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Ep.6 : 선생님께. (12)
“정옥분 선생님. 선생님께 이 상금 전부 드릴게요.”
“뭐?”
생각지도 못한 민준의 행동에 정 선생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그 대신. 이제 저희 집에 찾아오셔서 우리 할머니 그만 괴롭히셨으면 해요.”
“얘, 얘가 지금 대체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며칠 전에 선생님께서 저희 집에 오셨다 가신 거 알고 있어요.”
“뭐라고!?”
민준이의 말에 정옥분 선생은 며 칠 전 민준이네 집을 찾아간 일을 떠올렸다.
그것은 일종의 보험이었다.
그렇게나 민준이의 피아노 실력을 극찬하는 오 선생의 이야기를 들은 정옥분은 그날 학교가 끝나고 힘들게 민준이네 집을 찾았다.
이제까지 자신에게 돈 한 푼주지 않은 가난한 살림.
하지만 만약에 민준이가 상금을 탄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여우같은 오수정 선생이 선수를 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대회 참가 자격을 내주는 척 하며 미리 상금 분배에 못을 박아 두고 싶었던 그녀는 달동네 꼭대기에 위치한 민준이의 집을 어렵게찾은 적이 있었다.
‘설마 그 때 내 이야기를 들은 거야?’
아이의 입에서 불쑥 튀어 나온 말로 인해 방금 전까지 떠들썩하던 무대 분위기가 한순간 싸늘히 식어버렸다.
선생이 수상자의 학생 집에 찾아가 할머니를 괴롭혔다니, 사실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때 한 기자가 차분하게 민준이와 눈높이를 맞추며 다시 물었다.
“차민준 학생. 혹시 대회장에 부모님은 같이 안 왔니?”
“저는 부모님이 안계세요. 대신 할머니랑 둘이 같이 살아요.”
“그래? 그럼 할머니는 어디 계시니?”
“집에요. 무릎이 불편하셔서…”
“그렇구나. 그런데 선생님께서 왜 학생의 집에 찾아가 할머니를 괴롭혔지?”
기자의 마지막 질문에 아이는 300만원이 적혀진 판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돈 때문에요.”
“돈? 선생님이 왜 할머니한테 돈을 달라고 하셨을까?”
능숙하게 아이에게서 답변을 이끌어 내는 기자의 질문에 정옥분 선생의 손끝이 부르르 떨려왔다.
[어쩌지. 여기서 이 녀석이 모두 까발려버리면 난 정말…]
민준은 미칠듯이 쿵쾅거리는 정 선생의 심장 고동소리에 대답을 망설였지만, 이내 결국 마음을 다잡았다.
대회가 열리기 며칠 전. 선생님이 자신의 집에 다녀간 이후로 스스로 결심했었으니까.
“선생님께선 그때 할머니께 제가 만약에 대회에서 상금을 타면 그중에 절반을 내놓으라고 하셨어요.”
“뭐…? 그게 정말이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의 모습에 시상식을 지켜보던 객석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머, 저런 쳐 죽일… 어머, 세상에…”
“선생님이란 작자가 어쩌면 저런…”
“저래 놓고선 아이 손잡고 무대에 올라오고 싶었을까? 정말이지 뻔뻔하기도 해라.”
“누가 아니래. 어휴… 우리 아이가 저런 선생 만날까 무섭네.”
그리고 잠시 후. 웅성거리는 객석의 반응 속에 이마에 송글 송글 땀이 맺힌 정 선생을 향해 엄청난 질문 공세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선생님. 지금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학생이 한 말이 정말인가요?”
“정말 상금의 절반을 달라고 하셨습니까?”
“네? 아니, 저는… 그게 학생을 더 잘 보살피기 위해…”
“그게 뭔소립니까. 대놓고 학생 보호자에게 촌지를 요청한 것 아닙니까?”
최근 학교 선생님들의 촌지 비리가 뉴스에서 자주 오르 내리곤 했는데, 설마 대회 출전 기회를 놓고 직접 학생 보호자를 찾아가 당당하게 현물을 요구하다니. 이건 중대한 뉴스감이었다.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사람들의 질문에 정 선생의 머릿속이 새하애지는 기분이었다.
또한 그것은 객석에 앉아있던 연서 국민학교 소속의 선생들도 마찬가지였다.
‘하필이면 기자들까지 있는 이런 자리에서….’
최악의 타이밍이다.
그동안 정 옥분 선생의 행실을 수수방관하던 연서 국민학교 교감은 이 순간 뼈저린 후회를 느꼈다.
안 그래도 최근에 정 선생이 외부에서 학부모를 만나고 다닌다는 안 좋은 이야기가 계속 들려와 주의를 주려던 참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학교의 치부가 드러날 줄이야…
“크흠… 교감 선생.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어서 가서 기자들 좀 말려 보세요. 구경만 하실 겁니까?”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 교장의 추궁에 그는 서둘러 사태를 가라앉히려 무대로 달려갔다.
“저기, 기자님들. 여기서 이러실 게 아니라 나중에 저희 본교에서 따로 이야기를…”
“누구시죠? 혹시 학생이 다니는 국민학교 관계자신가요?”
“연서 국민학교 교감 입니다.”
한편 객석에서 축하 박수를 보내던 두 교수는 소란스러워진 무대 분위기에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촌지인가…”
“최근 교내 비리가 만연하다 들었지만, 설마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대회 출전권을 빌미로 저 정도까지 할 줄이야…”
“서로 쉬쉬하며 눈감아 주다가 결국 곪아터진게지. 안 그래도 우리 딸아이가 많이 속상해했었는데. 이런 식으로라도 알려져서 다행이군…”
“같은 교직에 종사하는 한 사람으로서 씁쓸하네요.”
“아마 우리 대학에도 저런 식으로 뒷돈을 챙기는 교수들이 한 둘이 아닐 걸세.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꼬투리를 잡지 못할 뿐이지.”
그때 민준이에게 상패를 전달했던 교육부 직원 몇몇이 큰소리를 내었다.
“다들 진정하시고, 조용히 좀 해주세요!!”
“······.”
“······.”
어른들에게 둘러 싸여있던 민준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엄청 일이 커졌다는 것을 느꼈다.
단지 돈을 원하는 선생님께 상금을 주고 다시는 할머니를 만나지 않게 하려던 것뿐인데…
숨이 멈출 듯 한 정적 속에서 교육부 관계자 중에서도 꽤나 직위가 높아 보이는 사람이 나섰다.
“연서 국민학교 담임교사라고 하셨죠? 이번일이 사실이라면 저희 교육부 징계위원회에 정식으로 회부될 겁니다. 우선 학교로 돌아가셔서 조사와 처분을 기다리세요.”
그러자 다급한 목소리로 정 옥분 선생이 울분을 토해내었다.
“전 정말 억울합니다!! 어떻게 어린 학생 이야기만 듣고,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결정을 내립니까!! 전 정말 학부모들에게 10원 한 장 받은 적 없어요!!”
“정 선생. 여기서 고함을 지르면 나중에 조사 받을 때 입장만 더 난처해집니다. 박 선생 어딨어요!? 정 옥분 선생님 데리고 먼저 학교로 돌아가세요.”
“네? 아, 네!! 교감선생님!!”
체육 담당 박 찬수는 교감 선생님의 요청에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정 옥분 선생을 끌어내었다.
“자, 선생님. 일 크게 만들지 마시고 일단 저랑 학교로 돌아가시죠.”
“놔!! 내가 지금 이 꼴로 돌아가면 나 혼자 독박 쓸게 뻔한데, 내가 왜 돌아가!!”
하지만 젊은 체육선생의 손아귀를 쉽게 뿌리칠 수 없던 정 선생은 결국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듯 쑥대밭이 되어 버린 시상식 분위기는 도저히 수습이 불가능해 보였다.
그때 무대 위에서 그레이스 백화점의 젊은 실장 하나가 박수로 분위기를 환기 시켰다.
두말할 필요 없이 홍보 기획실의 송현우 실장이었다.
“자, 여러분. 이쯤 하셨으면 그만 하시죠. 방금 쫓겨난 선생의 취재를 계속 하고 싶으시다면 그대로 곧장 행사장을 나가주시길 바랍니다. 아직 멀리 못가셨을테니까요. 지금 이 자리는 차민준 어린이의 시상식 자리입니다. 관계자 분들은 모두 자리에 앉아 주세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무대 위에 홀로 남은 아이를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송 실장은 바닥에 놓여진 상패와 꽃다발을 챙겨 들고는 민준이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이거 시상식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겠는걸?”
잠시 후. 민준이의 시상식은 송 실장의 요청에 따라 처음부터 다시 진행하게 되었다.
이전 무대와 달라진 것은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무대에 오른 사람이 오수정 선생이라는 것 뿐. 하지만 민준이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밝은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다시 꽃다발과 상패를 수여받은 민준에게 송 실장은 대회 상금이 적힌 판넬을 들고 무대 위에서 기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희 그레이스 백화점에서는 차민준 군에게 상금 수여는 물론, 차후 교육 지원에도 힘쓸 예정입니다. 안타까운 사정으로 아이의 재능이 묻히지 않도록 다방면으로 차민준 군을 지원 하도록 하겠습니다.”
송 실장의 깜짝 발언에 기자들은 서둘러 그의 말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
또한 판정단으로 공연에 참석했던 고객들에게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잘됐네. 잘됐어.”
“대기업에서 아이를 후원해준다니, 부러워라.”
“저 정도 실력이면 후원할 만 하지.”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송 실장을 한쪽 무릎을 꿇고 민준이에게 판넬을 전달해 주었다.
“이건 네가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결과물이야. 그러니 누구한테도 함부로 건네주면 안 되는 거란다. 내가 하는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오선생님의 손을 잡고 있던 민준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송 실장은 아이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자, 기념 촬영 시간이야. 저 쪽 보고. 김~치~”
* * *
대회가 끝나고 돌아온 월요일.
교실 안 분위기는 굉장히 어수선했다.
“진짜? 그게 정말이야?”
“그렇다니깐~”
부반장인 진아에게 뒤늦게 선생님 소식을 들은 아이들은 모두가 깜짝 놀라 나를 찾아왔다.
“민준아, 진아가 하는 말 정말이야?”
“응.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
“우와. 너 진짜 대형사고 쳤구나.”
“하하… 그러게..”
“그래도 오히려 잘 된 거 아냐? 일이 좀 복잡해 보이긴 하지만, 아무튼 난 찬성.”
축구공을 튕기던 승우가 자신의 머리 위에 공을 올린 채 중얼 거렸다.
솔직히 그런 식으로 일이 커지게 될 줄이야.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쿵쾅 거릴 정도니…
그래도 상패를 들고 오 선생님과 돌아온 토요일 오후.
할머니께선 나를 끌어안고 덩실덩실 춤까지 추셨던 걸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빙긋 웃음이 흘러 나왔다.
“그럼 담임선생님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아마도 당분간 학교에 못 나오시지 않을까? 지금까지 교실에 안 들어오신걸 보면?”
그랬다. 이미 아침 조회 시간이었지만, 담임인 정옥분 선생님은 아직도 교실에 오지 않으셨다. 오 선생님 말로는 따로 조사가 있을 때까지 근신 중이라고 듣긴 했는데, 그럼 우리들 수업은 어떡하지?
그때였다.
정옥분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로 시끌벅적하던 교실 문이 갑자기 드르륵 열렸다.
‘설마 정옥분 선생님이면 어쩌지!? 날 보면 엄청 혼내실텐데….’
귀신이라도 지나간 듯 고요해진 분위기 속에서 모두의 시선이 앞문을 향하자 그곳엔 굉장히 익숙한 선생님이 천천히 교탁으로 걸어와 칠판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오 수 정.
“이미 다들 알겠지만, 오늘부터 4학년 6반 임시 담임을 맡게 된 오 수정 입니다. 언제까지 담임을 맡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모두들 잘 부탁해요.”
그러자 교실에 모인 아이들의 입에서 일제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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