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42화 (42/177)

[42] Ep.6 : 선생님께. (4)

‘내가 너무 일찍 온 건가?’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햇살이 비칠 때 즈음.

마치 망부석 마냥 그 자리에 서있는 그를 향해 주변 악사들이 수근 거리기 시작했다.

“저기 저 사람 혹시 베토벤 아냐?”

“에이 설마. 그 까다로운 양반이 여기를 왜 오겠나. 듣기로는 요새 자기 집에 틀어박혀 지낸다던데?”

“그래? 하긴 그러고보니 굉장히 깔끔한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뭔가 꼬질꼬질한 모습이 내가 착각한 것 같군.”

자신을 향해 수근 거리는 소리가 들릴 턱이 없는 베토벤은 아까부터 초조한 상태였다.

혹시 자신이 어제 환청을 들은 것이 아닐까?

이미 두 귀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인데, 어떻게 그녀의 바이올린 소리만 들을 수 있었던 걸까?

며칠째 면도를 안 한 탓에 덥수룩하게 길어진 자신의 수염을 거칠게 쓰다듬던 그는 잠시 후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었다.

‘어차피 다시 들어도 형편없는 연주일 뿐이야.’

한숨과 함께 실소를 내뱉으며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 때.

고개 숙인 베토벤의 시선에 선명한 하늘색 구두가 들어왔다. 그 다음으론 얇고 가느다란 다리. 더 위로 잘록한 허리와 봉긋한 가슴이 눈에 들어온 순간.

쫘악!!

“어억!!”

“지금 어딜 봐요!? 감히 숙녀의 가슴을!!”

“아니, 그게 아니라.”

어제에 이어 똑같은 곳에 따귀를 두 번이나 맞다니 베토벤은 한순간 황당함에 화조차 나지 않았다.

오늘도 거리 연주를 하러왔는지 바이올린과 활을 들고 있는 그녀는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씩씩 대었다.

“어제부터 뜬금없이 나타나 연주가 형편없다고 시비나 걸고, 당신 대체 정체가 뭐에요?”

“베토벤…”

“네?”

“루트비히 판 베토벤. 그게 내 이름이다.”

화끈거리는 뺨을 어루만지며 소개를 마치자, 뺨을 때린 여인이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며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제 알겠지? 내가 왜 당신의 형편없는 연주에 그렇게 화를 내었는지.”

“네. 정말이지 제가 유명한 작곡가님을 몰라보고…”

“알았으면 되었다.”

“그런데 말이죠.”

“음?”

“유명한 작곡가면 귀족에게 함부로 입을 놀려도 되나요?”

“뭐라고?”

“줄리에타 귀차르디. 저희 가문에 대해서 한번쯤 들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그녀의 소개에 베토벤을 비롯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귀차르디 가문.

1756년 발발한 7년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댓가로 백작의 지휘를 얻게 된 가문이었다. 귀족의 작위들 중에서 중간 서열 정도의 신분인 백작이지만, 전쟁이후 교역을 통해 막강한 부를 거머쥔 귀차르디 가문은 정계에서도 제법 이름을 날리는 유명한 가문 중에 하나였다.

‘얼마 전 대단한 백작 가문 하나가 오스트리아로 이주했다고 들었지만, 설마 이 어린 아가씨가 귀차르디 가문 출신이었다니.’

낭패였다.

아무리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음악가라고는 하나 결국엔 평민 출신인 베토벤에게 귀차르디 가문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헌데 어째서 귀족 가문의 아가씨가 한낱 거리에서 이름 없는 악사들과 함께 연주를 하고 있을까?

귀차르디 정도의 가문이라면 현재 빈에서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을 전부 초빙할 수 있을 텐데?

베토벤은 그 점이 궁금했지만 딱히 캐 묻지는 않았다.

대신 그 후로 베토벤은 매일 그녀의 연주를 듣기 위해 점심때면 악사들의 거리를 찾았다.

7년 전쟁의 공을 세운 할아버지를 닮아 다소 성격이 드센 줄리에타는 매일 자신을 찾아오는 베토벤이 딱히 싫지는 않았다.

별로 말은 없었지만, 언제나 똑같은 자리에 서서 그녀의 연주에 귀기울여주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끔 컨디션이 좋아 스스로도 만족스러운 연주를 펼친 날에는 엷게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보내주는 그의 모습에 왠지 모르게 뿌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항상 틀렸다고 꾸짖는 음악 선생보다 묵묵히 지켜봐주는 베토벤에게 호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실력이 조금씩 늘어가며 베토벤에게는 단 한줄기 빛이었던 줄리에타의 바이올린 소리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앞뒤 가릴 것 없이 깡으로 활을 당겼을 때의 보잉 기법에서 특유의 소리가 자네의 귀를 자극한 것일 지도 모르네. 그녀의 연주가 점점 안정화 될수록 자네는 그 소리마저 잃게 될 거야.’

프란츠는 베토벤에게 들렸던 소리에 대해 제법 그럴 듯한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덕분에 소름끼쳤던 그녀의 바이올린 연주는 이제 베토벤의 귓가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음을 느끼던 어느 날.

“잠시 나와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귀차르디 가문의 아가씨.”

석양이 질 무렵.

함께 연주한 악사들과 인사를 마치고 돌아가려던 그녀에게 베토벤이 말을 걸어왔다.

지난 두 달 간 거의 매일 같이 찾아온 그에게 줄리에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냥 줄리에타라고 부르세요. 그런데 무슨 일이죠?”

베토벤은 자신을 서슴없이 대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한 때 자신을 따라다녔던 꼬맹이를 떠올렸다. 지금 그녀는 그때의 민준이와 똑같은 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한없이 호기심 어린 시선.

베토벤은 그녀의 표정에 피식 웃음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당신을 위해 준비한 곡이 있습니다.”

“네? 저를 위해서요?”

뜬금없는 베토벤의 제안에 줄리에타는 놀란 토끼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상대는 현재 빈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

괴팍한 성격 탓에 모두가 멀리하고 있지만, 그의 음악만큼은 모차르트 이후 빈을 대표하는 최고의 작곡가였다.

그런 그가 그녀를 위해 피아노곡을 준비했다니. 아버지와는 달리 평소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피아노에 소질이 없었지만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뭐, 좋아요. 대신 저녁 식사 전에는 집으로 돌아가야 해요.”

“알겠습니다. 제가 꼭 모셔다드리죠.”

브로우닝 백작과 친분을 쌓으며 몸에 익힌 귀족 예법으로 능숙하게 그녀를 마차로 에스코트한 베토벤은 줄리에타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왔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음, 이 아가씨는?”

“귀차르디 백작가문의 아가씨다. 예의를 갖추게.”

“허억!! 귀차르디!!”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가문의 기세에 한스는 서둘러 줄리에타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너무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식사를 준비할까요?”

“아니, 아가씨는 곧 돌아가실 테니까.”

“주인님도 미리 말씀해주셨으면 간단한 다과라도 준비했을 텐데요.”

“지금 말했으니 서둘러 간단한 다과를 준비해오면 어떤가?”

“······.”

“······.”

베토벤의 대답에 한스는 3년전 민준이를 연주회장에 보내기 위해 마부석에 앉았던 그 날을 떠올렸다.

“문득 옛 기억이 하나 떠오르네요.”

“나도 문득 그 날이 떠오르는군.”

한스가 집을 나서고 베토벤은 줄리에타를 자신의 작업실로 초대했다.

평소에 한스가 잘 정리해둔 탓에 작업실을 깔끔하게 정리 정돈이 되어 있었다.

“와아~ 여기가 당신의 작업실인가요?”

“그렇습니다.”

“이제 저를 위한 피아노 소나타를 들려주실 건가요?”

그러자 그녀의 말에 베토벤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지금부터 당신과 함께 협주를 할 것입니다.”

“네? 저랑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형편없는 실력을 아시면서…”

“제 바이올린 소나타 5번곡 기억하고 계십니까?”

물론이었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5번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었으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베토벤은 주저 없이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 위에 손을 얹었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줄리에타는 고개를 저으며 베토벤을 말렸다.

“무리에요. 연습도 제대로 못했는데, 보나마나 엉망일게 뻔해요.”

그러나 베토벤은 그대로 건반 위에 손을 올려둔 채 입을 열었다.

“잘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습니다. 그저 제 피아노 소리를 따라오기만 하면 되니까…”

“네? 그게 무슨?”

“준비하세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실린 그의 목소리에 줄리에타는 하는 수 없이 바이올린을 꺼내 들었다.

“그럼 이제 눈을 감으세요.”

“설마 눈을 감고 연주하라구요?”

“제가 시키는 대로 따라오시면 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베토벤은 크게 심호흡을 들이킨 뒤에 약하게 건반을 두드려보았다.

역시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수백.. 아니 수 십 만번을 두드려온 건반이다.

모든 건반의 음계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었다.

‘그녀의 바이올린 소리 하나 맞춰주지 못할까보냐?’

“갑니다.”

그의 짧은 한마디와 함께 줄리에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베토벤은 순순히 자신의 말에 따르는 그녀의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오자, 동시에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먼 훗날. 이 곡에 붙은 별칭은 ‘봄’

줄리에타는 자신의 연주에 바싹 쫓아오는 베토벤의 피아노 연주에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의 피아노는 때로는 자신의 바이올린을 뒤에서 받쳐주기도, 어느 땐 앞에서 이끌어주며 밀고 당기기를 반복했다.

형편없는 자신의 바이올린 실력이 한 순간 엄청나게 성장한 느낌이 들었다.

두 눈을 감은 채로 연주하는 그녀의 머릿속에 화려한 꽃장식의 정원이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이것은 대체….’

믿기 힘들만큼 환상적인 피아노 소리와 그녀의 바이올린의 음이 하나로 합쳐진 그 순간.

밖에서 다과를 준비해 올라가던 한스는 문 앞에서 쟁반을 손에 받쳐 든 채로 얼어붙어 버렸다.

“세상에…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곡이야.”

그 후로 베토벤은 줄리에타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었다.

어쩌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기였을지 모른다.

평생 여자를 멀리했던 그가 그녀에게 만큼은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었으니까.

베토벤은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했고, 줄리에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 * *

“와아~ 멋지다. 그럼 베토벤은 줄리에타라는 사람과 결혼했나요?”

마치 한편의 동화와 같았던 이야기에 나는 보채듯 할아버지께 물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으셨다.

“당시 베토벤의 나이는 32살이었다. 그리고 줄리에타는 고작 17살이었지.”

“아, 굉장히 많이 차이가 나네요?”

“아무리 뛰어난 음악가이지만 평민 출신인 그에게 귀차르디 가문의 아가씨를 시집보낼 순 없었지.”

“아… 그러면?”

“당시 줄리에타의 아버지였던 포르디 백작은 베토벤에게 진정으로 딸을 위한다면 그 마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아노곡을 써달라고 요청했지.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곡이 바로 그의 14번째 피아노 소나타… 후에 ‘월광’이라는 별칭을 얻은 곡이지.”

“와~!! 월광 소나타가 줄리에타를 생각하며 만들어진 곡이군요. 어쩐지 엄청 아름다운 곡이더라니.”

어라, 잠깐만? 그런데 3악장은 왜 그토록 화가난거지?

할아버지는 내 생각을 읽었는지 쓸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곡을 써내려갈 당시만 해도 베토벤은 몰랐을 거야. 그것이 자신이 사랑하는 줄리에타의 약혼식 피로연에 쓰일 줄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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