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Ep.6 : 선생님께. (10)
“가로 현을 이용하는 그랜드 피아노는 연타가 빠릅니다. 세로 현을 사용하는 업라이트 피아노와는 건반이 돌아오는 속도가 확연하게 차이가 나죠.”
주로 콩쿨이나 연주회에서 사용되는 그랜드 피아노는 부피가 커서 가정용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대신 업라이트 피아노 보다 소리의 울림이나 깊이가 달랐다.
하지만 그런 점을 제외하고서라도 최고의 이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현이 가로로 누워있다는 점이었다.
건반을 누를 때마다 솟아오르는 해머가 현을 때리고 나면, 그 즉시 중력의 힘으로 가라앉으며 건반의 탄성을 빠르게 복구시킨다.
바로 그 작은 차이가 같은 속도로 피아노를 치더라도 더욱 빠른 템포를 가질 수 있게 해주는 무기가 되었다.
‘하지만 저렇게 어린 녀석이 어떻게 그랜드 피아노의 이점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을까?’
송 실장에게 피아노의 비밀을 알려준 석 교수 역시도 그것만큼은 굉장히 미스터리한 부분이었다.
한편 무대 위에 민준이는 자신의 터치에 무섭도록 정확하게 반응하는 건반의 복구력에 감탄 중이었다.
‘조금 더, 속도를 높여도 될 것 같은데?’
구교사의 오래된 피아노에 익숙해져있던 민준에게 대회용 피아노는 그야말로 날카로운 칼끝을 걷는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이 아니면 두 번 다시 이런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소년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지금 이곳이 대회장이라는 사실을 깡그리 지워버렸다.
오직 무대 위에는 피아노와 자신 뿐. 그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았다.
‘어이, 설마 여기서 템포를 더 올리려는 거냐?’
월광 소나타 3악장은 단순히 빠르기만한 곡은 아니었다. 성난 파도처럼 템포가 빠른 구간이 있는 가하면 호숫가의 잔물결을 연상케 하듯 부드럽게 흘러가는 구간도 있었다.
반복적인 흐름 탓에 얼핏 듣기에는 몇 번이고 같은 구간을 연달아 연주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민준의 피아노는 한 구간을 통과 할 때마다 그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자동차로 비교한다면 최고급 스포츠카에 올라탄 듯 한 아주 상쾌한 속도감이었다.
‘기가 찰 노릇이군. 저 녀석 정말 죽은 베토벤의 현신(現身)이라도 되는 거냐….’
오 교수도 석 교수와 같은 기분이었는지 허탈한 웃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이곳에 모여 있는 청중들은 무대 위의 어린 피아니스트에게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었다.
저 아이에게 그들은 그저 있으나 마나한 미생물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석 교수는 3악장의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저 아이의 머릿속에는 어떤 풍경이 펼쳐져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게 만든 것은 석교수의 인생을 통틀어 민준이가 두 번째였다.
오랜만에 느끼는 전율 속에서 석 동철은 떨리는 자신의 오른손을 꽉 움켜쥐었다.
‘만약에 그 아이가 살아있다면 언젠가 둘이 꼭 만나게 해주고 싶군.’
&
새하얀 건반 위를 정신없이 날아다니던 민준의 손끝이 절정에 다다른 순간.
아이의 머릿속에선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베토벤의 이야기가 한편의 영화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조각난 기억이 흩날리듯이 부분 부분 스쳐가는 베토벤의 모습에 민준은 그만 건반에서 손을 놓을 뻔했다.
-정신 차려라. 꼬맹이. 여기서 관두면 넌 그냥 죽도 밥도 안 되는 거야.-
어디선가 들려온 자신을 꾸짖는 베토벤의 목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민준은 다시 연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3악장의 절정을 무사히 넘긴 민준은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연주를 마칠 수 있었다.
“······.”
“······.”
모두가 숨죽인 고요한 홀에는 어린 아이의 거친 숨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하아.. 하아…”
-녀석. 제법이었다. 기억해두지.-
또 다시 들려온 베토벤의 목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어 올리자, 눈앞에 수많은 사람들의 함성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
“최고다!!”
“난 6번. 무조건 6번!!”
“나도!!”
홀이 발칵 뒤집혀질 정도의 환호성에 당황한 사회자가 서둘러 마이크를 들었다.
“여러분. 투표는 아이들의 연주를 모두 듣고 나서 정해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관객들은 너도 나도 팔을 걷어 부치고, 서로에서 닭살 돋은 걸 확인 시켜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런 연주는 처음이야.”
“클래식이 이렇게 감동적일 줄이야…”
“방금 저 아이 친 곡 베토벤이랬지? 돌아가는 길에 레코드 점이라도 들러야겠어.”
과열된 흥분으로 분위기가 제대로 수습이 되지 않자, 송 실장은 서둘러 사회자에게 달려가 귓속말을 전하였다.
“방금 6번째 연주자인 차민준 군을 끝으로 잠시 휴식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20분 뒤에 연주가 시작될 예정이니, 다시 이곳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본래 인터 미션은 8번째 연주가 끝나고 나서 진행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만약에 이대로 대회를 진행 했더라면 7번째 연주자는 부담감에 스스로 무너졌을 가능성이 높았기에 석 교수는 송 실장의 적절한 판단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바싹 숨을 조여 왔던 긴장이 풀리자, 오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바람 좀 쏘이고 오겠네…”
“같이 가시죠.”
잠시 후. 백화점 옥상에 마련된 휴게실에 나오자마자 오 교수와 석 교수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서울 한복판 공기가 그리 맑진 않겠지만, 그런 것 따위 지금 그들에겐 아무 상관이 없었다.
방금 바다 한가운데 수심 20m 구간까지 15분간 잠수하고 돌아온 기분이었으니까.
“괴물이더군.”
“특히 마지막 3악장에서의 그 템포는 저 조차 따라 하기 힘들 것 같더군요.”
“다이아몬드의 원석이라도 발견한 기분이야.”
“적절한 비유이십니다.”
“헌데 다이아몬드를 세공 하려면 똑같은 다이아몬드가 필요할 텐데, 과연 저 아이에게 어울릴만한 그런 선생이 국내에 있을까?”
그것 역시 맞는 말이었다.
괜스레 어줍잖은 피아노 선생을 옆에 붙였다간 오히려 아이의 실력이 퇴보 할 수도 있으니까.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꺼내 문 오 교수는 마찬가지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 석 교수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강한 바람에 불이 잘 붙지 않는지 일회용 라이터를 흔들어 대던 석 교수는 자신을 바라보는 오 교수의 심상치 않은 눈빛에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아직 아무 말도 안했네만.”
“그럼 그냥 아무 말씀 마시고 접어 두세요.”
“하지만 저 아이를 그냥 저렇게 내버려 둘 순 없지 않은가?”
손으로 라이터를 가리고 겨우 담배에 불을 붙인 석 교수는 길게 담배 한 모금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민준이에게 선생이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뭐!? 그게 정말인가?”
“확실한 것은 아녜요. 하지만 지난 예전선 때보다 실력이 확실히 나아졌어요. 피아노를 마주 대하는 눈빛이 그때랑은 확연히 달랐거든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대체 누구한테 레슨을 받고 있을지 궁금하군.”
“글쎄요. 차라리 베토벤에게 직접 지도라도 받지 않는 이상 불가능 하지 않을까요?”
“허허~ 자네 이제 보니, 농담이 제법이군.”
“아무튼 이대로만 자란다면 분명 클래식계에 금방 두각을 나타낼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쇼팽 콩쿨이 열리는 게 언제더라?”
“5년마다 개최하니, 그럭저럭 내후년 정도가 되겠군요.”
“2년 뒤라. 그렇다면 기대해볼만 하겠어.”
“오 교수님 설마?”
&
한편 대기실에서 민준의 연주를 모니터 중이던 안나는 황당함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느 정도 버거운 상대라 예상은 했지만 방금 전의 연주는 그 수준을 훨씬 넘어서 있었다.
물론 클래식이란 개개인의 곡 해석에 따라 그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지기도 하지만…
‘이건 좀 너무 하잖아? 대체 다음 사람은 어떡하라고….’
다행히 20분간 쉬는 시간이 주어지긴 했지만, 한없이 조여진 마음을 추스르기엔 너무나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만큼 민준이가 보여준 월광 소나타는 훌륭했고, 또한 날카로웠다.
클래식 감상에 날카롭다는 평이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3악장만큼은 정말 소름이 돋아날 정도로 단 한 번의 미스 터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며 민준이가 모습을 드러내자, 묘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안나 조차도 연주를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할지 망설이던 찰나, 민준이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대기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민준아 너 괜찮니?”
지쳐 보이는 민준이는 오수정 선생이 다가가자, 쓰러지듯 그녀에게 몸을 기대었다.
“선생님. 너무 피곤해요. 저 조금만 잘게요…”
15분간의 연주에 모든 걸 쏟아 부은 아이는 그대로 오 선생님의 품 안에서 축 늘어졌다.
혹시나 열은 없는지 민준이의 이곳저곳을 살핀 오수정 선생은 이내 아이가 정말 잠들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의자에 민준이를 눕혀 주었다.
“선생님. 민준이 괜찮아요?”
소희의 물음에 오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든 민준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응. 조금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야. 걱정마렴.”
하나의 곡을 끝까지 연주하기엔 체력도 체력이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하다.
11살의 어린 나이에 그렇게나 훌륭한 연주를 보여주었으니, 이렇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오히려 중간에 연주가 끊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랄까?
소희는 그런 민준이를 가만히 바라보다 땀에 젖은 아이의 이마를 닦아 주었다.
“정말 굉장한 연주였어. 나도 힘낼게”
그런 소희와 민준이를 멀리서 바라보던 안나는 이내 새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럴 땐 괜히 민준이랑 다른 학교라는 것이 짜증나는 그녀였다.
‘나도 연서 국민학교로 전학 시켜달라고 할까?’
하지만 이미 6학년인 그녀가 전학을 가기엔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그래. 조금만 기다렸다가 중학교를 같이 다니면… 아, 그럼 난 또 중 3이잖아?’
이리저리 각을 재어 봐도 10대 시절에 두 살 차이는 제법 묘한 학년차가 생겨나기 마련이었다.
그때 휴식시간이 끝나는 알람 소리와 함께 객석 쪽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자리를 비웠던 관객들이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다음 7번 연주자 학생. 준비해주세요.”
대기실 문이 열리며 들어온 안내원의 목소리에 안나가 긴장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자신에게 배정된 번호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7번이었다.
‘차민준. 그렇게 나왔다 이거지? 좋아….’
안내자의 요청에 대기실을 나가려던 안나는 갑자기 발길을 돌려 민준이에게 다가오더니 그의 볼을 있는 힘껏 꼬집었다.
“아아악!!! 뭐야!?”
“사람을 지옥에 빠뜨려 놓고 지금 태평하게 잠이 와?”
“안나 누나…?”
워낙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민준이 곁에 있던 소희조차 말릴 틈도 없었다.
“여기서 내 연주가 끝날 때까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 봐. 알았어?”
“응. 알았어… 힘내~”
힘없이 웃어 보이는 민준이의 안쓰러운 표정에 스르르 마음이 녹아내린 안나는 할 수 없이 잡고 있던 볼을 풀어주었다.
“그럼. 다녀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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