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61화 (61/177)

[61] Ep.8 : 어린이 오케스트라. (4)

“어, 얼마나 싸게 해드릴까요?”

“뒤에 ‘0’하나만 빼주세요.”

“네…?”

고양이 같이 앙큼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안나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치자, 등골이 서늘해진 주인은 한동안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러자 안나는 아저씨를 향해 베시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헤헤~ 농담이에요.”

“하하하~ 아가씨도 참~ 아하하~”

“많이 놀라셨어요?”

“어른을 놀리면 못써요~”

십년감수한 표정으로 쩔쩔매고 있는 매장 주인의 모습에 뒤에 있던 진아 엄마는 묘한 눈길로 안나를 바라보다가 딸에게 물었다.

“얘, 진아야. 저 아이 대체 정체가 뭐니?”

“나도 잘은 몰라. 하지만 매번 볼 때마다 운전기사가 데려오는 걸 보면 굉장히 부잣집 언니 같기는 한데…”

그때 검은 양복에 선글라스를 착용한 남자 하나가 매장 안으로 서둘러 달려와 안나를 찾았다.

“아가씨. 저에게 이야기도 안하시고 이렇게 혼자 다니시면 위험합니다.”

“아, 마침 잘 오셨어요. 김 비서님. 저기 이것 좀 저희 아빠 카드로 대신 사주실래요?”

“네? 설마 또 악기를 구입하시려구요?

“괜찮아요. 아빠는 제가 악기 사는 거에는 별 말 안하시니까.”

‘저한테는 하시거든요.’

김 비서는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속으로 삼키며 결국 카드를 꺼내들었다.

악기 매장 주인은 양손을 비비며 김비서를 향해 영업용 미소를 날려주었다.

“이거 정말, 매번 감사합니다. 김 비서님.”

안나가 구입한 소프라노 오보에의 가격은 320만원.

애초에 가장 저렴한 모델부터 찾았던 진아 엄마에겐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한 모델이었다.

저런 고가의 악기를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덜컥 구입하는 저 아이는 대체 무얼까.

진아 엄마의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잠시 후. 카드 결제를 마친 매장 주인이 싱글벙글 웃으며 고급 가죽재질의 케이스를 선반 위에 올리자, 안나를 비롯한 모든 이들의 시선이 곧장 케이스를 향했다.

달칵.

기분 좋은 쇳소리가 매장 안에 울려 퍼지자, 주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손님들 쪽으로 가방을 돌렸다.

마치 007 시리즈 가방을 연상 시키는 오보에 케이스 안에는 윗관과 아랫관, 그리고 벨로 나뉘어진 오보에가 붉은 색 실크 원단 위에 놓여 있었다.

검은 바디를 휘감고 있는 은색의 키 버튼은 주황색 조명에 비쳐 언 듯 황금색으로 보이기 까지 했다.

“어머, 이뻐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오보에란 그저 값 비싼 피리인 줄만 알았던 진아 엄마조차 안나가 고른 소프라노 오보에의 화려한 자태에 절로 감탄사를 쏟아내었다.

“한 번 살펴보시겠어요?”

매장 주인은 새하얀 면장갑을 끼고 조심스럽게 오보에를 안나에게 건네주며 설명을 덧붙였다.

“오보에란 불어로 높은 소리라는 뜻의 haut (오) 와 나무라는 뜻의 bios (부아)를 합쳐 Hautbios (오부아) 라는 단어를 어원으로 삼고 있습니다. 높은 음을 내를 목관 악기라는 뜻이죠. 사실 따지고 보면 오케스트라의 목관 악기들 중에선 플룻이 가장 높은 음을 내지만, 대신 오보에는 오케스트라 전체를 관통 시킬 수 있는 굉장히 독특한 음색을 가졌죠.”

그러자 가만히 아저씨의 설명을 듣고만 있던 진아가 작은 탄성을 질렀다.

확실히 어제 오케스트라에서 오보에의 음색이 자꾸 귀에 밟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나는 그러건 말건 신중히 오보에의 윗관과 아랫관을 이리 저리 돌려보며 살폈다.

“괜찮은 것 같네요. 이걸로 할게요.”

“역시 안나 아가씨. 안목이 탁월 하십니다.”

매장 주인은 안나에게서 돌려받은 오보에를 헝겁으로 깔끔히 닦아 지문을 없앤 뒤, 다시 케이스에 돌려 넣었다.

그 모습을 선반에 턱을 괴인 채 흐뭇하게 지켜보던 안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저씨. 정말 한 푼도 안 깎아 주셨네요.”

“네…?”

“아무리 농담이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우리 아빠 생각해서 조금은 깎아 주실 줄 알았는데.”

“아하하… 저희 악기가 워낙 고급 브랜드인지라, 사실 이렇게 제 값에 팔아도 남는 게 별로 없답니다.”

“그래요? 역시 백화점이라 매장 수수료를 많이 떼어가나 봐요? 안되겠다. 다음 번엔 김 비서님이랑 종로 쪽 악기 상에 가서 사야지…”

안나는 언젠가 식사 중, 아버지와 오빠가 나누던 매장 수수료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백화점에 입점한 매장들은 모두 수수료에 굉장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기에 안나는 제대로 된 뜻도 모르고 그냥 말을 던져 본 것이다.

하지만 그 효과는 굉장했다.

“아, 아가씨. 무슨 그리 섭섭한 말씀을…”

계산 후. 모든 게 끝난 줄로만 알았던 주인의 이마에 다시 식은땀이 송글 송글 맺히기 시작하자, 안나는 빙긋 웃으며 쇼 케이스 안에 들어 있는 오보에 리드를 가리켰다.

리드란 케인(cane)이라는 두 겹의 갈대로 만들어져 오보에의 음색과 음량을 좌우하는 사람의 입과도 같은 부분이었다.

소모성이기 때문에 끝이 깨지거나 갈라질 경우 새로운 리드를 구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 대신 리드라도 몇 개 더 챙겨주세요.”

“리, 리드요? 뭐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결국 주인은 선심 쓰는 척, 쇼 케이스 밑에서 싸구려 리드를 몇 개 꺼내 들었다.

그러자 안나는 주인이 내민 리드를 향해 고개를 저으며 다시 쇼 케이스 안에 진열된 고급 브랜드 리드를 가리켰다.

“으으음~ 아저씨 그냥 이걸로 주세요~ 네?”

“아가씨. 그 리드들은 좀…”

그러자 방금 전까지 귀여운 표정으로 애교를 부리던 안나의 얼굴이 돌변했다.

“김 비서님. 종로에 괜찮은 악기 가게 좀 알아 봐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안나의 말 한마디에 고개를 숙인 김 비서가 수첩을 꺼내들자, 주인은 번개같이 쇼케이스 안에서 고급 리드를 꺼내들었다.

“여기 있습니다. 아가씨.”

“감사해요~ 아저씨. 나중에 친구가 악기 산다고 하면 꼭 여기로 데리고 올게요.”

어느새 오보에 케이스와 리드를 양손에 챙겨 든 안나는 매장 주인을 향해 살포시 웃으며 진아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잠시 후. 두 아이를 따라 매장에서 나온 진아 어머니는 안나라는 아이의 당돌한 쇼핑에 속이 후련해짐을 느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자신의 딸과 마주 서있던 안나가 불쑥 진아에게 오보에 케이스를 내미는 것이 아닌가.

“가져가.”

“네?”

“이거 가져가서 쓰라구.”

방금 구입한 값 비싼 악기를 서슴없이 건네는 안나의 모습에 김 비서 역시 깜짝 놀라 외쳤다.

“아, 아가씨?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방금 새로 산 악기를 어째서?”

“어차피 선물하려고 산거니까요.”

‘6학년짜리 꼬마가 아는 동생에게 320만원 짜리 악기를 선물하다니!! 나는 회장님께 뭐라고 보고하라고~!!!’

절박한 김 비서의 속사정도 모른 채 안나는 끝끝내 오보에를 진아의 손에 들려주었다.

그러자 깜짝 놀란 진아 어머니가 달려와 진아에게서 오보에 케이스를 낚아채 김 비서에게 돌려주었다.

“죄, 죄송해요. 우리 아이가 진심으로 받으려던 건 아니구요.”

하지만 이미 모든 걸 내려놓은 김 비서는 채념한 듯 웃으며 진아 엄마에게 오보에를 다시 건네었다.

“괜찮습니다. 우리 아가씨의 선택이니까요. 뭔가 이유가 있으시겠죠.”

“저기 실례지만, 저 안나라는 학생. 대체 정체가…?”

“아, 모르셨나보군요. 송 안나 아가씨는 저희 백화점 설립자이자, 최고 경영자인 송 명석 회장님의 따님이십니다.”

“네? 뭐라구요!?”

그제서야 진아 엄마는 악기 매장에서 있었던 일련의 모든 일들이 단번에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어째서 어린 아이에게 매장 주인이 그렇게 쩔쩔 매었는지, 또한 이 어린 아이가 김 비서에게 부탁해 고가의 악기를 별 다른 고민 없이 구입하였는지.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하나 있었다.

“왜 우리 진아에게 이런 값 비싼 선물을…?”

그러자 안나는 아주머니의 질문에 진아의 팔을 슬쩍 감아 잡으며 입을 열었다.

“친한 동생이니까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함께 오케스트라도 연주하고 싶고.”

그제서야 김 비서는 안나의 행동을 이해했다는 듯이 흐뭇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진아 엄마를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하시네요. 앞으로도 우리 아가씨와 잘 지내주셨으면 합니다.”

결국 김 비서에게 오보에를 받아 든 진아 엄마는 마치 도깨비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뿅 하고 나타나 매장 주인과 티격 태격 하더니, 어느 순간 그녀의 손에는 320만원 짜리 소프라노 오보에가 들려 있었으니까…

멀리서 진아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는 안나에게 진아 역시 고마운 마음을 담아 힘껏 팔을 흔들었다.

&

그렇게 또 다시 새로운 한 주가 시작 되고…

학교에 도착한 진아의 손에는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검은 가죽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음? 그건 뭐야?”

“비밀.”

“으잉?”

새침하게 말을 돌리는 진아의 표정에 민준이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입을 삐쭉 내밀었다.

뭔가 굉장히 고급스러워 보이긴 하는데, 도시락 가방은 아닐 테고,

살짝 미소 짓는 진아의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깜짝 놀랄만한 물건인 것 같긴 한데…

“선생님 오신다~!!”

복도 쪽에서 망을 보던 녀석의 외침에 어수선 하던 교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하지만 이내 몇 명은 웃음을 참기 못하고 키득 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뭔가 수상함을 느낀 진아가 교실 앞문을 살펴보니, 얇은 실에 매달린 칠판 지우개 하나가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 순간.

드르륵~

파악!!

교실 문이 열리자마자 실이 끊어지며 지우개가 선생님 머리 위로 떨어지자, 한 동안 앞문 근처에 분필 가루가 자욱하게 휘날렸다.

어제 동생 희경이와 명동에서 새로 산 새하얀 블라우스 어깨에 선명하게 찍힌 핑크색 지우개 자국.

오 선생은 너무 놀라 한 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와아아~~ 걸렸다.”

“하하하~”

하지만 몇 분 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계시는 선생님의 모습에 몇몇 아이들이 불안감을 느꼈는지 그녀에게 물었다.

“서, 선생님. 괜찮으세요?”

“······.”

“선생님…?

“너희들.. 어떻게 나한테 이런 짓을…”

“선생님. 장난이었어요…”

“내가 너희들한테 얼마나 잘하려고 노력했는데…”

“······.”

“흑..”

가려진 선생님의 머릿칼 사이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자, 최초로 장난을 설계한 민석이와 승우가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너 때문이잖아….’

‘내가 뭐~ 너도 거들었잖아~’

‘어떡할 거야. 선생님 우시잖아.’

‘나도 몰라~!!’

서로를 향해 입 모양을 뻥끗 거리며 책임을 떠넘기던 두 아이는 결국 아이들의 따가운 눈초리에 슬금 슬금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에게 다가섰다.

“죄, 죄송해요 선생님.”

“정옥분 선생님 계실 때는 이런 장난 한 번도 못 쳐봐서…”

그러자 고개 숙인 채 눈물을 닦아내던 오 선생이 두 아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조승우.”

“네.”

“앞으로 일주일 동안 쉬는 시간에 칠판 정리 및. 지우개 털어오기.”

“네…?”

“그리고 송민석.”

“네..”

“앞으로 일주일 동안 점심시간에 선생님이랑 도시락 바꿔 먹기.”

“네에!?”

“참고로 선생님은 채소와 나물을 좋아하거든?”

“아, 안 돼. 선생님 그 것 만은…”

“요 녀석들. 선생님이 잘해주니까 우습지?”

오 선생은 장난꾸러기 학생에게 가볍게 꿀밤을 먹인 뒤 블라우스를 툭 털어내었다.

새로 산 옷에 분필 가루라니. 아깝긴 했지만, 어차피 교사를 하며 분필 가루 묻이는 건 일상 다반사였으니까.

뭔가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를 뒤로 하고 교탁에 선 오 수정 선생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아침 조회를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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