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Ep.8 : 어린이 오케스트라. (1)
1994년 5월 초순의 어느 주말.
J대 오케스트라 연습실.
토요일이라 학교 안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한산했지만, 본관 지하에 위치한 관현악 실습실은 굉장히 어수선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해마다 열리는 J대학 축제는 언제나 웅장한 오케스트라와 함께 시작하기에 각 학과의 대표로 뽑힌 학생들은 오늘도 학교에 나와 연습을 강행하고 있었다.
“아, 짜증나. 주말인데 오늘까지 꼭 연습해야 돼?”
“누가 아니래. 나 오늘 Y대 무용과 애들이랑 미팅있었는데…”
“뭐? 무용과? 왜 그걸 지금 말해!! 나는? 나는!?”
아직 교수님이 도착하시기 전이기에 악기를 조정 중인 학생들의 입이 쉴 새 없이 움직이자, 악장을 맡고 있는 동혁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학생들을 진정 시켰다.
“다들 축제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조금만 참자. 곧 교수님 도착 하신다고 연락 받았으니까 다들 준비 해.”
“오늘은 어느 교수님인데? 아니 애초에 우리는 매주 나오는데, 교수들은 왜 순번대로 돌아가면서 감독하냐구. 짜증나.”
오보에를 담당하는 민하는 조그만 입술을 삐쭉 내밀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단원들도 하나둘 마음에 담아 두고 있던 말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동혁이는 그런 단원들을 진정시키며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라고 교수님들 사정을 알겠냐. 그래도 오케스트라 참가자들은 기말 평가도 제외 시켜주시고 학점도 좋게 주시잖아. 너희도 그것 때문에 모인 거 아냐?”
“아, 그냥 차라리 기말 평가 볼 걸 그랬어. 평일에 수업 끝나고 연습하는 것도 열 받는데, 주말까지 이게 뭐야.”
그때 연습실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연습이 지겨우면 지금이라도 관 둬도 괜찮은데?”
“헉… 석동철 교수다..”
“어억. 오늘 감독관이 석 교수였어?”
“젠장. 오늘 집에 가긴 다 틀렸네.”
자신을 향해 수근대는 목소리에 석 교수는 강단을 향해 뚜벅뚜벅 발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다 들린다. 이 놈들아. 텐트 안에 모기들 마냥 앵앵거리지말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똑바로 일어나서 하도록. 3초 줄게.”
그러자 방금 전까지 웅성이던 소음이 일순 잦아들었다.
석 교수는 침묵 속에서 학생들을 빙 둘러본 후.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도 불만이 없나보군. 좋아. 다들 개인 연습은 많이 해왔나?”
하지만 역시나 이번 질문에도 학생들은 모두 침묵을 일관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석 교수는 오히려 달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연습 좀 해라. 이 놈들아. 너희 인생 목표는 우리 대학에 들어오는 거였냐? 아무튼 입시 때는 죽기 살기로 연습하던 녀석들이 어째 대학 문턱만 넘어서면 골인한 마라톤 선수처럼 다들 디비지는지…”
피아노 학과 교수인 석 동철 교수는 교내에서 레슨이 빡세기로 유명한 교수 중 하나였다.
그거 감독하는 이상 오늘 연습은 그가 만족할 때까지 해야 한다는 생각에 놀기 좋아하는 학생들 표정은 하나 같이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연습을 시작하기 전에 오늘은 우리 연습실에 특별한 손님들이 찾아오셨다.”
“손님?”
“누구지? 다른 교수님도 오셨나?”
지금까지 연습하는 동안 교수님들 말고 아무도 찾아온 적이 없었기에 학생들은 모두 의아한 표정으로 입구만 바라보았다.
그때 한 남자 아이가 문틈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어머, 귀여워. 넌 누구니?”
평소 아이를 좋아하는 오보에 수석인 민하가 남자 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부끄러웠는지 남자 아이는 문틈 사이로 사라졌다.
“누구야? 쟨?”
“뭐야? 방금 저기 누가 있었어?”
“꼬마 아이던데?”
그때 석 교수가 헛기침을 내지르며 남자 아이를 향해 외쳤다.
“들어와도 괜찮아.”
그러자 한 여성의 인도 아래 남자아이를 비롯한 몇몇 아이들이 졸졸졸 연습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정체는 오 선생과 차민준 그리고 소희와 진아. 그리고 안나를 포함한 몇몇 영지 국민학교 아이들이었다.
“뭐야? 웬 꼬맹이들이 우리 대학에…?”
“쟤들 좀 봐. 너무 귀여워~”
“나도 한 때 저런 때가 있었는데..”
학생들이 아이들을 바라보며 너도 나도 한마디씩 입을 열자, 연습실 안은 어느새 학생들의 웅성이는 목소리로 가득 차올랐다.
오 선생이 데리고 온 아이들이 모두 들어와 나란히 서자, 석 교수는 박수로 학생들을 집중 시키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이 아이들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특별한 소식 하나를 알려주지. 지난주에 이야기 나왔던 YMCA 주최 오케스트라 대회가 내부 회의 결과. 올해 12월 달로 확정이 되었다. 아직 공식 발표는 없지만, 이건 확정된 사항이라고 봐도 좋아. 그러니 졸업 후 이력서
에 경력 한 줄이라도 더 써 붙이고 싶은 학생은 이번 오케스트라 연주에 사활을 걸어야 할 거야. 알겠냐?”
“진짜요? 오~!! 대박.”
사실 국내에서 오케스트라 대회 같은 대규모 이벤트는 굉장히 드물었기에 이야기가 나왔어도 반신반의 했던 대학생들은 석 교수의 발표에 깜짝 놀랐다.
졸업 후. 조그만 악단에라도 들어가려면 무대에서 오케스트라를 연주해본 경험이 필수적이었는데, 대학생 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학교에서가 아니면 그런 경험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어린이들은 연말에 열리는 오케스트라 대회를 목표로 준비 중인 아이들이다.”
“네? 저 아이들도 오케스트라 대회에 참가한다구요?”
“그래. 그러니까 정확히 반년쯤 뒤에 너희들의 라이벌이란 거지.”
“어머, 세상에…”
안나는 자신을 꼬맹이 취급하는 대학생 언니 오빠들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석 혜인 언니의 오빠라는 석 교수님을 생각해 화를 꾹 눌러 삼켰다.
‘안 돼. 참아야지. 반년 뒤에 실력으로 눌러주면 그만이니까.’
안나는 그렇게 생각을 굳히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이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너희들의 연주를 견학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제발 부탁인데 언니, 오빠들로서 부끄럽지 않게 제대로 된 연주를 보여주길 바란다. 알겠지? 자~ 다들 준비 됐으면 시작하자.”
석 동철은 피아노 학과 전임 교수였지만, 지휘에도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었기에 학생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악기를 들어올렸다.
“연습곡. 베토벤 7번 교향곡 1악장. 시작은 가볍게…”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인 한동혁에게 눈빛으로 사인을 보낸 석 동철은 가볍게 자신의 손끝에 걸린 지휘봉을 흔들었다.
그 순간. 그의 지휘봉은 마치 마법사의 지팡이처럼 그 끝으로 아름다운 음색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아….’
그것은 어린 민준에게는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분명 저 작은 막대기에서는 아무소리도 나오지 않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작은 지휘봉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악기를 연주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마스터 키 와도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마스터 키에 가장 먼저 걸린 음색은 수석 오보에를 맡고 있는 민하의 연주였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현악기의 울림 속에서 고고하게 빛나는 그녀의 오보에는 민준이 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의 시선을 빼앗기에도 충분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진아는 예쁜 언니가 연주중인 오보에의 소리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일까?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민준이에게 물었다.
“저 악기, 소리가 엄청 예쁘다. 이름이 뭐야?”
하지만 민준이 역시 오케스트라 연주를 처음 보는 터라 악기의 이름을 자세히 알진 못했다.
“그, 글쎄? 아마도 피리의 일종 아닐까?”
그때 안나와 함께 온 영지 국민학교 아이들이 민준이와 진아의 대화를 엿듣고 숨죽여 키득대었다.
“피리래~ 아, 미치겠다. 쟤네들 뭐냐?”
“그러게 오보에도 모르나 봐. 오케스트라 한다는 애들이 악기 이름도 제대로 모르다니. 한심하다. 한심해.”
“누가 아니래. 그러니까 우리 학교 애들로만 뽑으면 얼마나 좋아.”
안나는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같은 학교 아이들의 목소리에 눈썹을 찌푸렸다.
‘자기네들은 얼마나 잘 안다고 나대는지.’
결국 보다 못해 안나가 키득거리는 아이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입을 열었다.
“좀 조용히 좀 해줄래? 시끄러워서 연주를 들을 수가 없잖아.”
그러자 안나보다 한 학년 낮은 아이들은 그녀의 목소리에 곧바로 숨을 죽인 채 오케스트라에 집중했다.
오 선생은 그런 아이의 모습에 빙긋 웃으며 생각했다.
‘어머, 그래도 제법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네. 마냥 부잣집 말괄량이 아가씨는 아니었구나.’
그때 현악기의 울림이 커질수록 목관 악기와 타악기가 더해지며 베토벤의 7번 교향곡은 초반부터 웅장한 느낌을 선사해주었다.
7번은 베토벤 교향곡 중에서도 가장 낙관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교향곡으로 곡 전체가 환희를 향해 점차 나아가는 듯한 인상을 전해주었다.
이미 오케스트라 연주에 흠뻑 빠져든 민준이는 수 십개의 악기들이 서로 얽히며 이루어지는 거대한 화음에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집중하고 있었다.
석 교수의 지휘는 지난 번 비디오에서 보았던 카라얀 과는 굉장히 대조되는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곡의 분위기 자체가 9번 교향곡와 완전히 다른 탓도 있었지만, 마치 온몸으로 음악을 표현해 내는 듯한 카라얀의 지휘와는 달리 석 교수의 지휘 스킬은 굉장히 가벼우면서도 부드러웠다.
J 대학의 학생들 역시 석 교수의 까다로운 수업 방식과 입담이 짜증나긴 했지만, 그래도 지휘봉은 잡아주는 교수들 중에선 석교수의 지휘를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덕분에 단원들과 석 교수의 음악적 견해는 제법 일치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일까 석 교수의 작은 몸짓에도 학생들은 악보와 그의 지휘를 번갈아 바라보며 하나의 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멋지다….’
9번 교향곡을 전신으로 표현해내던 카라얀의 지휘도 멋있었지만, 마치 모든 악기들의 가려운 구석을 콕콕 집어 다루는 석 교수의 지휘 또한 굉장히 멋졌다.
오 선생 또한 자신이 알고 있는 7번 교향곡과는 조금 다르게 최대한 음을 길게 끌어 경쾌하게 치고 나가는 석 교수의 지휘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에게 듣기로는 피아노 전공이라 들었는데, 지휘 솜씨도 훌륭하시구나. 그런데 대체 민준이에게 어떤 테스트 시키려는 걸까?’
아버지에게 석교수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오 선생은 문득 그 점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플롯의 상쾌한 등장과 함께 모든 현악기들이 플롯의 소리에 춤추듯 점차 소리를 높여 간 순간. 하늘 높이 올라 간 모든 악기들의 소리가 동시에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와아~”
“이게 오케스트라 연주구나…”
수 십개의 악기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화음은 연주를 지켜보는 아이들에게 짜릿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석 교수는 지휘 중에 살짝 고개를 돌려 민준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예상대로 녀석은 오케스트라 악단의 연주에 흠뻑 빠져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표정만 놓고 보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녀석 같구만….’
잠시 후. 약 14분 가량의 연주가 절정에 오르자, 클라이막스인 만큼 석 교수마저 힘차게 팔을 휘두르며 학생들을 독려했다.
현악기와 목관, 그리고 타악기까지 베토벤의 7번 교향곡은 석교수의 지휘 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연주를 지켜보는 아이들마저 점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 순간. 석 교수의 지휘봉이 깔끔한 호선을 그리며 멈추자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든 연주가 끝을 맺었다.
“좋았어. 첫 연주 치고 다들 나쁘지 않은데?”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어서일까? 실수하지 않기 위해 잔뜩 긴장했던 탓에 석 교수가 말을 마치자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푸하…”
“아이고, 죽겠다..”
“마지막에 템포 따라가다가 피 토하는 줄 알았네..”
“그러게 담배 좀 끊으래도…”
무대를 지켜보던 오 선생과 아이들은 언니, 오빠들의 멋진 연주에 힘찬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때 단상에서 내려온 석 교수가 아이들에게로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우리 꼬마 신사 숙녀들의 감상을 한번 들어볼까?”
그는 기대에 찬 눈초리로 아이들 한명 한명에게 연주에 대한 감상을 물었다.
대부분 훌륭했다. 굉장했다. 멋지다란 말이 대부분이었는데, 송 실장의 동생이라던 안나 만큼은 조금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잘 표현은 모르겠지만, 미묘하게 부분 부분 리듬이 틀어졌던 것 같은데..”
그 순간 석 교수를 비롯해 몇몇 학생들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래?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느꼈지?”
“그게, 워낙 순식간에 지나쳐서 딱히 어느 부분이 이상하다고 설명하기가 애매한데…”
“그렇군. 좋아. 다음?”
안나를 지나며 연서 국민학교 학생들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던진 그는 마지막으로 민준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눈앞에서 보는 건 소희네 집 앞에서 봤을 때 이후로 처음이구나. 그래. 민준군은 어땠니?”
그러자 민준이의 눈빛은 석교수를 지나쳐 뒤쪽의 단상을 향했다.
“저기… 선생님? 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응? 아, 뭐 좋을 대로 편하게 부르렴.”
“그럼 저, 선생님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부탁?”
“제가 한 번 지휘를 해봐도 될까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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