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Ep.8 : 어린이 오케스트라. (2)
“제가 한 번 지휘를 해봐도 될까요?”
“뭐…?”
조그만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에 석 교수는 순간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작 한번 연주를 듣고 지휘를 해보겠다고?
민준이의 피아노 실력이야 익히 봐서 알고 있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당돌함을 넘어서 황당함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왜 지휘를 하고 싶지?”
석 교수의 물음에 민준이는 그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저도 안나 누나랑 비슷한 걸 느꼈거든요.”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렴. 문제를 맞추면 이 지휘봉을 너에게 넘겨주지.”
그때 오 선생은 깜짝 놀라 입을 가리며 석 교수와 민준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벌써 테스트가 시작되고 있었던 거야…?’
민준이는 석 교수의 제안에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오케스트라를 연주한 형, 누나들을 향해 걸어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제가 잘 몰라서 이렇게 밖에 설명을 못할 것 같은데, 우선 저기 두 번째 줄에 있는 바이올린 누나.”
“응? 나?”
“죄송하지만, 옆줄에서 네 번째 칸에 있는 누나랑 자리 좀 바꿔주시겠어요? 그리고… 저기 커다란 바이올린 같은 악기를 다루시는 형도 그 뒤에 분이랑 자리 좀 바꿔주세요.”
그 순간 민준이를 바라보던 석 교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 것 봐라? 이 녀석 진짜 보면 볼수록 물건일세….’
그랬다. 지금 오케스트라의 배치는 석 교수가 이곳에 도착하기 전. 악장에게 부탁해 교묘하게 단원들의 자리 배치를 바꾸어둔 것이다.
현악과 목관을 비롯해 석 교수가 준비해두었던 6명의 학생을 모두 찾아낸 민준이는 아직도 뭔가 부족했는지 고개를 갸웃 거리며 형 누나들을 유심히 살폈다.
대 학생들은 그제서야 수업을 시작하기 전 악장인 동혁이가 왜 이런 배치로 자신들의 자리를 정해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저기.. 가운데에 계신 피리 누나?”
아이의 조그만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키자, 오보에 수석 민하는 깜짝 놀라 입을 열었다.
“나 말이니?”
“연주하실 때. 옆에 있는 누나랑 파트를 바꿔 주시겠어요?”
“뭐? 야, 이거 원래 내 파트 맞거든?”
“알아요. 근데 누나. 혹시 감기 걸리셨어요?”
“뭐라고…?”
“누나의 실력이 더 뛰어난 건 알겠어요. 헌데 음을 끌고 가는 호흡이 조금 불안정한 것 같아서…”
그러자 민하 곁에 앉아 있던 플롯 연주자가 깜짝 놀라 입을 열었다.
“어머, 쟤 정말 뭐야? 민하 너 아까 전에 연습실 도착하자마자, 감기 기운 있는 것 같다고 했잖아.”
석 교수는 자신조차 알아채지 못한 부분까지 민준이가 정확히 집어내자,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쩌면 이 녀석은 나랑 오 교수님이 생각했던 그 이상의 괴물일 수도 있단 말인가?’
결국 석 교수의 테스트에 통과한 민준이는 잠시 후 약속대로 석 교수에게서 지휘봉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양쪽을 잡고 가볍게 힘을 주면 톡하고 부러져 나갈 것만 같았던 지휘봉은 실제로 손에 들어보니 묘하게 손아귀에 착 감기는 느낌이 들었다.
석 교수는 학생들이 쉬는 동안 민준이에게 따로 기본적인 지휘법을 알려 주었다.
“자, 이렇게 오른손으로 가볍게 지휘봉은 쥐고, 이 걸로 단원들에게 템포와 리듬을 지시하는 거야. 그리고 왼손은 주로 경고(警告)에 쓰이지. 여기서 경고는 누구를 혼내는 단어가 아니라, 다음 파트에 들어갈 연주자들에게 준비하라는 의미와 같은 것이야. 명심해야 할
것은 저 단상에 선 순간. 너는 다른 연주자들보다 한 박자 먼저 곡을 암시하고 지정할 수 있어야 해. 그런데 너,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겠니?”
“음… 조금은요.”
“그래. 그저 알겠다고 뻥치는 사고뭉치 제자들보다 솔직해서 좋긴하네.”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민준이를 바라보며 빙긋 미소 짓던 석교수는 이내 몸을 돌려 학생들을 집중 시켰다.
“자~ 쉴 만큼 쉬었으면 시작하자.”
교수님의 박수 소리에 고쳐 앉은 아이들은 지휘봉을 들고 단상에 오르는 아이의 모습에 웃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석 교수님 진짜 저 아이한테 지휘를 시키려고 하는 거였어?”
“어디 꼬마 지휘자님의 실력 좀 구경해볼까?”
“귀여워. 지휘봉 너무 커보이는 거 아냐?”
“그래도 석 교수님이 알고 지내는 학생 같은데, 다들 너무 놀리지말고 진지하게 해주자.”
민준이는 자신을 향해 들려오는 형, 누나들의 목소리를 일절 무시한 채 단상에 올라 눈을 감았다.
“캬~ 분위기 잡는 것은 베토벤 뺨치네…”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어린 녀석이 겉멋 든 것 좀 보게.”
지휘봉 끝을 잡고 잠시 베토벤의 7번 교향곡을 떠올리는 민준에게 단원들이 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머릿속에 뒤죽박죽 섞여있는 모든 악기의 악보를 하나로 통합시키는게 최우선 과제였으니까.
“저기 꼬마야. 언제쯤 시작할거니? 형 누나들은 다 준비 됐는데.”
그러자 아이의 입에서 사뭇 진지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잠시만요.”
긴장한 듯한 아이의 모습에 가볍게 놀리려던 남학생은 아이의 섬뜩한 한 마디에 입을 다물었다. 석 교수는 오 선생의 옆자리에 앉아 그런 민준이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기본 적인 지휘법만 알려줬음에도 제법 지휘자 티 좀 나는데?’
그리고 잠시 후.
모든 정리가 끝난 민준이는 눈을 뜨자 가볍게 고개를 돌려 악장을 바라보았다.
꿀꺽…
자신도 모르게 아이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마른침을 삼켜낸 한동혁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바이올린에 활을 가져다 대었다.
그 순간 민준이는 마치 석 교수처럼 두 팔을 앞으로 내민 채 가볍게 왼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것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보내는 첫 음의 경고였다.
빰~!!
지휘자의 사인에 연주를 시작한 현악기들이 첫음을 연주하자 민준이는 재빨리 오보에 수석 자리를 바라보며 지휘봉을 움직였다.
“제법인데…?”
왼손으로는 현악기 파트를 주무르던 민준이는 이윽고 목관 악기와 호흡하며 천천히 지휘봉으로 호선을 그렸다.
그렇게 천천히 여물어가는 오케스트라의 분위기를 지켜보던 석 교수는 자신 모르게 미소가 흘러나왔다.
지휘를 해보고 싶다는 바람이 그저 어린아이의 투정이 아니었다는 것이 확실히 느껴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좋아. 한번 끝까지 해봐라….’
한편 현악과 목관 악기가 어우러지는 초반 연출 부분에서 민준이의 지휘를 받고 있는 대학생들은 칼 같이 정확하게 치고 들어오는 아이의 철두철미한 템포 조절에 애를 먹고 있었다.
‘어이, 자, 잠깐만.. 기다려 봐.’
‘저 녀석 대체 뭐야. 지휘 처음 해본다는 거 순 뻥 아냐?’
‘이거 까딱하면 내 밑장 다 드러날 판인데….’
이윽고 초반 부분을 지나 플롯을 주제로 한 목관 악기의 향연에서 방금 전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게 했던 구간에 접어 들자 민준이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비쳤다.
플롯과 오보에가 합동으로 주제를 이끌어 나가는 부분에서 호흡이 달렸던 민하를 대신해 임시 수석을 맡은 연주자는 플롯과 호흡하며 더욱 깔끔한 소리를 내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연주를 지켜보던 안나는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하모니에 깜짝 놀라 입을 열었다.
“그래 맞아. 바로 이 부분이었어…”
호수에 노니는 백조와 같이 산뜻하게 음을 헤엄쳐 나가는 플롯의 리듬에 모든 현악기가 떠받치듯 춤을 추기 시작하자, 민준이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모두 실어 힘껏 양팔을 휘둘렀다.
그 순간. 석 교수의 지휘와 마찬가지로 하늘 위에서 비처럼 음악이 쏟아져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민준에게 있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열정과 환희의 순간이었다.
한편 연주를 지켜보던 아이들은 민준이의 모습에 입이 떡 벌어진 채 차마 다 물지 못했고, 연주 중인 대학생들은 누구하나 뒤쳐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민준이의 지휘에 매달렸다.
‘여기서 쫓아가지 못하면 어디 가서 음대 나왔다고 할 수나 있겠냐….’
처음에는 장난삼아 맞춰주던 학생들은 지금 어느 순간부터 모두가 진지한 마음으로 연주에 임하고 있었다.
어린 민준이는 사방에 들려오는 다양한 악기들의 연주에 만족으로운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역시… 베토벤 선생님의 음악은 최고야.’
&
“감사합니다. 교수님. 덕분에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어요.”
“아닙니다. 오히려 민준이 덕분에 우리 제자들이 더 자극 받은 모양이던데요?”
오 선생과 인사를 나누던 석 교수는 시끌벅적한 연습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얘 너 이름이 뭐니?”
“네? 아, 차민준이요.”
“진짜 대단하다. 이름 꼭 기억할게.”
“아니, 그러지말고 누나가 삐삐번호 알려줄 테니까. 언제든 연락해 누나가 맛있는 거 사줄게.”
“아휴~ 귀여워.”
대학교 누나들에게 둘러 싸여 어쩔줄 몰라하는 민준이의 모습에 오 선생 마저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나저나 확실히 난 놈은 난 놈이군요.”
“네?”
“민준이 말입니다.”
“아… 교수님이 보시기엔 어떤가요?”
“민준이를 보니 제가 처음 지휘한 날이 떠오르네요.”
“와~ 석 교수님도 훌륭히 지휘를 하셨나 보네요.”
“아뇨. 너무 긴장해서 지휘봉을 뒤로 내던졌지 뭡니까.”
“네? 정말요?”
“예. 그리곤 너무 부끄러워서 한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다녔죠. 그런데 저 녀석. 그런 것을 아예 몰라요. 두려움이 없으니 무서운 것이 없고, 무서운 것이 없으니, 용감하고 과격하죠. 특히 경고를 주는 센스가 처음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해요. 마치…”
“마치…?”
“머릿속에 악보를 통째로 들고 다니는 사람처럼 말이죠.”
오 선생은 석 교수의 극찬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사실 처음 민준이가 지휘를 해보고 싶다고 했을 때, 오 선생은 그 날 밤을 설칠 정도로 걱정이 태산 같았다. 하지만 오늘 민준이의 지휘를 보고 나서 그녀는 한 결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안 그래도 부득이한 출장이 있어, 학교에 오지 못한 아버지가 아침에 지방으로 떠나시면서 내내 자신과 석 교수님을 부러워하셨는데, 아마도 오늘 벌어질 일은 예감하셨던 모양이다.
“송실장님께 걱정 말고 일을 추진 시켜도 된다고 전해야겠군요.”
“그러게요. 저도 아버지께 빨리 연락 그리고 싶어졌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한 가지 걱정이 있습니다.”
“걱정이요?”
“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것에는 연주 말고도 중요한 부분이 굉장히 많거든요. 이번 프로젝트 오케스트라는 민준이가 있는 연서 국민학교 말고도 영지나 다른 학교 학생들도 포함 된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아요.”
“하지만 민준이는 아직 4학년이죠. 5학년이나 6학년 학생들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으면 민준이의 지휘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분명 문제가 생겨날 것입니다. 아이들은 순수하지만, 순수한 만큼 질투도 심하니까요. 자신이 어떻게 해볼 수조차 없는 재능 앞에서 아이들의 극단적인 이기심이 드러날 때가 종종 있거든요. 뭐 물론 그런점은 오 선생님이 더 잘 아시겠지만요.”
석교수의 말은 사실이었다.
국민학교 교사인 오 수정 역시 그 점이 가장 불안했으니까. 더구나 연서에는 민준이와 함께 오케스트라를 나가줄 학생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결국 태반은 영지 국민학교 아이들로 채워지겠지…
방금 전 만해도 악기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민준이와 진아를 두고 시시덕거리던 아이들이 떠오르자, 그녀의 불안은 점점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과연 내가 저 아이들을 데리고 잘 해쳐나갈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에 안스러운 눈빛으로 민준이를 바라보는데 자신의 옷깃을 누군가 잡아 끄는게 느껴졌다.
“선생님. 저기요…”
자신을 부른 것은 다름 아닌 부반장 진아였다.
“오, 그래 진아야.”
“저기 선생님. 저 궁금한게 있는데요.”
“응?”
“저기 저 언니가 지금 들고 있는 악기. 저거 많이 비싼가요?”
“음? 설마 오보에를 말하는 거니?”
“그 악기 이름이 오보에에요?”
진아의 물음에 오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는 그녀에게 한 가지를 더 물어 보았다.
“저도 만약에 오보에를 배운다면 민준이와 함께 오케스트라에 나갈 수 있나요?”
“뭐? 진아 네가 오보에를..?
선생님은 진아의 부탁에 깜짝 놀라며 잠시 민준이를 바라보았다.
형 누나들 사이에서 해맑게 웃고 있던 아이는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를 향해 쪼르르 달려왔다.
진아는 민준이가 다가오자 부끄러운지 그녀 뒤로 몸을 숨겼다.
그렇게 민준이 곁에 있는 아이들이 하나 둘씩 음악에 물들어가는 모습에 오 선생은 석 교수에게 말을 건네었다.
“분명 민준이라면 어떤 아이들이라도 잘 이끌어 낼 수 있을 거라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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