.

‘좋아. 잘하고 있어. 꼬마 아가씨. 그렇게 나를 따라오면 돼.’

굳이 악보를 볼 필요도 없었다.

발터 뮐러의 지휘봉은 이미 소희의 플룻을 자연스럽게 인도하고 있었으니까.

민준이의 눈에 비친 마에스트로의 지휘는 마치 소희의 플룻에서 음을 끄집어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하나의 선율을 새 하얗고 부드러운 치즈처럼 길게 끌어와 바이올린과 첼로의 음악에 녹여내자, 아이들의 연주는 민준이의 지휘 때와는 달리 서서히 밝은 빛을 띄기 시작했다.

마에스트로는 자신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는 어린 민준이와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너의 그 소극적인 지휘법으로는 아이들을 집중 시킬 수 없어. 네 또래 아이들에겐 그에 걸 맞는 지휘법이 있기 마련이다.”

동시에 다소 과장이 섞인 커다란 몸짓으로 춤을 추듯 두 손을 이용해 현악 파트를 아우르며 오케스트라의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와아…”

당연히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 두 교수조차 얼빠진 표정으로 서로에게 입을 열었다.

“내가 설마 이런 곳에서 발터 뮐러의 지휘를 보게 될 줄이야.”

“저 역시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의 지휘를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오 선생 역시 한눈에 보기에도 차원이 다른 발터 뮐러의 지휘에 점점 가슴이 벅차오르던 그 순간. 그녀 옆에서 친구들을 지켜보던 진아 역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오보에를 움켜 쥐었다.

‘나도 어서 저 아이들과 함께 연주 할 수 있었으면….’

간절한 소망을 담아 상상 속에서라도 아이들과 함께 연주하기 위해 진아는 오보에 리드를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그때였다.

단상 위의 마에스트로의 지휘봉 끝이 단원들이 아닌 진아에게로 향했다.

“아…”

오보에 파트는 이미 민하 언니와 함께 어느 정도 연습은 해 두었다.

단지 자신의 서툰 연주가 오케스트라에 방해가 될 수도 있었기에 망설였을 뿐.

하지만 마에스트로의 지휘봉이 자신을 가리키자, 진아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연습했던 오보에 주제곡을 부르고 있었다.

물론 정확한 템포는 아니었지만, 발터 뮐러는 아주 천천히…

아이가 무리하지 않도록 굉장히 느린 템포를 이용해 새로운 오보에 주제곡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할 수 있어. 꼬마 아가씨.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베토벤 7번 교향곡에 오보에가 빠지면 쓰나? 친구들에게 보여 줘. 네가 할 수 있다는 것을….’

그 순간 진아는 의자에서 일어나 자신의 오보에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것은 정말이지.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평소 진아의 실력을 알고 있었던 민준이와 오 선생은 지휘봉 하나에 실력이 확연히 올라간 진아의 모습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나는 자신이 선물한 오보에를 불고 있는 진아를 마음속으로 응원하며 힘차게 바이올린을 켰다.

‘이제 진아도 함께야….’

오리지널 오보에 파트의 등장에 잠시 플룻을 내려놓았던 소희는 웬일인지 눈물이 날 것 만 같았다.

첫 주제음부터 지휘자 할아버지의 지휘봉과 마주 한 순간. 소희는 어설프게나마 이런 장면을 기대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발터 뮐러의 지휘는 연습실에 앉아 있는 모든 아이들에게 마법 같은 순간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진아의 오보에 파트가 끝나가던 그때. 진아의 연주에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던 민석이를 향해 마에스트로의 지휘봉이 파고 들었다.

“팀파니 뚱땡이. 지금이야!!”

파바바방~!!

독일어였기에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지만, 지휘봉이 자신을 가리키자, 민석이는 재빨리 근상이와 함께 타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모두의 소리가 하나로 뭉치며 클라이막스에 접어 들자, 트럼펫을 불고 있던 승우는 타악기의 신호에 맞춰 길게 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빠암~~

빰빠라밤~!! 빰빠라밤~!!

발터 뮐러는 연습실에 울리는 베토벤 7번 교향곡의 피니쉬를 향해 거대한 몸짓으로 아이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이제 거의 끝까지 왔어.’

오케스트라에 모인 모든 악기가 단 한명도 쉬지 않고 힘차게 연주를 시작하자, 어른들은 하나 둘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젖먹던 힘을 다해 숨을 불어 넣는 금관 파트 아이들은 다들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누구 하나 멈추지 않고 오케스트라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에 질세라 바이올린 수석인 안나 역시 코드를 잡고 있는 손 끝에 감각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지만, 결단코 포기 하지 않았다.

그렇게 힘차게 내뻗은 발터 뮐러의 두 팔이 하늘을 향해 치솟은 그 순간.

베토벤 제7번 교향곡의 모든 연주가 끝이 났다.

그는 잠시 동안 쏟아져 내리는 여운에 두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아주 잘했어.”

발터 뮐러의 입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말은 아주 서툰 발음이긴 했지만 분명히 ‘한국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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