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64화 (64/177)

[64] Ep.9 : 증명의 시간. (2)

* * *

“자, 그럼 두 아이의 피아노 실력을 겨루어 보기 전에 먼저 각자 자기소개를 해보도록 하죠.”

송 현우는 먼저 빨간 나비넥타이가 인상적인 황 진우에게 마이크를 가져다 대었다.

“영지 국민학교 6학년 황진우입니다.”

짧게 자기소개를 마친 진우는 무대에 설치 된 피아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괜찮으면 제가 흰색 피아노를 써도 될까요?”

아이의 물음에 송 현우는 슬쩍 고개를 돌려 민준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민준이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들이 워낙 깔끔한 성격이라 그런지 대체로 화이트 톤을 좋아하더라구요. 오죽하면 빈에서도 별명이 ‘프린스’ 였다니깐요~ 호호.”

송 현우는 객석에서 들려오는 진우 엄마의 목소리에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어딜가나 진우 어머니 같은 학부모는 하나씩 있기 마련이라 그려려니 싶다가도 역시나 직접 만나면 감당하기 힘든 게 사실이었다.

이런 경우엔 그냥 눈앞에서 현실을 깨달게 해주는 것이 가장 속편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송 현우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혹시나 유학파인 진우가 민준이보다 실력이 월등히 뛰어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현우는 민준이에게 물었다.

“차민준군. 6학년 형을 상대해야하는데, 떨리지 않나요?”

“안녕하세요. 연서 국민학교 4학년. 차민준이라고 합니다. 음… 별로 떨리진 않아요.”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해 보였다.

마치 걱정 말라는 듯 오히려 무심해 보이기까지 하는 민준이의 모습에 송 실장은 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살짝 주물러 주었다.

‘부탁한다. 이 곳에 있는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해주렴.’

송 실장의 마음을 전해들은 민준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으응…?”

마치 자신의 생각에 대답이라도 해준 것만 같았던 민준이의 목소리에 송 실장이 깜짝 놀라 바라보자, 민준이는 어색한 표정으로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리곤 후다닥 자신의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를 향해 달려갔다.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지만, 송 실장은 이내 잡생각을 털어 내고 주머니에서 동전 한 개를 꺼내 공중으로 튕겼다.

은빛 동전이 천장의 조명 빛에 잠시 반짝이더니, 이내 송 실장의 손아귀에 돌아가고…

“앞이면 진우 학생이 먼저, 뒷면 민준 학생이 먼저 선을 잡겠습니다.”

그리고 펼쳐 든 동전은 앞면을 가리키고 있었다.

“앞이군요. 진우 학생 준비 되었으면 시작해 주세요.”

“어머, 이거 한 번에 끝나버리면 민준 학생 실력을 볼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데.”

객석에서 들려오는 안타까운 진우 어머니의 목소리에 서서히 다른 학부모들의 인상이 찌푸려지며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나대는 거 같지 않아?”

“누가 아니래. 꼴 보기 싫어 죽겠네.”

“차라리 저 4학년짜리 아이가 확 콧대를 꺾어 줬으면…”

“그래도 유학까지 다녀왔다는데, 힘들지 않을까?”

그때 순백의 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진우가 힐끗 맞은편에 앉은 민준이를 바라보곤 곧장 연주를 시작했다.

첫 스타트로 진우가 선택한 곡은 슈베르트의 악흥의 순간. 3번.

‘러시아의 노래’라고도 불리 우는 이 곡은 2/4 박자의 알레그로 모데라토. (중간 정도의 빠르기)

왼손으로는 단순한 무곡풍의 리듬을 유지하며 오른손으로는 러시아의 정취가 가득 담긴 이 곡은 민준의 실력이 어느 정도 인지 알고 싶었던 진우의 견제와도 같았다.

단조 임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경쾌함이 있어 슈베르트의 악흥의 순간 중에서도 가장 사랑 받는 곡이었는데, 난이도는 솔직히 그리 높지 않았다.

단지 처음 듣는 이에겐 왼손과 오른손 템포의 묘한 뒤틀림을 제대로 캐치해내지 못하면 굉장히 듣기 거북한 연주가 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모든 피아노 소리를 순간적으로 카피해내는 민준이에겐 그런 어설픈 수는 통하지 않았다.

빠른 머리 회전으로 진우의 피아노 소리를 흡수해낸 민준은 곧바로 슈베르트의 악흥의 순간 3번을 템포 하나 놓치지 않고 그대로 따라해 내었다.

아니, 오히려 민준이에겐 지금 이 순간이 굉장한 흥미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거 재밌네?’

누군가의 피아노를 그대로 따라하는 놀이.

그랬다. 어린 소년에게 지금 이 상황은 누군가의 위에 서기 위한 경연이 아닌 한마디로 놀이였던 것이다.

“첫 번째 도전은 통과입니다. 그럼 이번엔 민준군의 차례입니다. 준비 됐으면 시작하세요.”

송 실장의 목소리에 민준이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뭔가를 떠올리다가 이윽고 장난기 어린 미소와 함께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딴딴딴~ 딴딴따단~ 따다다단딴딴따다단~

그 순간 객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표정에 의아함이 스쳤다. 그리고 그것은 맞은편의 진우도 마찬가지였다.

‘자, 잠깐만 이 리듬은…?’

흥겹게 피아노를 연주하는 민준이의 모습에 진우는 황당함에 말문이 막혔다.

그때 객석에 앉아 있던 근상이가 퀴즈라도 맞힌 듯이 신이 나서 소리쳤다.

“아, 이거 슈퍼 마리오 주제가다.”

“음? 슈퍼 마리오?”

그 순간. 객석에 앉아 있던 몇몇 아이들 입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아~ 어디서 들어 보았나 했더니, 진짜 슈퍼 마리오네.”

대체 어떤 클래식 곡이 나올까 잔뜩 긴장했던 이들은 민준이의 황당한 선곡에 벙찐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점차 빨라지며 흥겨운 리듬을 타기 시작하는 민준이의 피아노 솜씨에 객석에 앉은 아이들의 표정이 점차 밝아지기 시작했다.

진우는 그런 민준이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연주를 마치자, 곧바로 슈퍼 마리오 주제곡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참내… 세상에 피아노 경연에서 게임 주제곡이나 치다니, 저 아이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그래도 상대편 아이가 피아노 좀 친다기에 잔뜩 긴장했던 진우 엄마는 자신의 아들을 무시하는 듯한 선곡에 불쾌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게임 주제가를 피아노로 연주해 본 적이 없던 진우는 민준이의 피아노 연주를 떠올리며 가까스로 연주를 마칠 수 있었다.

“첫번째 경연은 둘 다 무승부로 하겠습니다. 그럼 진우군 두 번째 곡을 시작해 주세요.”

예상치 못한 곳에서 허를 찔린 진우는 자신을 놀리는 듯 한 민준이의 선곡에 기분이 언짢아 있었다.

그래서 일까?

진우는 아까와는 달리 이를 악물고 건반을 내리쳤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슈퍼 마리오 주제가로 활기찼던 무대 위에 어두운 전조가 흐르기 시작했다.

격렬하게 떨리듯 건반을 내려치는 곡풍과 함께 등장한 선곡은 슈베르트의 ‘마왕’

괴테의 동명의 시를 바탕으로 슈베르트가 작곡한 이 곡은 제법 난이도가 높은 곡 중에 하나였다.

마치 마왕이 지옥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오듯 불길하게 울려 퍼지는 진우의 피아노에 객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객석 맨 앞줄에 앉아 있던 안나 마저도 팔걸이에 머리를 받힌 채 두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다.

“저 아이 제법인데?”

어디 한번 이것도 따라해 보시지?

약 4분가량의 연주의 마지막 소설 스스로에게도 만족스러운 연주였는지, 후련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진우는 건반 위에 손가락을 크게 튕기며 연주를 마쳤다.

“오오~ 잘한다.”

그 순간 객석에서 누군가의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

물론 그 소리의 주인공은 진우의 어머니였다.

“브라보~ 우리 아들~ 앵콜이야~”

어머니의 호들갑에 여운을 즐기던 사람들의 표정이 가히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 순간 진우 엄마의 말끝을 잘라내듯이 멍하니 앉아 있던 아이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왼손을 내려둔 채로 오른손 만을 이용해 빠르게 건반을 움직이는 민준이의 터치에 안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그렇지…”

순간 번개처럼 내려치는 민준이의 왼손가락이 건반에 닿자, 진우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민준이를 바라보았다.

‘저 녀석. 대체 뭐야…?’

이번 연주만큼은 자신 있었던 진우였지만, 지금 민준이가 들려주고 있는 슈베르트의 마왕은 인정하기 싫을 정도로 거대한 위압감을 전해주고 있었다.

오디션을 본 아이들 중에서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챈 아이들은 민준이의 피아노가 더 낫다는 생각에 부모에게 귓속말을 소곤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민준이는 지금 이 순간이 그저 재미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민준이의 마왕이 끝나자 진우와 마찬가지로 객석에서 탄성과 함께 박수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번엔 민준 군의 차례입니다.”

다시 돌아온 자신의 차례..

민준이는 이번에도 묘한 표정을 지으며 관객들의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미 첫 번째 곡으로 정통 클래식이 아니더라도 괜찮았다는 걸 확인한 민준이는 건너 편에 앉아 있는 진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려운 곡을 치더라도 저 형은 분명 어떻게든 비슷하게나마 따라 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면 솔직히 끝이 없잖아.’

그때였다.

꼬르륵…

점심 때 선생님께서 사다주신 롯X리아 햄버거.

물론 맛은 있었지만, 햄버거 한 개만으로 식사를 떼우기에는 민준이에게 있어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슬슬 배도 고픈데….’

진우와의 경연은 즐거웠지만, 언제까지 연주를 주고받기는 힘들었다.

또한 자신보다 오래 피아노를 쳐온 만큼 왠만한 곡은 전부 쳐낼 수 있을 것이 분명 했으니까..

‘진우형이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한 곡을 쳐야 해.’

그렇게 결론을 지은 민준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건반에 손을 올렸다.

따라다라단~ 따라다라단~ 따라다라따라다라단~

아이가 선택한 곡은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

솔직히 클래식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누구나 한 번 쯤은 들어온 경쾌한 곡풍의 행진곡이었다.

빠르지만 생각보다 단조롭고 쉬운 곡이었던지라, 진우와 안나를 비롯해 피아노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아이들은 민준이의 선곡에 의아함을 느꼈다.

그렇게 모두가 알고 있는 터키 행진곡의 첫 주제음이 끝나고, 다음으로 이어지는 리듬을 기대했던 그 순간. 민준이의 터키 행진곡은 다시 첫 주제음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어라…?”

“자, 잠깐만, 저건 째즈 아니야?”

바싹 마른 입술을 핥으며 얼굴 하나 가득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 송 실장의 입에서 그만 작은 욕설이 흘러 나왔다.

“이런.. 미친..”

그랬다.

민준이는 지금 연주 중인 터키 행진곡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즉석에서 편곡해 버린 것이다.

행진곡이 전해주는 경쾌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사이 사이에 변주를 넣어 굉장히 발랄한 느낌을 전해주는 민준이의 터키 행진곡에 진우의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키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뭐야? 이런 곡은 단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어….’

“와아~ 저 아이 피아노 진짜 잘 친다.”

“말도 안 돼. 경연 중에 즉석에서 곡을 편곡해 버리다니. 저게 가능한가?”

“머릿속에 대체 뭐가 들어 있길래.”

“혹시나 실력에 별 차이가 없으면 나도 한번 도전해보려고 했는데, 나는 포기.”

마치 피아노 건반을 가지고 노는 듯이 경쾌하게 터키 행진곡의 연주를 끝마친 민준이가 이마에 흘러내린 땀방울을 거두며 객석을 바라보자, 잠시동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관객들에게서 엄청난 박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직 경연이 끝나지 않았으니, 모두 조금만 정숙해주세요.”

송 실장의 부탁에 객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조금씩 잦아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모든 박수소리가 완전이 사라지자, 송 실장은 멍한 표정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진우에게 입을 열었다.

“그럼 진우 학생. 준비 되었으면 시작하세요.”

“아들~!! 힘내!!”

어머니의 목소리에 슬쩍 객석을 바라본 진우가 천천히 건반위에 손을 올리자, 모두가 숨죽인채 아이를 지켜 보기 시작했다.

따라다라단~ 따라다라단~ 따라다라따라다라단~

시작은 민준이와 동일했다.

반복되는 첫 주제음이 끝나고 드디어 변주가 시작되는 부분.

건반 위를 빠르게 노니던 아이의 손가락이 그대로 멈추었다.

“못… 치겠어요.”

그렇게 4번째 경합 만에 비엔나의 ‘프린스’ 황진우군은 두 살 어린 동생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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