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Ep.6 : 선생님께.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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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단아한 어조와 함께 중앙 방송실 직원들에게 고개 숙인 여성은 잠시 후 백화점 안내데스크를 들린 뒤 홍보실로 향했다.
반듯하게 세운 허리와 자신감이 묻어난 걸음걸이에 복도에서 마주친 남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기에 충분했다.
“저 여자가 송 실장님 비서 맞지?”
“맞는 거 같은데? 캬~ 거참 미인일세”
“백화점 평사원에서 뜬금없이 회장 아들 비서라니~ 역시 여자는 예쁘고 봐야 해.”
휴게실에 커피를 마시던 남성들은 여전히 정면을 응시 한 채 홍보실로 향하는 그녀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실장님. 대회에 관련해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좋아. 점내에 고객님들은 많이들 오셨나?”
“행사 품목에 대해 세일 폭이 커서 그런지 평소 주말보다 훨씬 더 많은 고객님들이 찾아오셨습니다.”
“좋아. 그럼 시작해볼까?”
송 실장은 자신을 따르는 개인 비서의 보고 내용에 손뼉을 마주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래 실장 직급에 따로 비서를 붙이는 건 다른 회사에서 보기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백화점 경영자의 아들인 그는 백화점 업무 외에도 따로 추진 중인 일이 많았기에 개인 비서를 두고 있었다.
“아, 혹시 석 교수님에게서 연락이 왔나?”
“네. 어제 오후 기획실로 연락이 왔었습니다만, 역시 심사 위원 자리는 거절하였습니다. 대신 제자인 윤소희 양과 차민준 군의 피아노를 듣기 위해 방문하겠다고…”
“뭐 그 정도면 됐어. 오히려 나는 그런 면이 더 마음에 드는데?”
그러자 송 실장의 여비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저희 오빠가 그런 쪽에는 융통성이 없는 편이라 죄송해요. 그 날 저녁 약속에 제가 함께 참석 했더라면…”
석 동철 교수를 자신의 오빠라고 말하는 그녀의 이름은 석 혜인.
본래 그레이스 백화점의 홍보실 대리였던 그녀는 어린이 피아노 대회에 대한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제안한 직원이었다.
“아냐. 직원들 퇴근 후 잔업 안 시키는 게 내 신조니까.”
옷깃을 툭툭 털어낸 송 실장이 빙긋 미소 지으며 홍보실을 나서자, 석 혜인은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대회장으로 향하는 복도는 최신식 백화점답게 반질반질 윤이 나 있었다.
“학생들은 출발 했나?”
“네. 방금 학교 측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송 실장은 벽에 걸린 어린이 피아노 대회의 홍보 포스터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처음엔 백화점 홍보 차원에서 시작한 대회인데, 생각지 않게 재미있게 되어가는군.”
“차민준 학생을 두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아. 덕분에 우리 안나도 제법 긴장한 눈치더라구. 그래도 나름 클래식 쪽에선 신동 소리 듣던 아이인데.”
“아가씨 실력이라면 그런 소리 듣기에 충분하지요. 이번 예선에서도 쇼팽의 녹턴을 훌륭히 연주해냈다고 생각하는데.”
“예선에서는 모두가 각기 다른 곡을 연주했으니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지만, 이번에는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겠지. 모두가 같은 곡을 연주할 테니까.”
“혹시나 이 일로 아가씨가 상처 받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설마 우리 안나가? 절대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그 부분은 걱정 안해도 돼.”
“어째서 그렇게 단언 하시죠? 동생 분의 실력을 믿으시나요?”
“아니. 안나에게 클래식은 단지 통과점일 뿐이거든. 그 녀석은 따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으니까.”
“꿈이라. 이럴 땐 아이들이 부럽기만 하네요.”
“왜? 혜인씨는 꿈이 없나?”
“제 꿈은 어릴 때부터 전부 오빠한테 양보했으니까요.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 꿈이 무슨 소용이 있나요. 다들 하루 먹고 살기 바쁜데.”
“그럴수록 더 재밌는 꿈을 꿔야지.”
“그럼 실장님은 지금도 꿈이 있나요?”
“물론이지.”
“그게 뭔데요?”
“아직은 비밀인데? 뭐 이렇다 할 꿈이 없다면 계속 나를 따라와 봐. 아주 재밌는 일이 가득한 인생을 만들어줄 테니까.”
언제나 자신감 넘치는 송 실장의 말투에 석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음~ 그럼 실장님의 꿈 기대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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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회. 어린이 피아노 대회.
그레이스 백화점과 교육부가 합동으로 주관하는 이 대회를 기념해 열린 바겐세일 덕분에 백화점에는 어느 때보다 손님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아버지 송 회장과 함께 매장을 거닐던 송 현우는 오가는 손님들마다 정중한 인사를 건네며 천천히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이윽고 행사가 열리는 10층 메인 홀에 도착한 송 회장은 화려하게 꾸며진 무대를 바라보며 아들에게 물었다.
“현우야.”
“네. 아버지.”
자신의 부름에 대답하는 아들을 바라보며 송 회장은 높은 직급을 마다하고 홍보실부터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 올리는 것을 택한 그가 참으로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처음 피아노 대회를 열겠다고 했을 때, 솔직히 이게 백화점 사업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내가 착각했던 것 같군. 이러한 작은 이벤트조차 백화점 매출에 큰 영향을 미칠 줄이야.”
“앞으로 문화 산업은 더 발전해 나갈 겁니다. 경기가 좋아지면 사람들은 저마다 즐길 거리를 찾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백화점 경영도 마다하고 엔터테이먼트 사업인지 뭔지 그런 걸 하려고 하는 게냐?”
“아버지 덕분에 어릴 적부터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느낀 바가 있으니까요.”
“으음? 그게 무엇이냐.”
“어떤 나라든 부흥기가 있다면 쇠퇴기가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죠. 우리나라는 지난 70년대 말부터 엄청난 고속 성장을 이루어왔습니다. 이 성장이 언제까지 계속 될지 모르지만, 아마도 조만간 이 기세가 꺾일 때가 오겠지요. 하지만 그런 쇠퇴기에서도 분명하게 흥하는 것은 있습니다.”
“음…?”
“바로 음악이죠. 우리나라는 지난 8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경제의 고속 성장으로 산업화의 혜택을 충분히 누렸습니다. 이 상태에서 경제의 쇠퇴기가 온다하여도 그 속도는 굉장히 더디겠죠. 산업화가 충분히 이루어진 국가의 경제는 그 다음으로 문화생활에 사용하는 지출 대비가 굉장히 커지는 사례가 있습니다. 이미 한 번 맛을 본 문화적 혜택을 쉽게 포기할 수 없으니까요.”
“음악이라. 내가 너만 했을 당시엔 그저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컸었는데. 세상이 이렇게 또 한 번 변해가는구나. 하지만 현우야. 네가 아무리 큰 사람이 된다 해도 속빈 쭉정이가 되어선 안 된다는 걸 명심 해야 한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현우는 그런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불의와 타협치 않고 항상 공명정대 할 것.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래. 알면 되었다.”
“그래서 이번 피아노 대회의 심사 방식을 조금 독특하게 만들어 보았는데요.”
아직 대회가 시작하기 전 조용한 무대 아래에서 현우는 자신이 생각해둔 방식을 아버지께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이야기를 모두 전해들은 송 회장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그거 참 재밌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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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버스에서 내린 민준은 서울 한복판에 세워진 거대한 백화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우와… 엄청 크다.”
“그만 좀 두리번거려. 나까지 창피해지잖아.”
부반장으로서 반 친구들을 응원하기 위해 함께 버스를 타고 온 진아는 아까부터 목이 부러져라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는 민준이의 옷깃을 잡아 끌었다.
“저기 꼭대기 층에서 피아노 대회가 열린단 말이지?”
“그래. 그러니까 좀 가만히 좀 있어. 넌 긴장도 안 되니?”
“아까 오수정 선생님은 긴장하지 말라던데?”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민준이의 얼굴에 진아는 황당함에 기가 차올랐다.
“넌 선생님이 긴장하지 말라고 하면 긴장이 안 되니?”
“걱정 마. 이래봬도 오스트리아 황제 앞에서 연주한 경험이 있거든?”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하지만 민준은 그저 빙긋 웃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 백화점 앞 광장에 모여 있던 이들에게 한 젊은 여성이 걸어와 입을 열었다.
“연서 국민학교 선생님과 학생들이시죠? 안녕하세요. 이번 피아노 대회에서 안내를 맡게 된 석혜인 대리입니다. 혹시 담당 선생님 안 계신가요?”
“아, 제가 대회 인솔 교사인 오수정입니다.”
오 선생은 석혜인 대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전해들은 내용을 다른 선생님들께 전해주었다. 자신과 출전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대회가 열리는 이벤트 홀로 바로 올라가고 민준이와 소희를 비롯한 본선 진출자들은 따로 석혜인 대리를 따라 대기실로 향하게 되었다.
“우린 이 분을 따라가면 돼.”
오 선생님의 말에 민준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생님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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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와 그레이스 백화점이 공동 주최하는 제 1회 어린이 피아노 대회는 예선을 통과한 12명의 출전자들과 함께 빠르고 순조롭게 대회가 준비 되었다.
출전 학생들과 함께 온 선생님들을 비롯해 교육부 소속 직원들까지 지정된 좌석에 착석했지만 생각보다 적은 관객 수에 거대한 이벤트 홀 안이 썰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정옥분 선생은 밀려드는 한기에 옷깃을 여미우며 투덜거렸다.
“뭐 이리 사람이 없어? 작은 대회라더니, 진짜 볼품없네.”
“그러게 여기 모인 사람들이 전부인가?”
본선 진출자들의 인원 수가 워낙 적다보니 예선전에 비해 객수가 너무나 줄어 있었다.
그때 무대 조명이 밝게 빛나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저는 그레이스 백화점의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는 송현우 실장입니다.”
마이크를 손에 든 채로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객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 몇몇이 그에게 박수를 보내주었다.
“감사합니다. 이제 잠시 후. 제 1회 어린이 피아노 대회가 시작될 예정인데요. 그전에 잠시 오늘 대회의 입상 선정 방식에 대하여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송 실장의 설명에 미리 이벤트 홀에 도착해 앉아 있던 석동철 교수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저희 백화점에서 주최하는 첫 번째 문화 산업 이벤트인 만큼 그 어느 때보다 공정한 심사를 거치기 위해 아주 특별한 심사원들을 모셨습니다.”
“특별한 심사원?”
“예선전과 심사위원들이 다르다는 말인가?”
송 실장의 발표에 홀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무대 위로 올라온 한 스태프가 귓속말로 송실장에게 전언하자, 그는 빙긋 웃으며 심사원들을 소개했다.
그러자 이벤트 홀의 뒷문이 벌컥 열리며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와 비어 있는 객석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썰렁하게만 느껴졌던 홀 안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목소리로 옆 사람 목소리조차 잘 안 들릴 정도였다.
“심사원들이라더니, 사람들만 가득 불러 모아 놓고 뭐하자는 거지?”
상황 파악이 잘 되지 않은 학교 측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볼 뿐이었다.
안내요원들의 지시에 따라 신속하게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소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무대 위의 송 실장은 흐뭇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이번 어린이 피아노 대회는 정말로 실력 있는 영재를 발굴해 내고자, 저희 백화점과 교육부가 함께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취지에 걸맞게 본선에서는 조금 독특한 방법으로 수상자를 선별해내고자 합니다. 방금 객석을 채워주신 분들은 저희 백화점을 이용하시는 고객님들입니다. 평소 클래식을 즐겨 듣는 분들도 계시고 단지 귀여운 아이들의 피아노를 듣기 위해 찾아오신 분들도 계시겠죠. 아시다시피 저희가 주최하는 대회는 클래식계에서 인정하는 정식 콩쿨이 아니기에 전문가들의 평가에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아이들의 피아노를 편히 즐겨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본선에 올라온 12명의 학생들의 피아노를 듣게 되실 겁니다. 부디 차분한 마음으로 아이들의 연주를 들어 주신 후. 가지고 계신 티켓 뒷면에 가장 훌륭한 연주를 들려준 학생의 번호를 적어주세요. 그럼. 곧바로 첫 번째 학생의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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