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Ep.6 : 선생님께. (3)
* * *
1802년. 오스트리아 빈.
“주인님.”
“······.”
“주인님?”
“······.”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조차 없는 베토벤을 잠시 바라보던 한스는 할 수 없이 확성기를 꺼내들었다.
베토벤의 친우인 프란츠 베겔러 박사가 베토벤을 위해 특별히 제작해준 물건이라 그런지 제법 효과가 있는 편이었다.
“주인님. 오늘도 식사를 거르실 건가요!!”
“한 끼쯤 굶어도 안 죽는다. 한스.”
“그렇게 말씀하신 게 벌써 어제 아침부터인데요? 사람은 며칠이나 굶으면 죽어요. 주인님!!”
“내가 어제도 굶었었나?”
“삼일 전 점심 때 드신 감자스프 한 그릇이 전부입니다!!”
목이 찢어져라 큰소리로 외치는 한스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신경질 적으로 깃털 펜을 휘날리며 입을 열었다.
“됐으니까. 가봐.”
“네!! 그럼 저는 이만!!”
소리를 지르느라 얼굴이 벌개진 한스는 연신 기침을 해대며 작업실 문을 나섰다.
그때 다시 베토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꼬맹… 아니 민준이 소식을 듣지 못했나?”
그러자 한창 기침을 내뱉던 한스는 베토벤의 질문에 크게 호흡을 들이켰다.
“그냥 작게 말해도 돼. 입모양을 보면 대충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으니까.”
“커흡… 네. 알겠습니다.”
“좋아. 이제 말해보게.”
“그게 여전히 민준이는 보이지 않네요. 3년 전 그 날 이후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런가…”
“아무래도 그때 주인님께서 하신 ‘그 말’이 굉장히 상처가 되었나봅니다.”
“······.”
“아무리 천재적인 소질을 가진 아이라지만, 고작 11살짜리 꼬마입니다. 아마 저라도 주인님께 크게 실망했을 거예요.”
“그렇다고 그런 식으로 사라져? 스승님이라고 지 맘대로 쫄래쫄래 따라다닐 때는 언제고.”
“말은 그렇게 하셔도 민준이가 그립긴 그리우신가 봅니다?”
“시끄러우니 나가 봐.”
미간을 찌푸리며 휘휘 손을 내젓는 베토벤의 모습에 한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시끄럽다고? 내 입모양으로만 알아 듣는다면서 뭐가 시끄럽다는거지?’
아마도 평소에 자주하던 입버릇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무심결에 뱉어 나온 말인 듯 했다.
다시 작업에 열중하는 주인의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한스는 작업실을 나와 조용히 문을 닫아 주었다.
조용히 문을 닫는 법.
그것은 청력을 거의 잃은 베토벤에겐 무의미한 행동이었으나, 그것 역시 오랜 세월 주인을 모신 한스의 작은 버릇이었다.
&
산책을 좋아하던 베토벤은 귀가 잘 들리지 않을 때에도 자주 빈의 거리를 걷고는 했다.
예술의 도시.
유럽 음악의 중심.
그리고 그 중심에 베토벤이 있는 시기였다.
과거 자신을 모차르트보다 못하다고 평가했던 귀족들은 이제와 언제 그랬냐는 듯 베토벤에게 파티 초대장을 보내왔지만, 그것은 모두 그에게서 곡을 얻어내기 위한 사탕발림에 불과 했다.
당대 유명한 음악가가 자신을 위해 작곡한 곡이라니…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비엔나에선 그러한 헌정곡이 유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것 수많은 피아노 소나타를 써오며 첫 번째로 인쇄한 곡을 제외하고는 누군가에게 곡을 헌정해본 적이 없던 그에게서 헌정 곡을 얻어 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유일하게 헌정한 피아노 소나타 1번 역시. 1악장은 교황에게 그리고 2악장은 당시 스승이었던 요제프 하이든에게 의리로 바쳤을 뿐이니까.
‘헌정 곡? 웃기고 있군. 누구 좋으라고? 그래. 혹여 내 귀를 낫게 해준다면 주님에게 한곡 정도는 내줄 수 있지.’
베토벤은 피식 실소를 터뜨리며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길 때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마치 허공을 떠다니는 기분이다.
아니, 마치 깊은 물속을 거니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그런 답답함이 어깨를 짓누르면 이번엔 제대로 고개를 들고 걸을 수가 없다.
그러다보면 결국 짜증이 난다.
결코 풀리지 않는 짜증이…
품안에 있는 두어 장의 유서를 근처 아무 우체통에나 집어넣고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다.
하지만 고개 숙인 그에게는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다.
‘반드시 그 곡만은 기필코 완성하고 죽으리라. 결코 모차르트 처럼 생애 마지막 곡을 미완성으로 끝내진 않겠어.’
이럴 때 그 꼬맹이 녀석만 있었더라도…
베토벤은 자꾸만 떠오르는 어린 소년과의 추억에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어라, 내가 언제 여기까지 왔지?’
거리의 악사들이 모여 있는 다리 위.
이 거리는 자신의 제자였던 민준이를 처음 만났던 곳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듣고 크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던 동양인 소년.
3년 전 이곳에서 갑자기 나타났다가 소리 없이 종적을 감춰버린 천재 녀석.
어쩌면 그렇게 또 다시 우연처럼 만나지 않을까 싶어 산책을 나서면 꼭 버릇처럼 이 거리에 다다르게 되었다.
‘후우~ 여기는 여전하군.’
지금도 그 때처럼 이름 없는 음악가들은 붉게 물든 석양을 조명 삼아 열심히 활를 켜고 있었다.
비록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보잉 자세만 보아도 그 사람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있었던 베토벤은 냉소적인 표정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키잉~ 끼이이잉~ 끼깅~
‘거 봐. 저런 소리가 날 줄 알았다니까.’
역시나 틀리지 않은 자신의 예상에 피식 웃음을 짓던 베토벤은 그 후 채 몇 걸음 걷지 않아 다시 두 발을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끼기잉~ 낑~
행여 자신이 환청을 들은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두 번째 보잉 음 마저 확실히 그의 귀에 다다른 순간.
그는 충격에 휩싸였다.
‘소리가… 들린다!?’
미묘한 감각에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의 귀는 여전히 주변의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아주 가까이에서 연주하는 첼로 연주자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멀리서 들려오는 미숙한 바이올린 소리는 어째서 들려오는 걸까?
하지만 그런 의문 속에서도 괴상한 소리를 내고 있는 수준 미달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무얼 연주하고 싶은 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만든 곡이었다.
‘바이올린 소나타 5번?’
후에 그의 14번째 피아노 소나타 ‘월광’과 마찬가지로 평론가들 사이에서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5번은 ‘봄’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었다.
굉장히 산뜻하고 활기찬 바이올린 연주는 피아노의 협연이 더해지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말 그대로 ‘봄의 찬가’ 그 자체였다.
현재의 귀족들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은 거의 필수적으로 배워야하는 교양 수업이나 마찬 가지였기에 피아노 소나타와 함께 부수입을 올리기 위해 작곡했던 바이올린 소나타는 그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다 주었다.
현재 베토벤은 피아니스트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20대 초반의 젊은 시절 독일 ‘본’의 궁정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연주한 적이 있었다.
별로 솜씨는 뛰어나지 않았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항상 맡은 연주에 최선을 다했던 그의 모습을 항상 지켜보던 동료가 언젠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난 정말 네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얼마나 열정적으로 연주하는지 완전 엉뚱한 포지션을 연주하고 있었는데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니깐?-
갑자기 떠오른 옛 기억에 오랜만에 제법 웃음다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다 또다시 들려오는 바이올린의 보잉 음에 번뜩 정신을 차린 그는 서둘러 그 소리를 쫓아 다리 위를 뒤지기 시작했다.
낑~ 끼기기이잉~
수많은 거리의 악사들 사이를 헤치며 오로지 자신의 두 귀에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자, 그는 어느새 다리를 끝까지 건너와 있었다.
“아하하~ 아가씨. 아무리 여기가 떠돌이 악사들의 쉼터라지만, 실력이 너무 형편없는데? 그래도 열심히 하는게 보기 좋아~”
“고마워요. 아저씨들~”
벌써 몇 시간째 같은 구간을 반복 중이던 줄리에타는 사람들의 조롱에도 꼿꼿히 허리를 세웠다.
오랜 연습으로 인해 땀에 젖은 그녀의 붉은 머릿칼은 노을빛에 더욱 탐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아직 연습이 부족해.’
그렇게 심호흡과 함께 속으로 파이팅을 외치며 어깨에 바이올린을 올린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저 사람? 안색이 별로 좋아보이진 않은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가 다시 바이올린을 켜자. 남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처음엔 거리의 음악을 즐기는 관객인 줄로만 알았던 남자가 점점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위협을 느낀 줄리에타는 바이올린의 활 끝을 남자의 목젖에 가져다 대었다.
“뭐에요 당신?”
“그러는 넌 뭐야?”
“네?”
“뭔데 여기서 내 음악을 망치고 있는 거냐?”
내 음악이라니, 그렇다면 설마 이사람 베토벤?
줄리에타는 남자의 말에 흠칫 놀랐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며 다시 남자를 똑바로 쳐다 보았다. 그녀가 익히 들어왔던 있던 베토벤과 눈 앞에 남자의 모습은 너무나 확연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망설이고 있던 그녀 앞으로 남자가 한 걸음더 다가 왔다.
그 순간.
위협을 느낀 줄리에타는 자신도 모르게 오른팔을 크게 휘둘렀다.
&
그날 밤.
“아하하~ 그래서 천하의 베토벤이 아가씨한테 뺨이나 얻어맞고 돌아왔단 말야?”
베토벤의 친우이자 담당의사인 프란츠 베겔러 박사는 붉게 물든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친구에게 차가운 헝겁을 내밀었다.
“이거라도 대고 있게. 화끈거리는 게 좀 나아질 거야.”
“고맙군.”
“그나저나 그 아가씨 손이 제법 매운데? 아주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찍혔어.”
베토벤은 싱글거리며 자신을 놀리는 프란츠에게서 빼앗듯이 헝겊을 가로채었다.
“제길.. 이제까지 살아오며 가장 형편없는 연주였어.”
“그래도 신기하군. 어떻게 그 여자의 바이올린 소리만 들린 걸까? 자네 귀는 거의 청력을 잃었을 텐데?”
“나도 그래 이상하단 말이지. 하고 많은 연주들을 제쳐두고, 하필이면 그런 끔찍한 연주만 귀에 들리는 건지.”
“그래도 무언가 소리를 들었다는 건 좋은 일 아닌가?”
“으음…”
“한 번 다시 찾아가봐. 어쩌면 그녀의 악기에 뭔가 비밀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다음 날.
친구의 말을 들은 베토벤은 아침 일찍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약간의 산책을 제외하곤 거의 매일 피아노 앞에 매달려있던 그였기에 한스는 내심 마음이 놓였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간단히 차려주게나 조금 오래 있을지도 모르니.”
“네~ 알겠습니다.”
한스와 함께 간단히 식사를 마친 베토벤은 포크를 내려놓자마자, 거리의 음악가들이 모인 다리 위로 향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다리 위는 한산했다.
베토벤은 어제 그녀를 처음 보았던 다리 위에서 묵묵히 그녀가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내가 너무 일찍 온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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