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63화 (63/177)

[63] Ep.9 : 증명의 시간. (1)

“차민준 학생. 잠시 후 무대에 오를 준비하세요.”

직원의 안내를 받아 무대에 올라서자 석 혜인 누나에게 설명을 듣고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 되는 것이 느껴졌다.

무척이나 경계하는 눈초리.

얼핏 보아도 나보다 학년이 높아 보이는 형이나 누나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저 아이가 지휘를 한다고?’

‘뭐야, 딱 봐도 나보다 어리잖아?’

‘흐음.. 지난 피아노 대회 우승자라고 해서 엄청 기대했는데, 겉보기엔 그냥 평범하네….’

청각을 곤두세워 집중하면 들려오는 마음의 소리…

대부분의 오디션 통과자들은 나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있었지만…

이를 테면 저 뒤에서 신나게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같은 반 친구들처럼 말이다.

“그럼 지휘를 맡게 된 아이까지 다 모였으니, 간담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자리에 앉아 주세요.”

최종 오디션에 합격한 학생들과 그 부모님들까지 자리에 착석하자, 객석의 1/3 정도가 금세 메워졌다.

하긴 오케스트라에 사용하는 악기들만 몇 갠데, 오히려 그렇게 따지면 그 수가 적은 듯 한 느낌마저 들었다.

내 옆 자리에는 할머니를 대신해 오 수정 선생님이 앉아 내 손을 꼬옥 잡아 주셨다.

그리고 잠시 후.

송 현우 실장님이 무대에 서서 우리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그레이스 백화점 홍보 실장이자, 이번 프로젝트 오케스트라의 책임자를 맡고 있는 송 현우라고 합니다.”

간단한 소개와 함께 이번 프로젝트 오케스트라의 취지를 밝힌 아저씨에게 객석에서 많은 박수가 쏟아졌다.

처음 아저씨가 선생님과 함께 나를 찾아왔을 때 솔직히 이렇게나 빨리 일을 추진시킬 줄은 몰랐다.

석 혜인 누나는 연습 시간을 감안해 오케스트라 단원편성은 되도록 빨리 끝낸다고 하긴 했지만, 설마 한 달 만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다니…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합창 단원을 포함해 세세한 부분까진 조정이 필요할 거라고 오 선생님에게서 전해들은 나는 내 옆자리에 줄지어 앉은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사실 승우와 소희를 제외하면 나머진 휩쓸리듯 따라온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무대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표정은 보통 때와는 달리 제법 진지해보였다.

백화점 오디션을 보지 않는 대신 선생님께 자체적 테스트를 거친 결과.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승우의 트럼펫 실력이었다.

진짜 악기의 ‘악’자도 다루지 못할 것만 같았던 녀석이 ‘경기병 서곡’의 도입 부분을 불렀을 때 오 선생님의 벙찐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사실 이것 밖에 못 불어요.’

승우는 부끄러운지 툭하고 말을 내던지며 트럼펫을 내려놓았지만, 힘차게 뻗어나가는 트럼펫 소리에 감탄한 오 선생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다음은 소희의 플룻.

피아노와 함께 배웠다는 소희의 플룻 연주는 굉장히 고요한 울림이 있었다.

고요한 울림?

생각해보니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굉장히 높은 음을 아련한 느낌으로 전해줘서 일까? 피아노와는 또 다른 묘한 매력이 있었다.

소희가 연주한 곡목은 ‘스카보로우의 추억’ 이라는 곡이었는데, 처음 들어 보았지만 풀룻 특유의 음색 때문인지 굉장히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달리 나중에 선생님께 전해들은 바로는 굉장히 슬픈 내용의 가사였다.)

덕분에 선생님은 승우와 소희는 조금만 연습을 하면 곧바로 오케스트라에 참여해도 될 정도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진 진아의 차례에서 나와 선생님은 순간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굉장히 망설였다. 그녀가 연습해온 부분은 베토벤의 7번 교향곡에서 오보에 파트였는데, 백번 양보해도 훌륭하다 칭찬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오보에를 만지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능성이 살짝 엿보이는 수준이랄까?

따라서 진아의 오보에는 따로 보결 처리를 해두었다.

마지막으로 근상이와 민석이 같은 경우엔 타악기를 맡게 되었는데, 그래도 박자 감각이 제법 있는 터라 승우의 경기병 서곡에 맞춰 연습을 시켜보니 나쁘진 않았다.

이정도가 나와 함께 오케스트라를 연주할 같은 반 친구들이었고, 혜인이 누나에게 듣기론 역시 영지 국민학교 학생들이 대거 오케스트라에 몰린 모양인데…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영지 국민학교 6학년인 안나 누나가 오케스트라에 함께 해주었기에 안심이 되었다.

무대에서는 이번 프로젝트 오케스트라의 최종 목표인 YMCA 재단에 대한 설명이 계속 해서 이어졌고, 오디션에 합격한 아이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무대 위의 송 실장님을 바라보았다.

그때 한 아주머니가 객석에서 손을 들었다.

“질문이 있는데요.”

“음… 질문은 설명이 모두 끝난 뒤에 받기로 했는데, 그래도 일단 손을 드셨으니 말씀해보세요.”

송 실장님의 대답에 아주머니는 금테 안경을 쓸어 올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눈에 보아도 부잣집 테가 나는 복장으로 보아 영지 국민학교에 다니는 학생의 어머니 같은데…

“말 끊어서 미안해요. 그래도 할 이야기는 미리 해야 할 거 같아서.”

“말씀해 보세요.”

“일단 아이들의 꿈을 위해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신 실장님을 비롯해 그레이스 백화점의 송 회장님께도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학부모님을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번 오디션 바이올린 부분에 합격한 황진우 학생의 어머니인데요. 사실 저희 가족이 지난달까지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다가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아~ 그러셨군요.”

“어딘지 아시죠? 음악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 혹은 비엔나라고도 하는데.”

“네. 알고 있습니다.”

“밤이면 거리 마다 음악이 울려 퍼지고, 거의 매주 광장에서는 악사들이 모여 오케스트라 연주를 하는…”

“저기 어머님?”

“네?”

“아직 설명을 마치지 않아서 되도록 요점만 질문에 주셨으면 하는데요.”

“아~ 오호호~ 어머, 내 정신 좀 봐. 제가 음악을 하도 사랑하다보니, 주책 맞게 제 자랑을 해버렸네요. 해외에 오래 살다 와서 그런 거니까 젊은 실장님이 이해 좀 해주세요.”

오스트리아 빈…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빈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내 머릿속엔 베토벤 선생님이 떠올랐다.

잘 지내고 계실까?

베토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곳에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깊은 곳에서 샘솟았지만, 일단 할아버지와 나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시간을 들여 보기로 했다.

“사실 우리 진우가 그곳에서 바이올린 뿐만 아니라 피아노도 열심히 배웠거든요. 헌데 들어보니 지난 달 이곳에서 어린이 피아노 대회를 치뤘었다죠?”

“네. 그렇습니다.”

“아이 참. 우리 진우가 조금만 일찍 한국에 왔었더라면 우승이 확실 했었을 텐데.”

그 순간 내 손을 잡고 계시던 선생님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게 느껴졌다.

송 실장님 조차 아주머니의 당혹스러운 발언에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드님 피아노 실력이 제법인가 보군요.”

“그럼요~ 우리 진우가 바이올린도 수준급이지만, 피아노는 훨씬 더 잘 치거든요. 오죽하면 빈에서 과외 선생님이 진우 보고 신동(神童) 이라고 칭찬했을 정도라니까요. 그런데 아까 전에 오디션 관계자한테 들어보니 지난 피아노 대회 우승자가 이번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면서요?”

“그렇습니다. 안 그래도 잠시 후에 소개해 드릴 겁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흘러내린 안경을 다시 치켜 올리며 입을 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단단히 마음먹으신 모양인데…

“사실 전문적인 지휘 공부를 한 아이도 아니고, 단지 피아노 실력 때문에 지휘를 하는 거라면 솔직히 우리 진우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저기, 어머님 무슨 말씀인지는 잘 알겠지만,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이미 결정이 된 상태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도 오디션을 시작하면서 분명히 밝혔던 부분이구요.”

“그렇지만, 모든 아이에게는 공평한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우리 진우가 해외에 있다 와서 참가를 못했을 뿐이지. 그 자리에 있었으면 분명히 1등을 하고도 남았을 아이인데, 그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아이한테 어떻게 지휘를 받겠어요? 더구나 바이올린 수석 자리도 이미 차있다고 하던데.”

그 순간. 내 손을 잡고 있는 선생님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혹시나 선생님이 벌떡 일어나실지도 모른단 생각에 선생님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때였다.

“하하~ 황진우 학생의 어머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알겠습니다. 사실 지휘자와 콘서트 마스터 부분에 대해서 다른 학부모님들께서도 이의를 제기 하셨으니까요.”

송 현우 실장님은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순순히 아주머니의 의도를 이해해주셨다.

그러면서도 객석에 앉은 나를 향해 살짝 윙크를 보내었는데, 그것은 무언가 준비하라는 사인같은 느낌이 들었다.

“좋습니다. 어머님께서 그렇게 느끼셨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진우 학생의 실력을 한번 검증해보아도 될까요?”

“조, 좋아요. 진우야. 괜찮지?”

그러자 아주머니 옆에 앉은 남자 아이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흔히 우리들끼리 바가지 머리라 부르는 헤어스타일의 아이는 어머니와 똑같이 안경을 쓸어 올리며 굳은 의지를 내비쳤다.

한창 오케스트라에 대해 설명 중이던 회장 안이 뜻밖의 사태에 술렁이자, 송 현우 실장님은 스태프들을 불러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전에 대회에서 보았던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와 함께 또 한 대의 순백의 그랜드 피아노가 무대 위에 올라왔다.

스태프들은 피아노가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 장치를 점검한 뒤, 서둘러 무대 아래로 내려가셨다.

“자, 여기 두 대의 피아노가 있습니다. 테스트는 아주 간단합니다. 혹시 피아노 배틀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어머~ 물론이죠. 우리 진우 특기랍니다.”

“잘 되었군요. 방식은 간단합니다. 먼저 선을 잡은 사람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연주를 마치면 그 연주를 똑같이 따라 치면 됩니다. 피아노 연주는 번갈아 진행이 될 것이고, 어느 한 사람이 연주를 따라하지 못하면 지는 겁니다. 아시겠죠? 자, 그럼 차 민준 학생과 황 진우 학생은 무대 위로 올라와 주세요.”

송 실장님의 말에 나는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오 선생님께서 나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셨다.

“민준아 잘 할 수 있지?”

“너무 걱정 마세요. 피아노만큼은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자신 있으니까.”

나는 내 손을 잡고 있는 선생님의 손등을 다른 손으로 토닥이며 무대를 향해 걸었다.

“어머 저 아이가 지휘자인가봐.”

“엄청 어려 보이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신경 쓸 필요 없다.

나는 맞은 편 계단에서 내려오는 황 진우라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무대에 올랐다.

천장에서 내리 쬐는 조명 빛에 마치 한 달 전 피아노 대회로 돌아간 듯 한 느낌이 들어서일까? 무대에 오른 나의 가슴이 두근 거리고 있었다.

월광 소나타 3악장에서 빠른 연타 임에도 칼 같이 반응해주었던 저 피아노.

이렇게 다시 또 치게 될 줄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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