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46화 (46/177)

[46] Ep.6 : 선생님께. (8)

‘설마 관객의 평가를 이용한 수상방식이라니….’

객석에 앉아 있던 석동철은 송 실장을 향해 가장 먼저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러자 그를 따라 하나 둘 박수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방금 전 그의 발언은 여태까지 있었던 피아노 대회의 평가 방식을 완전히 갈아 엎어버리는 획기적인 평가 방식이었다.

단지 악보에 적힌 대로 정확히 연주하는 것을 떠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기는지가 점수에 중요한 판가름이 될 테니까.

‘확실히 이런 홍보성 이벤트 대회에서까지 정식 콩쿨의 룰을 따를 필요는 없지. 헌데 이거 큰일났네. 아마도 소희는 이런 쪽으로는 잼병일텐데….’

송 실장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박수 소리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우며 무대를 내려왔고, 곧장 무대에 설치된 피아노 위로 은은한 조명 빛이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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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무대 위에서 송 실장이 관객들에게 평가 방식을 전달하는 동안, 출전자 대기실에선 석혜인 대리가 같은 내용을 아이들과 인솔 교사들에게 전하고 있었다.

“네에!?”

“말도 안 돼.”

여태까지 일반적인 콩쿨의 형식대로 대회를 준비해온 학생들은 석 혜인의 설명에 표정을 찡그렸다. 그 중 일부 선생들은 그녀를 향해 대놓고 항의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석 혜인 대리는 간단명료한 대답으로 그들의 항의를 일축 시켰다.

“악보대로 정확히 연주하는 것을 연습하셨다면 무대에 올라 연습하신 그대로 연주 하시면 됩니다.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저희는 여러분의 연주법에 대해 강제한 것은 아닙니다. 무대에 올라 여러분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연주를 보여주시면 됩니다.”

그러자 석 대리의 설명에 가장 먼저 불만을 토로했던 한 여성이 다시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명색이 대회라면 절대적인 기준이 필요한 것 아닌가요?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클래식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안다고…”

“선생님. 꼭 클래식을 아는 사람만이 학생들의 연주를 들으러 온다고 생각하시나요?”

“뭐라구요?”

“수개월 전부터 이번 대회를 준비하며 저희 홍보팀의 가장 신경을 쓴 것은 바로 순수하게 음악을 즐기는 분들을 위한 행사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치는 학생이 진정으로 뛰어난 재능이 있다면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 역시 순수하게 반응해 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대체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냐구요.”

자신의 설명에 계속해서 토를 다는 선생을 잠시 바라보던 석 대리는 속으로 짜증이 일었지만 담담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걱정 하지마세요. 이 세상엔 굳이 기준을 따지지 않아도 모두가 수긍할 수밖에 없는 차원이 다른 재능이 분명 존재하니까요.”

그러면서 석 혜인은 까칠한 성격의 선생에게서 눈을 돌려 한 남자 아이를 바라보았다.

‘바로 저 아이처럼….’

그녀의 눈이 향한 곳에는 안나와 함께 웃고 있는 민준이가 있었다.

&

사회자에게 마이크를 넘겨주고 송 실장이 향한 곳은 무대를 지켜보는 자신의 아버지 옆자리가 아닌 석 동철의 옆자리였다.

“때맞춰 오셨군요. 교수님”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며 옆자리에 몸을 기대는 송 실장의 모습에 석 교수는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한 교수를 소개 시켜주었다.

“이쪽은 저와 같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시는 오성태 교수님입니다.”

“아, 반갑습니다. 교수님.”

무대 위의 사회자가 인사를 하는 동안 오 교수와 송 실장은 서로 악수를 나누었다.

“석 교수와 딸아이가 이전부터 오늘 대회에 꼭 와달라고 부탁을 하는 통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저 역시 이번 대회에 대해 여러 교수님들께 다양한 의견을 듣고 싶었으니까요.”

그레이스 백화점의 문화 이벤트 주도를 기점으로 조금씩 사업을 확장해 나가려는 송 실장에게 이번 어린이 피아노 대회는 무엇보다 중요한 첫걸음이었기에 객석에는 여러 전문가들 말고도 대한민국 음악계 전반을 다루는 유명한 잡지사 기자들도 몇몇 포함해 있었다.

‘자, 그럼 예선전에서 보여줬던 그 아이의 연주가 진짜였는지 아닌지 한번 지켜볼까?’

송실장은 자신의 무릎위에 다리는 얹은 채 팔짱을 끼었다.

그러자 때마침 무대 위로 첫 번째 참가자 학생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송실장의 동생인 안나와 같은 학교 출신인 남자아이는 빛나는 조명아래서 객석을 향해 살짝 허리를 굽힌 뒤 피아노 의자의 높낮이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그에 대해 석 교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별로 긴장한 것 같지는 않군요?”

“그러게 말일세. 보통 이런 큰 대회에는 긴장한 나머지 의자의 높이조차 못 맞추고 연주를 시작하는 대학생들도 제법 있는지라…”

“동감입니다.”

남자 아이는 자신의 신체에 맞게 의자 높이를 조절한 뒤 사뿐히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리고 잠시 후.

이번 대회의 주제곡인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호오, 페이지 터너가 안 붙어 있네요?”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지.”

페이지 터너 (Page-Turner)

악보를 전부 외우지 못 했을 시 연주자의 왼쪽에서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을 뜻하는 명칭이었다. 이번 대회의 주제곡인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는 아직 어린 학생들이 연주하기에는 굉장히 어려운 곡이었기에 필요시 페이지 터너를 이용해도 된다는 규칙을 두었다.

하지만 첫 번째 참가자부터 주최 측의 배려를 깡그리 무시하고 담담히 자신 만의 연주를 펼쳐 나가는 모습에 석 교수는 흐뭇한 표정으로 아이의 연주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석교수의 예상과는 다르게 현재 무대 위에 올라와 있는 아이의 머릿속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무대에 오르기 전.

아이의 손에는 분명 이제까지 줄곧 연습해온 자신 만의 월광 소나타의 악보가 들려있었다.

“광현아. 아무래도 이번 본선에는 악보를 보지 않는 게 좋겠다.”

“네? 왜요!?”

“주위를 둘러 봐. 다들 대회 규정을 이용해 페이지 터너를 이용할 생각이야. 하지만 여기서 첫 번째 연주자인 네가 악보 없이 훌륭히 연주를 해낸다면 청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걱정 마. 지금까지 매일같이 선생님이랑 월광 소나타를 반복해서 쳐왔잖아. 분명 악보를 보지 않아도 네 머리에 전부 담겨 있을 테니까.”

물론 선생님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첫 소절만 제대로 이끌어 낼 수 있다면 나머지 부분은 어떻게든 연습 한 대로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객석에 있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함이야.’

피아노 앞에 아이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자신의 연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월광 소나타의 1악장은 대체로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환상적인 울림을 추구하는 면이 있었다. 반복적으로 연주되는 세잇단 음표는 듣는 이로 하여금 마치 최면에 걸리는 듯한 몽환적인 느낌을 전달해 주는 것이 특징이랄까?

하지만, 첫 번째 연주자로 나선 아이의 손가락은 시간이 흐를수록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악보 없이 연주를 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손가락이 굳어버렸군.”

“페이지 터너가 있었다면 훨씬 더 나은 연주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랬을까요?”

석 교수의 질문에 오성태는 자신의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아마도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 레슨 선생이 지침을 바꾼 것이겠지. 아무리 빼어난 피아니스트의 연주회라도 페이지 터너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너무 객석을 의식했군. 실제로 전문가가 아닌 이상 페이지 터너에 대해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텐데.”

어떻게든 월광 소나타의 1악장을 마친 아이는 평소보다 2배, 3배로 신경을 써야하는 연주에 벌써부터 지친 기색이 역력해보였다.

무대 밖에 선생은 아이를 향해 불끈 주먹을 쥐며 힘을 내라는 제스쳐를 취했지만, 이미 아이의 머릿속은 텅비어 있었다.

“이광현군. 이어서 두 번째 악장을 시작해 주시면 됩니다.”

이번 본선에서는 주제곡인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1악장부터 3악장까지 연속으로 연주하여야 했지만, 큰 무대에서 악보 없이 연주해야한다는 중압감은 아이를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기 충분한 요소였다.

결국 2악장의 채 다섯 소절을 넘기지 못한 아이가 건반을 멈추자, 객석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새어 나왔다.

“결국 어른의 욕심이 한 아이에게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기게 되는군.”

한번이라도 무대 위에서 연주를 멈춘 연주자는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그 순간이 평생의 기억에 남을 테니까.

오성태 교수는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차며 무대를 내려가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첫 번째 연주가 도중에 멈춘 이 후.

이어진 참가자들은 모두 페이지 터너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연주가 중도에 멈추는 비극적인 사태는 없었지만, 두 번째 참가자 그리고 세 번째 참가자의 연주 역시 굉장히 밋밋한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심사위원이 아닌 관객의 평가에 방식에 다들 동요하고 있군. 어차피 심사위원에게 보이나 관객에게 보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석 교수의 생각은 옳았다.

관객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눈치를 보기보다 자신 만의 피아노를 보여줄 그런 아이가 절실히 필요했다.

아무리 좋은 명곡이라도 똑같은 곡을 반복적으로 듣다보면 그만큼 지루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일까? 뒤쪽 어디에선가 누군가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송 실장이 그에게 귓속말을 전해왔다.

“교수님이 보시기에 지금까지 무대에 오른 아이들의 실력이 어떻습니까?”

“대체로 무난하군요. 사실 곡의 난이도가 상당한 편이라 실수가 잦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기대 이상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베토벤의 피아노라고는 할 수 없겠네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는 다른 음악가들보다 굉장히 감정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곡의 분위기 역시 단조가 많고 그로 인해 그가 작곡한 대부분의 작품들이 건반이 무겁습니다. 특히나 월광 소나타는 10대 초반의 아이들이 연주하기에 굉장히 어려운 곡입니다. 실장님도 무대를 보시면서 느끼시겠지만, 지금까지 아이들의 연주를 짚어 보면 특히 3악장에서 미스 터치가 자주 일어납니다.”

그때 무대에서 다섯 번째 참가자 학생이 월광 소나타의 2악장을 마치고, 곧바로 3악장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베토벤의 고통과 분노가 그대로 서려있는 월광의 세 번째 악장의 빠르기는 그의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도 가장 빠른 템포를 가진 곡이었다.

총 16분가량 이어지는 월광 소나타에서 3악장이 차지하는 부분은 약 6분 40초.

3악장의 연주하던 아이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러지? 분명 레슨 선생님이랑 함께 쳤을 땐 아무 무리 없이 쳤던 곡인데, 왜 이렇게 힘들지? 긴장한 탓일까?’

온갖 잡생각에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듯 한 느낌마저 든 순간.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미스 터치를 연발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석 교수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 학생은 특히 심하군요.”

“이상하군요. 저 학생이라면 예선전 때 제법 인상 깊었던 연주를 보여줬었는데…”

“저 역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저렇게 연주가 무너진 거죠?”

송 실장의 질문에 석 교수는 결국 연주를 중단하고 무대를 떠나는 아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답은 저 피아노에게 있습니다.”

“그럼 다음으로 참가 번호 6번 차민준 학생의 피아노 연주가 있겠습니다.”

사회자의 멘트에 무대 왼쪽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남자 아이의 모습에 석 교수가 빙긋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왠지 저 아이라면 답을 알고 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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