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Ep.6 : 선생님께.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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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수업 중에도 책상 밑으로 고무공을 숨긴 채 조물락거리던 나는 어젯밤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선생님은 그 줄리에타란 분을 엄청 좋아하셨나보구나.’
자신이 만든 곡을 불길 속에 던져 버릴 만큼…
하지만 월광 소나타 3악장의 비밀을 알게 된 것까지는 좋은데, 그럼에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게 대체 뭐냐면…
사랑하는 사람을 누군가에게 빼앗겼다는 그 미묘한 감정선을 완벽히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분명이 다를 것이다.
둘 다 만약 똑같은 감정이었다면 그냥 좋아한다는 단어 하나로 충분하니까.
할머니는 잠들기 전에 항상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사랑하는 내 새끼’라고 말씀 하시곤 하지만 베토벤 선생님이 느꼈던 사랑이랑은 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면 내가 사랑 하는 사람은 누굴까?
오수정 선생님?
흐음… 물론 내가 오 선생님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걸 사랑이라고 하기엔 조금 다르고…
그때였다.
“차민준. 다음 부분 읽어 봐.”
멍하니 딴 생각을 하고 있다가 깜짝 놀란 나는 엉거주춤 책상에서 일어나 서둘러 교과서를 펼쳐들었다. 큰일이다. 어딘지 전혀 모르겠는데…
그때 짝꿍인 진아가 자신의 교과서를 가리키며 내가 읽어야 할 부분을 알려 주었다.
“48페이지 세 번째 줄.”
“아, 철수는 영희를 뒤에 앉히고 자전거를…”
선생님은 내가 교과서를 읽어 내려가자 천천히 다가와 힐끗 째려보시곤 뒤쪽으로 걸음을 옮기셨다.
“됐고, 다음 송민석.”
“네!? 아, 네! 그게…”
허겁지겁 교과서를 뒤적거리던 민석이는 진아와 눈을 마주치자 도움을 청했지만, 진아는 빼꼼 혀를 내민 채 민석이에게서 눈을 돌렸다.
“민석이 너 책상 밑에 있는 그거 만화책이지? 당장 들고 나와.”
“네…”
결국 오늘 아침 문방구에서 사온 ‘드라곤의 비밀’ 3권을 빼앗긴 민석이는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내내 투덜거렸다.
“아, 짜증나. 신과 합체한 피코로랑 2단 변신 후리자가 싸우기 직전이었는데!!”
“그러게 누가 수업시간에 만화책 보래?”
“진아 너, 지금 불난 집에 부채질 하냐?”
“나는 사실을 이야기 했을 뿐이야. 만화책 본 사람이 잘못한 거지.”
그때 민석이와 진아의 말다툼을 바라보고 있던 근상이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진아야. 민준이는 왜 도와줬어?”
“뭐? 진아가 민준이를 도와줬다고?”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아까 민준이가 교과서 읽을 때 어디인지 알려줬잖아.”
근상이의 말에 반격의 기회를 잡은 민석이가 이때다 싶었는지 키득 거리며 입을 열었다.
“오~ 천진아. 너 혹시 민준이 좋아하냐?”
“내가 민준이를? 절대 아니거든!!”
“오올~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던데~”
간만에 재미거리를 찾은 아이들은 진아에게 한마디씩 던지며 놀려대기 시작했다.
괜히 나 때문에 입장이 곤란해진 친구를 돕기 위해 진아에게 다가가자 민석이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게 물었다.
“야~ 민준이 너 어쩌냐? 진아가 너 좋아하나 본데~”
“그게 뭐 어때서?”
“응?”
내가 이렇게 나올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는지 민석이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야, 진아가 너 좋아하는 거 같다니까?”
“솔직히 진아가 어때서? 부 반장 역할 잘하지. 반 아이들이랑 잘 어울리고, 키 크고 얼굴도 예쁘잖아.”
“음? 듣고 보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닌데?”
평소에도 진아만 나타나면 얼굴을 붉히는 근상이까지 내 편을 들어주자, 민석이는 딱히 반박할 구석을 찾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천진반, 태진아 같은 괴상한 별명으로 불려서 그렇지. 모르긴 몰라도 진아가 오수정 선생님 나이 쯤 되면 아마 굉장한 미인이 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단 말야?
그렇게 흐뭇한 표정으로 진아를 바라본 순간.
묵직해 보이는 진아의 필통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뻐억!!
“이 바보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천으로 된 필통이었기에 망정이지 민석이처럼 변신하는 로봇 필통이었으면 대갈통 날아갈 뻔했네.
멀리서도 정확히 내 이마를 향해 날아온 필통의 궤적에 승우가 휘파람을 불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야~ 그러고 보니 운동 신경도 좋잖아. 역시 남자로 태어 났어야 했는데.”
“조승우 너도 한 대 맞아 볼래?”
“으잉? 갑자기 왜 나한테 그래? 아~ 맞다. 다음 시간 체육 시간인데 우리 나가서 준비해야 하는거 아냐?”
“아!! 맞다. 조승우, 차민준 너희 먼저 나가서 창고에서 매트랑 뜀틀 꺼내줘.”
“윽, 우리 둘만?”
“송민석, 공근상. 너희도 같이 가서 도와줘.”
“왜 맨날 우리 넷만 시켜.”
“나도 시키기 싫거든? 용석이가 안하니까. 내가 할 수밖에 없잖아.”
용석이는 지난 예선에서 떨어진 후 어머니께 엄청 혼난 모양이다.
오 선생님께선 용석이가 긴장해서 그런 것 같다고 잘 말해주었지만, 무대조차 오르지 않은 것 때문에 어머니께서 많이 실망하신 모양이었다.
덕분에 자신감을 키우기 위해 지난 주부터 웅변 학원에 다니고 있다나?
“야, 너희들 빨리 안 나가!? 다른 남자 애들도 나가서 같이 좀 도와”
“지금 간다. 가~”
결국 운동장으로 우르르 몰려나온 우리들은 투덜대면서도 진아의 말에 따라 창고에서 뜀틀을 꺼내기 시작했다.
“자식들. 또 진아가 시키니 억지로 하는 구나? 표정들이 가관일세?”
곰팡이 냄새와 퀘퀘한 흙먼지가 가득한 창고에서 매트를 들고 나오는데 체육 담당인 박찬수 선생님께서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스탠드 위를 걸어오고 계셨다.
언제나 새파란 트레이닝 복 차림인 박찬수 선생님의 복장은 아무리 어린 내가 보더라도 영 보기가 그렇다.
어벙벙한 헤어스타일 때문에 언 듯 이소룡이랑 닮아 보이는 박찬수 선생님은 그래도 내가 오수정 선생님 다음으로 좋아하는 선생님이었다.
“엄청 무거워요. 선생님…”
“인마. 고작 매트 한 덩이가 뭐가 그리 무겁다고,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이다. 힘을 내!!”
그때 우연히 외근을 마치고 학교로 들어오던 오수정 선생님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외쳤다.
“민준아. 운동도 좋지만, 모레 대회 날인거 알지? 손 안 다치게 조심해~!!”
선생님은 커다란 매트를 짊어진 내가 안쓰러워 보였나보다.
나는 그런 선생님을 향해 보란 듯이 외쳤다.
“괜찮아요. 선생님! 박찬수 선생님께서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한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언제!!”
방금 전까지만해도 스탠드 위에 있던 선생님은 어느새 내가 지고 있던 매트를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하하하. 민준이가 농담한 겁니다. 오 선생님.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고마워요. 박 선생님. 파이팅~!!”
작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오 선생님을 향해 박 선생님이 매트를 번쩍 들어 올리자, 안에 들어있던 모래가 우수수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악!! 선생님 갑자기 매트를 흔들면 어떡해요!!”
“응? 왜? 뭐? 문제 있냐?”
오 선생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박 선생님의 모습에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오 선생님을 보자마자 박 선생님의 심장 박동이 엄청 빨라졌다는 것이다.
오 수정 선생님이 본 건물로 사라질 때까지 까치발까지 들어서 바라보는 박선생님의 모습에 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선생님. 오 선생님 좋아하시죠?”
“뭐?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에이~ 다 알고 있어요.”
“그렇게 티나냐…?”
“완전이요.”
“그런데 왜 오 수정 선생님만 모르지?”
나는 여전히 두근거리는 박 선생님의 심장 고동소리를 느끼며 되물었다.
“선생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데?”
“좋아하는 거랑, 사랑하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요?”
“글쎄다. 그것 참 어려운 질문이구나.”
“선생님도 몰라요? 어른이잖아요.”
“민준아…”
“네?”
“어른이 된다고 다 사랑을 해볼 수 있는 게 아니거든…”
“······.”
뭔가 방금 선생님께 굉장히 실례를 저지른 듯한 기분이 드는데?
박 선생님은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나와 함께 매트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계속 보고 싶고, 얼굴을 마주보면 가슴이 두근거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면 그것도 일종의 사랑이 아닐까?”
“선생님이 오 수정 선생님을 생각하는 것 처럼요?”
“끄응… 내 경우에는 짝사랑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지.”
“그냥 오 선생님께 좋아한다고 고백하시면 되잖아요.”
“내가? 어휴~ 그걸 어떻게 하냐. 죽었다 깨나도 그 말은 못하겠다. 그러다가 지금 보다 더 어색해 질 것 같기도 하고…”
아마도 박 선생님께 부족한 것은 용기가 아닐까 싶은데…
하지만 선생님 덕분에 어렴풋이나마 오 선생님을 생각하는 선생님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때 우리 곁으로 소희가 다가왔다.
“저기, 선생님. 모레 대회 때문에 그런데, 오늘은 체육 안하고 스탠드에서 쉬면 안 될까요?”
“아, 그러고 보니, 소희 너도 본선에 진출 했다고 들었다. 좋아. 오늘은 민준이 너도 스탠드에서 쉬어라.”
“네에? 저도요?”
“작년처럼 승우랑 자존심 대결하다가 뜀틀에서 떨어져 다치지 말고, 오늘은 선생님 하란대로 해. 그리고 소희도 혼자 스탠드에 있는 것보다 너랑 있으면 덜 심심할 거 아니냐.”
결국 선생님의 명령으로 소희와 함께 스탠드로 물러난 나는 계단에 앉아 아이들의 체육 시간을 감상 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 괜히 나 때문에…”
“아냐. 오수정 선생님도 손 조심하라고 했으니까. 하루 정도 쉬는 것도 나쁘지 않지.”
“대신 이거 같이 들을래?”
“음?”
작은 가방에서 소희가 꺼내든 것은 보기에도 꽤나 비싸 보이는 휴대용 워크맨이었다.
가끔 레코드점에서 판매하는 걸 보긴 했지만, 이렇게 실제로 눈앞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던 나는 눈이 절로 크게 뜨였다.
“우와~ 워크맨이네? 직접 만져보는 건 처음이야.”
“정말? 그럼 먼저 한번 들어볼래?”
“진짜 그래도 돼?”
나의 대답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소희는 손수 내 귀에 이어폰을 꽂아 주었다.
그리고 플레이 버튼을 누른 순간.
대회 연습곡인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가 이어폰을 타고 내 귀에 흘러 들어왔다.
그녀의 테이프에 녹음 된 피아니스트는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풍부한 감성을 가진 사람인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첫 악장을 듣자마자 가슴 한구석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 한 아픔이 그대로 전해지다니…
그리고 잠시 후.
나는 그 피아노의 주인공이 일전에 소희네 집 밖에서 들었던 피아노 소리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예전에는 잘 몰랐지만, 최근 들어 베토벤 선생님과 수잔 누나. 그리고 안나까지 다양한 피아노 소리를 듣다보니 같은 곡이더라도 확실히 그 사람만의 성향이 묻어난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너희 선생님 정말 대단하구나…”
“너 그걸 어떻게 알았어?”
“아, 예전에 너희 집 앞을 지나가다가 너희 선생님이 연주하는 비창을 들은 적이 있거든.”
“그걸 한 번만 듣고 알 수 있어? 더구나 완전히 다른 곡인데?”
“음~ 그게 어려운 건가?”
나의 대답에 소희는 황당하다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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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틀이 지나고 대회 당일인 토요일..
학교가 쉬는 날이라 텅빈 운동장에 커다란 버스가 한 대 도착했다.
대회 참가자와 선생님들은 버스 문이 열리자, 차례대로 버스에 오르기 시작했다.
오늘은 오수정 선생님뿐만 아니라, 담임인 정옥분 선생님을 비롯해 교장, 교감 선생님까지 함께 대회장으로 이동하기에 버스 안은 금세 가득 차버렸다.
“그럼 본선 대회가 열리는 그레이스 백화점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버스 대절과 인솔을 맡은 박 찬수 선생님은 모든 사람이 탑승한 것을 확인한 뒤 운전기사님께 출발을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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