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Ep.6 : 선생님께. (5)
* * *
“오오… 베토벤이다.”
“줄리에타 아가씨와 친하단 소문이 사실이었군.”
귀차르디 가문의 파티에 베토벤이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을 그를 바라보며 수근 대었다.
빈에서도 꽤나 영향력 있는 가문의 파티였기에 거의 대부분의 귀족이 참석한 파티였고, 그것은 베토벤과 각별한 사이인 브로우닝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베토벤을 보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온 수잔 역시 3년 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성숙한 모습이었다.
“오랜만이군.”
“정말 그러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물론.”
짧게 대답을 마치는 베토벤의 변함없는 모습에 수잔은 안심했다.
선생님의 귀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한스에게 듣고 한동안 걱정이 많았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몸 상태에 안도한 그녀는 다음으로 궁금한 것이 있었다. 베토벤 역시 그녀의 마음을 눈치 챘기에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토닥여 주었다.
“민준이에 대한 소식은 아직 없구나. 하지만 기다리면 언젠가 반드시 우리 앞에 나타나겠지.”
“그러겠죠? 그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귀차르디 백작이 알려준 약속 시간에 제때 도착했건만 벌써부터 사람들이 제법 많이 모였구나. 역시 권세 있는 가문의 파티라 그런가?”
“네? 그럴리가요. 파티는 2시간 전부터 시작이었는걸요?”
“뭐라고?”
그때 귀차르디 백작의 등장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며 강한 인상을 가진 중년의 남자가 2층 테라스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저희 딸의 약혼식을 축하해 주시기 위해 참석해 주신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축하드리오~!!”
“축하드립니다. 귀차르디 백작님.”
“줄리에타 아가씨의 행복을 위하여~!!”
잔을 들어 올리며 귀차르디 백작을 향해 소리치는 사람들의 모습에 베토벤은 무언가 일이 잘 못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분명 자신과 줄리에타의 약혼식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베토벤의 이름을 외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생님? 왜 그러세요? 안색이 안 좋으신데…”
“줄리에타. 줄리에타는 지금 어디 있지?”
“네? 글쎄요. 저도 아직 만나보지 못해서…”
귀차르디 백작은 연회에 모인 사람들의 함성이 사그라들때까지 여유 있는 웃음보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실은 이 자리에 저의 딸의 약혼식을 축하해주기 위해 특별한 분이 오셨습니다. 유럽음악의 중심인 이곳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 제 딸의 ‘음악 선생’ 이기도 하죠. 오늘 이곳에서 베토벤 선생은 제 딸을 위해 새로운 피아노 소나타를 발표할 예정입니다.”
“우와아아~!!”
“역시 귀차르디 가문 정도 되니, 그 까다롭기로 유명한 베토벤조차 절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군~”
“그의 신곡이라면 14번째 피아노 소나타를 이곳에서 발표하는 건가? 그렇다면 정말 행운인데?”
베토벤의 새로운 소나타의 발표에 흥분한 사람들은 연회장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있는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의 손에 들려진 악보가 부들부들 떨려왔지만, 대중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오직 그의 곁에 있던 수잔 많이 떨리는 그의 손을 잡아 주었을 뿐이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손이…”
하지만 질끈 눈을 감고 있는 그에게 수잔의 목소리가 들릴 턱이 없었다.
“… 그래. 이제 대충 알겠군.”
“네?”
“나는 들러리였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아노 소나타라… 그래. 내 기꺼히 들려주지.”
분노에 부들부들 떨리던 주먹이 새하얗게 질리도록 움켜진 그의 모습에 수잔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무서워… 꼭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
줄리에타의 모습이 보이진 않았지만, 베토벤은 연회장 한가운데 놓여진 거대한 피아노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테라스 위에서 그런 베토벤을 지켜보던 귀차르디 백작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뛰어난 음악가라도 평민은 평민일 뿐. 감히 내 딸에게 몰래 접근해서 홀리다니.”
“따님도 언젠가는 백작님의 마음을 이해해주실 겁니다.”
“물론이지. 지금은 그의 피아노에 단단히 홀린 모양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 아비의 마음을 알아줄 것이야.”
백작의 비위를 맞추던 집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요. 물론이죠.”
“헌데 대체 저자의 피아노 실력이 얼마나 뛰어나기에 고작 신곡 발표에 사람들이 이토록 열광하지?”
어린 시절부터 변방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싸움터에서 평생을 보내온 귀차르디 백작은 뼛속까지 무골 출신이었기에 음악에 대해선 대체로 무지(無知)한 편이었다.
단지 딸의 교양을 위해 바이올린을 가르쳤을 뿐.
“베토벤의 음악은 현재 빈에서 활동 중인 그 어떤 음악가들과도 견줄 수 없다고 하더군요. 궁정악장인 살리에리님과도 막역한 사이고, 황제 폐하의 신임도 어느 정도 얻고 있다고 합니다. 헌데…”
“헌데?”
“들리는 소문에는 두 귀가 멀었다고 하더군요.”
“뭐? 귀머거리가 피아노를 친다고? 그게 말이 되나? 더구나 일전에 나와 만났을 때는 멀쩡하게 대답까지 하던 걸”
“글쎄요. 워낙 티를 내지 않아, 그저 헛소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자의 실력이 진짜배기인지 아닌지는 이제 곧 드러나겠지.”
유리잔에 담긴 와인을 가볍게 흔들어 입가에 머금은 그는 피아노로 향하는 베토벤을 주시했다.
잠시 후. 수많은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베토벤은 아무런 인사도 없이 그저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것은 굉장히 예의가 없는 행동이었지만, 가슴 속에 끓어오르는 분노로 인해 소소한 인사 따위에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무런 연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베토벤의 모습에 사람들이 수근 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신곡 발표라더니 아직 준비가 안된건가?”
“줄리에타 아가씨를 축하해주러 왔으면서 표정이 왜 저래?”
“언제까지 저렇게 앉아 있을 거지? 분위기만 망치고 있잖아?”
“역시나 인간성이 덜되었군. 이래서 평민 출신은…”
베토벤을 흉보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수잔은 자신의 두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그때였다.
마치 호수 위의 잔물결처럼 베토벤의 피아노가 울려 퍼졌다.
줄리에타에게 바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아노 소나타가…
단조로 구성된 그의 14번째 소나타의 첫 악장은 첫 소절부터 청중들의 심장을 파고들기 충분했다.
고개 숙인 채 피아노 건반에 집중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 보일 정도로 애절한 멜로디에 누군가가 들고 있던 와진 잔을 떨어뜨렸다.
챙그랑~!!
갑작스럽게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소리에 연주를 멈출 법도 했지만, 베토벤은 아무렇지 않게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그에겐 지금 자신이 머릿속에서 가상으로 만들어 내는 피아노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으니까.
“아아…”
다소 감성적인 여성들은 그의 피아노 소리에 숨을 죽인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반복적으로 울려대는 세잇단음이 굉장히 위태롭게 반복 되어가고…
생애 처음으로 베토벤의 14번째 소나타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등줄기에는 한줄기 소름이 스치기 충분했다.
연주가 시작되기 전 자신을 비웃던 사람들의 입을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로 틀어막아 버린 베토벤은 1악장의 연주가 끝나자마자 곧장 2악장으로 연결 시켰다.
심장을 옥죄이는 것 마냥 우울했던 1악장과는 사뭇 다른 밝은 분위기의 2악장 덕분에 사람들의 표정이 한결 나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악장의 채 절반도 되지 않아 짧게 끝난 2악장을 끝으로 베토벤의 손이 멈추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테라스를 살피자, 1악장의 충격적인 연주에 식은땀을 닦고 있는 귀차르디 백작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으로 젊은 남자와 손을 맞잡은 채 슬프게 자신을 바라보는 줄리에타의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그는 피아노 위에 펼쳐져 있던 악보를 덮었다.
다시 숨막히는 고요가 찾아온 순간.
여태 것 베토벤의 피아노에서 단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던 격렬한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가 세 번째 악장에서 선택한 템포는 프레스토 아지타토르. (Presto agitato)
격정적으로 매우 빠르게라는 뜻.
줄리에타와 눈이 마주친 순간.
1, 2 악장에서 억누르고 있던 그의 감정이 일순간에 폭발한 것이다.
지금 그의 피아노에는 청중을 배려하는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격정의 소용돌이 안에 자신의 피를 모두 쏟아 부어내는 듯한 베토벤의 연주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여인들은 차례차례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것은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챙, 챙그랑~!!
그녀들의 손에 들려있던 잔 덕분에 여기저기서 유리잔 깨지는 소리가 울려 펴졌지만, 격정적인 그의 피아노 연주가 모든 소음을 잠재워버렸다.
약 6분 40초 가량의 3악장은 회장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절반가량을 혼절 시켜 버리기 충분했다.
그렇게 그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혼신의 연주가 끝나고…
모두가 박수를 치는 것조자 잊어버린 고요함 속에서 베토벤은 자리에서 일어나 피아노 옆에 놓인 화로에 자신의 악보를 던져 버렸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귀차르디 백작마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자신의 악보를 불태우다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음악에 문외한 귀차르디 백작마저도 그의 14번째 소나타에 큰 감명을 받던 중이었다.
어쩌면 역사에 길이 남게 될 명곡의 첫 악보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베토벤은 그런 백작의 외침을 깡그리 무시한 채 뒤돌아 파티장을 떠나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그 누구의 초대에도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 * *
“와아…”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나의 입에선 그저 탄성 밖에 나오지 않았다.
베토벤 선생님과 줄리에타가 그렇게 헤어지다니.
동화처럼 행복한 결말을 기대했던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멍하니 할아버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베토벤의 14번째 피아노 소나타는 말이다. 아무도 듣지 못했단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가 불길에 던져 버린 악보에 진짜 3악장이 쓰여 있기 때문이지. 단 한번도 연주 되지 못했지만 말이다.”
“어? 그럼 지금 월광 소나타의 3악장은 뭔가요?”
“그 3악장은 당시 파티장에서 베토벤이 만들어낸 즉흥곡이었다. 본래 14번째 피아노 소나타의 3번째 악장은 귀차르디 백작의 요청대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을 가지고 있었지만, 안타깝게 그것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베토벤의 손에 버려지고 말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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