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60화 (60/177)

[60] Ep.8 : 어린이 오케스트라. (3)

&

“지히? 그게 뭐니?”

“할머니. 지히가 아니라 지휘요.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앞에 서서 이렇게 손을 휘저어 음악을 조율하는 거예요.”

“그래? 그런데 오케스트라는 또 무언지. 할미는 잘 모르겠구나.”

구멍 난 민준이 양말에 바느질 중이던 할머니는 옆에 앉은 손자를 향해 주름이 깊이 패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제 오후. 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오케스트라를 지휘 해보았던 민준이는 할머니에게 자신이 어떤 일을 하게 되었는지 조금 더 잘 설명해드리고 싶었지만, 어떤 식으로 표현을 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할머니는 얼마 남지 않은 이빨로 실을 끊어내시곤 조그만 양말을 포개어 접었다.

“할미가 다리만 괜찮으면 새 양말 좀 사다주고 싶은데, 미안하구나.”

“전 괜찮아요. 아, 할머니 전국노래자랑 할 시간이다.”

일요일이면 할머니가 꼭 챙겨보시는 프로그램이기에 민준이는 서둘러 TV에 다가가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오래된 브라운관 TV는 서서히 밝아지는 화면보다 스피커에서 송해 아저씨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전~구우우욱~”

“노래자랑~!! 와아아아~”

사람들의 함성과 함께 굉장히 귀에 익은 전국 노래자랑의 테마곡이 울려 퍼지자, 어느새 할머니는 반지 고리를 내려놓고 박수를 쳤다.

언제나 들어도 절로 어깨가 들썩이는 신나는 행진곡 풍의 음악.

그때 잠시 악단 소개를 위해 단원들과 지위자의 모습이 TV에 비쳤다.

그러자 민준이가 흥분한 목소리로 TV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할머니. 저거요. 저 검은 옷을 입고 막대기를 휘두르는 사람이 지휘자에요.”

“민준이 네가 저걸 한다고?”

“네!!”

“그럼 우리 손자 TV에 나오는 거네?”

“······.”

“아니야?”

“그게 TV에 나오진 않아요.”

“이 할미가 또 잘 못 알아 들었구만…”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헤헤”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송해 아저씨의 전국 노래자랑을 지켜보던 민준이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할머니 덕분에 서서히 졸음이 몰려왔다.

TV에서 들리는 송해 아저씨의 목소리가 마치 꿈결처럼 나른히 들리던 그 순간.

현관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십니까?”

“으음…?”

한적한 일요일 오후.

누군가가 민준이네 집을 찾아온 적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민준이는 혹시나 자신이 잘 못 들은 게 아닐까 살짝 눈을 떠 할머니를 올려다보았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계셨다.

그때 밖에서 또 한 번 노크 소리가 울렸다.

“아무도 안 계시나요?”

그제서야 번쩍 눈을 뜬 민준이가 서둘러 몸을 일으키자, 할머니는 깜짝 놀라 손자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그랴? 무서운 꿈이라도 꾼 겨?”

“아니, 밖에 누가 온 것 같아서요.”

몸을 일으켜 세운 민준이가 방문을 나와 현관문 앞에 다가서자, 유리창 너머 밖으로 검은 물체가 서성이는 것이 보였다.

끼이익…

삐그덕 거리는 경첩 소리와 함께 민준이가 빼꼼이 고개을 내밀자, 난감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남자의 입가에 화색이 돌았다.

“안녕? 다행히 집에 있었구나.”

“백화점 아저씨?”

그러자 송 실장 뒤에 서있던 석 혜인 대리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끄응. 아저씨란 말은 언제 들어도 적응이 안 되는군.”

“이제 슬슬 적응 하셔야죠.”

“그래도 27살에 아저씨 소리 듣기엔 너무 억울하잖아.”

민준이는 자신의 집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두 남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 저희 집 찾아오신 거예요? 찾아오기 굉장히 힘드셨을텐데…?”

“말도 마라. 안 그래도 힘들어 죽는 줄 알았으니까. 혹시 할머니는 집에 계시니?”

“네. 안에 계세요.”

“다행이군.”

그때 방 안에서 할머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준아. 밖에 누가 온겨?”

“네. 할머니. 피아노 대회에서 저한테 상금 주셨던 아저씨가 오셨어요.”

잠시 후.

민준이네 집에 네 사람이 들어차자 안 그래도 비좁은 단칸방이 더욱 좁아졌다.

민준이의 할머니는 멀리서 온 손님들에게 오렌지 쥬스를 쟁반에 담아 한 잔씩 건네주었다.

안 그래도 슬슬 기온이 오르는 초 여름 햇살을 받으며 계단을 올라온 송 실장은 꽤나 목이 타는지 할머니에게 쥬스를 받자마자 벌컥벌컥 삼켰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민준이는 자신의 얼굴만 한 머그컵을 양 손에 받쳐 든 채 송 현우를 바라보았다.

“아저씨가 안나 누나의 친오빠라면서요?”

“응? 그래 맞아. 안나한테 들었니?”

“네.”

“어제 안나가 집에 돌아와 온종일 네 얘기를 하더라. 어제 석 교수님의 대학에서 끝내주는 지휘를 했었다며?”

송 현우의 칭찬에 민준이는 두 볼이 빨개진 채로 머그컵에 담긴 쥬스를 삼켰다.

그러자 석혜인 대리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대회에서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는 저도 가슴이 떨릴 정도로 멋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영락 없는 11살짜리 꼬마네요.”

“그러게 말야. 그때는 나도 정말 놀랐다니까.”

컵에 담긴 쥬스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내는 송 실장에게 민준이네 할머니는 쥬스를 한잔 더 따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젊은 양반이 주말에 우리 집엔 무슨 일로 찾아 오셨나?”

“실은 민준이의 보호자인 할머니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혹시 우리 손자에 대한 일이요?”

“네. 맞습니다.”

민준이 할머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시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아무래도 손자에 관한 일이다보니 허투루 듣지 않겠다는 할머니의 마음가짐이었다.

송 실장과 석 대리는 하나뿐인 손자를 생각하는 할머니의 마음에 진심을 담아 입을 열었다.

“이미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저희 백화점에서 추진하는 프로젝트에 차민준 군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보호자인 할머니께 이렇게 부탁을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중요한 역할이라니. 우리 손자가 또 어디 큰 대회에 나가는 거요?”

“네. 그렇습니다. 피아노 대회랑은 비교가 되지 않는 큰 대회입니다.”

“아이고, 그럼 오히려 내가 잘 부탁드려야지…”

갑자기 그들 앞에 두 무릎을 꿇는 할머니 덕분에 깜짝 놀란 송 실장과 석혜인은 비좁은 방안에서 서둘러 할머니 앞에 무릎을 꿇다가 머리를 부딪혔다.

딱!!

“아욱!! 크흐…”

“아야..!!”

마치 유머 1번지에서나 나올 법한 두 사람의 슬랩스틱 코메디에 방 한 귀퉁이에 앉아있던 민준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으… 석 대리. 너 은근 머리 단단하다.”

“저는 머리가 반으로 쪼개지는 줄 알았거든요? 누가 할 소리를…”

“킥킥… 아, 웃겨…”

하지만 그런 소동 속에서도 송 실장을 향해 이미 머리를 땅에 붙인 채 엎드려 있는 할머니의 모습에 머리를 어루만지던 두 사람은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부디 우리 손자. 잘 부탁드립니다. 부모 없이 불쌍히 자랐지만, 누구보다 착한 아이에요. 그건 이 할미가 보증합니다.”

“아이구, 할머니. 이러지 마세요. 저희가 부탁하려고 찾아왔는데, 이러시면 저희도 불편해요.”

그러나 두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민준이의 할머니는 두 손과 머리를 바닥에 붙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늙은이 주책이라 생각할정 모르겠지만, 우리 민준이. 음악에 대해서 만큼은 재주가 남다른 아입니다. 이 할미가 못 나서 풍족하게 가르치진 못했지만, 그 것 만큼은 제가 보증합니다.”

“알아요. 할머니. 그래서 저희가 이렇게 직접 찾아온 것 아닙니까.”

“네. 맞아요. 오히려 저희가 할머니께 부탁드려야하는 입장인데요. 민준이 저희에게 맡겨 주시면 정말 훌륭한 음악가로 키워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아. 이제 이 늙은이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바닥에 엎드린 채 흐느끼는 할머니의 모습에 어린 민준이가 어느새 다가와 위에서 할머니를 끌어안았다.

“할머니. 저 이번 대회에서도 진짜 열심히 할게요. 그러니까 죽는다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네? 아셨죠?”

“오야. 우리 민준이 두고 이 할미가 시덥지 않은 소리를 했구나. 미안하다. 우리 새끼.”

그제서야 고개를 든 할머니는 민준이를 끌어 앉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석 대리는 코끝이 찡해지는 느낌에 살짝 고개를 돌려 눈물을 훔쳤다.

&

그 시각.

여름에 입을 원피스를 구입하기 위해 아빠인 송회장이 운영하는 백화점을 찾은 안나는 악기 매장 근처에서 울려퍼지는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엄마아~ 제발”

“아~ 글쎄 돈 없대두. 얘가 갑자기 이제 와서 무슨 악기를 배운다고…”

어젯 밤. 당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집에 돌아오자마자 오보에라는 악기를 사달라는 딸 덕분에 진아 엄마는 현재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예전에는 뜬금없이 배구공을 사달라고 졸라대더니, 이번엔 값 비싼 악기라니.

처음엔 오보에란 악기가 뭔지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막상 백화점에 나와 가격표를 보니 무려 200만원 가까이 하는 물건이었다.

고작 리코더 비슷한 피리 하나에 얼마나 하겠냐고 생각했던 진아 엄마는 자신을 보채는 딸의 이마에 꿀밤을 날리며 말했다.

“200만원이면 너희 아빠 한 달 월급이야. 이 녀석아. 집에 가서 리코더나 불어.”

“엄마~ 리코더랑 오보에랑은 소리가 다르단 말야~ 이번에도 사주시면 열심히 배울게요. 응?”

“아휴, 몰라~ 엄만 모르겠으니까. 이따 아빠 오면 얘기해.”

흔히 부부사이에 겪는 핑퐁 게임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시작되는 엄마 아빠의 책임 미루기는 몇날 며칠이 걸릴지 아무도 알 수 없었으니까. 겨우 손에 넣더라도 민준이의 오케스트라 대회는 이미 끝이나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때였다.

“진아야~”

어디 선가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진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안나의 모습에 깜짝 놀라 입을 열었다.

“어? 안나 언니?”

진아에게 다가온 안나는 먼저 진아네 엄마를 향해 예의바르게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저는 진아랑 친하게 지내고 있는 송 안나라고 합니다.”

“어머, 예의 바른 것 좀 봐. 학생도 엄마랑 쇼핑 왔구나?”

사실 혼자 왔지만, 안나는 복잡한 설명을 피하기 위해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백화점엔 무슨 일로 왔어요?”

“나? 난 옷 좀 사려고, 넌?”

“저는…”

대답과 동시에 진아는 엄마를 힐끗 올려다보았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엄마의 모습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대충 상황을 파악한 안나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한 번 맞춰볼까?”

“네?”

“진아 너 오보에 사러왔지?”

단번에 자신이 백화점에 온 이유를 알아맞힌 안나를 진아가 깜짝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안나는 양쪽 입 꼬리를 올리며 설명을 덧붙였다.

“미안, 어제 너랑 오 수정 선생님이랑 하던 얘기 들어버렸거든…”

“아…”

“너도 나랑 민준이와 같이 오케스트라 하고 싶었던 거지? 악기는 배워본 적 있어?”

안나의 질문에 진아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음… 처음부터 오보에를 익히는 거 굉장히 어려울 텐데…”

곰곰이 생각하던 안나는 무언가 결심했는지 진아의 손을 붙잡고 악기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진아와 함께 있던 어머니도 하는 수 없이 두 아이를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손님 하나 없는 조용한 매장 분위기에 눈치가 보였는지 진아 엄마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매장 주인에게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고객… 헉!! 아가씨!?”

웬 어린 아이들이 시끄럽게 매장 안으로 달려들길래 주의를 주려던 그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백화점 오너의 딸인 안나 양을 그가 모를 리가 없었으니까…

“안녕하세요. 아저씨.”

“안나 아가씨.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신가요?”

“저기 오보에 좀 보여주세요.”

“아~ 오보에 말씀이십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윽고 고급스러운 벨벳 제단 위에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은색 키 배열을 가진 오보에가 올라오자 진아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안나는 아저씨가 추천해주는 세 가지 오보에들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초보자에게 어울릴 법한 두 번째 모델의 가격표를 손에 들고 입을 열었다.

“아저씨.”

“네. 아가씨. 그 모델이 마음에 드시나요?”

“네. 이게 좋을 거 같아요. 그런데 아저씨. 이거 조금만 깎아 주시면 안되요?”

백화점 오너의 딸인지라,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난감해하던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 얼마나 싸게 해드릴까요?”

“뒤에 ‘0’하나만 빼주세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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