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Ep.6 : 선생님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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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8시.
석동철이 송현우 실장과 만나기로 한 장소는 신촌에 위치한 작은 찻집이었다.
대체 대회 관계자가 어째서 자신을 만나보고 싶어하는지 석동철은 그 점이 매우 궁금했다.
콩쿨 수상 경력으로 따진다면 자신과 비슷한 수상 경력을 가진 대선배들도 있을 텐데…
왜 하필 자신을 꼭 집었을까?
하지만 그런 의문도 그와 직접 대화를 해보면 모든 것이 해결 될 것이었다.
약속 시간에 맞춰 찻집에 도착한 석동철은 테이블을 가득 메운 손님들 중에서 손쉽게 송현우 실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석동철이 찻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송 실장은 계속 해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안녕하세요. 혹시 송현우 실장님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석동철 교수님. 교수님이라 나이가 조금 있으실 줄 알았는데, 엄청 젊으시네요.”
“그런 소리 자주 듣는 편입니다.”
석동철은 비어 있는 의자에 가방을 내려두고 등받이에 코트를 걸어 두었다.
자리에 앉아 명함을 주고받은 석동철은 메뉴판을 들고 온 여종업원에게 간단한 음료를 주문하였다.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아직 심사위원직을 맡기로 마음을 굳힌 것은 아니니 부디 오해는 마세요.”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단지 새로운 심사 방식에 대해 교수님의 의견을 듣고 싶은 것뿐이니까요.”
“새로운 심사 방식이라니, 대체 어떤 방식으로 아이들의 실력을 평가하실 생각입니까?”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부터 치고 들어오는 석 교수의 질문에 송 실장은 슬쩍 말을 돌렸다.
“석동철 교수님은 현재 국내 음악 시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네?”
피아노 대회 심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뜬금없이 튀어 나온 화제에 대해 석동철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송현우 그런 석동철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음악은 한 시대의 흐름을 대표하는 아이콘이라고 하죠? 저는 음악이라는 콘텐츠에 굉장히 관심이 많습니다.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석 교수님. 혹시 차를 세워두시고 이곳에 오실 동안 몇 개의 레코드점을 지나 오셨는지 기억하시나요?”
아무래도 서울을 대표하는 대학가 이다보니 당연히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레코드점이 꽤나 많았다. 석동철은 자신이 지나오는 동안 눈에 들어왔던 레코드 점 몇 개를 떠올려 보았다.
“글쎄요. 한 4~5개 되려나?”
“제가 근무하는 그레이스 백화점에서 이 찻집까지 오는 동안에는 조그만 레코드점까지 포함해 총 9개의 가게가 있습니다. 교수님께서 어느 길로 오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신촌이라는 이 조그만 번화가에 수십 개의 레코드점이 존재 하는 것이죠.”
“뭐, 요즘 젊은이들에게 기타가 유행중이기도 하고 그들이 음악을 들어서 해가 될 건 없지요. 지금이 70년대도 아니고 더 이상 국가 금지곡을 부른 다고 잡혀갈 일도 없으니까요.”
그러자 송 실장은 석 교수의 말에 맞장구치며 손가락을 튕겼다.
“맞아요. 아주 정확하십니다.”
송현우의 과한 제스쳐에 석동철은 잠시 이 사람이 제정신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교수님 말대로 음악을 좋아하는 청년이 늘어나면서 현재 한국의 음악 시장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트로트 아니면 발라드에 국한 되어있던 음악계가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180도 달라지고 있어요. 평론가들은 서태지의 댄스 음악을 비롯한 타 음악 장르는 일시적인 사회 현상일 뿐이라며 비판했지만 보세요. 지금 레코드점 앞에 서면 스피커에서 무슨 곡이 울려 퍼지나요? 서태지의 ‘마지막 축제’ 아니면 015B의 ‘신인류의 사랑’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에도 박남정이나 소방차 같은 댄스 가수들이 존재했지만, 그들을 현재의 댄스 그룹과 비교하기엔 아무래도 시대의 흐름에 격차가 생겨나 있었다.
석동철은 송 실장의 열변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변해가는 국내 음악 시장과 자신의 피아노 심사가 무슨 관계에 있는지는 아직까지 감이 오지 않았다.
송 실장을 이대로 둔다면 자기만의 이야기에 취해 밤새도록 이야기할 것만 같아. 석동철은 이쯤에서 이야기의 요점을 끌어내보기로 했다.
“그래서 송실장님께서 하고 싶은 이야기 어떤 것입니까? 국내 음악 시장의 상황과 피아노 대회는 아무 연관이 없어 보이는데요.”
“일전에 교수님께서 내신 서적을 우연히 본적이 있습니다. 굉장히 흥미롭더군요.”
“네?”
“거기에 쓰여진 내용에 의하면 국내 음반시장의 미래를 비롯해 작곡가와 가수의 저작권법 개정에 대해서도 굉장히 자세히 기술해 놓으셨던데, 혹시 그 당시 국내 음반 시장의 흐름이 점점 바뀔 거라는 것을 미리 예측이라도 하신 겁니까?”
몇 해 전. 교수 임용 시험을 준비하던 중, 소신을 담아 펴낸 책이 한권 있었다.
‘대중문화 속 한국 음악이 나아갈 길’이라는 주제로 작성된 그 책에는 음악을 업으로 하는 예술가들이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수입을 감안하여 몇 가지 법에 의거해 특별한 저작권법을 발효 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실제로 가수들의 음반은 버스 정류장 근처에 가보면 좌판에서 소위 ‘짝퉁테잎’ 으로 둔갑해 아주 싼값에 팔려나가고 있었으니까.
유명 가수들이야 레코드점에서 팔려나가는 음반 수입만으로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지만, 그 이외의 가수들에겐 하루 한끼 생활이 걸린 수입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클래식을 전공으로 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괜찮은 교향악단이나 시립교향악단의 말석이라도 차지하지 못하면 음악으로 벌어먹고 사는 방법은 곡을 쓰는 것뿐이니까…
석동철은 자신의 책이 어느 깨어 있는 사회 지도층의 손에 들어가 가난한 음악가들의 생계수단을 열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았다.
하지만 책을 출판하고 4년이 지났어도 한국의 음악계는 여전히 똑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의 책에 관심 있어 하는 사람이 나타나다니…
그것도 한 백화점의 마케팅 기획 실장이 말이다.
석동철은 송현우의 질문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는 종업원이 가져다준 냉커피로 목을 축인 뒤 입을 열었다.
“시장 예측이라기 보단 그저 작은 바램이었습니다.”
“그래도 제법 현 상황이랑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던데요?”
“아뇨. 모르긴 몰라도 음반 시장은 앞으로 더 엄청나게 성장할 겁니다.”
석 교수의 대답에 송현우는 제법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죠?”
“음악 장르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으니까요. 이런 시기에는 굉장히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이 등장하는 법이거든요. 또한 CD라는 새로운 음반 매체의 등장과 더불어 워크맨 시장도 굉장히 활기를 띄고 있지요. 산업이란 마치 도미노와 같아서 조그만 작용에도 그 여파가 엄청 커지기 마련이거든요.”
석동철 교수의 말을 끝까지 듣고 난 송현우의 마음 속에서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역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어. 논문에서 느꼈듯이 이 사람은 문화 콘텐츠 산업의 방향을 내다보는 혜안(慧眼)을 가지고 있구나.’
“교수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석 교수님은 제가 생각 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안목을 가지셨군요.”
“네?”
“사실 교수님을 이렇게 보자고 한 것은 최근 제가 추진하려는 한 사업 때문입니다.”
“사업이요?”
“이미 음악계에서는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움직이려는 사람들이 실제로 하나 둘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체 뭘 말씀 하시는 건지?”
자꾸 뜸을 들이는 송 실장의 대답에 슬슬 짜증이 일려던 찰나, 그의 입에서 뜻밖의 단어가 튀어 나왔다.
“대형 기획사입니다.”
“네?”
“지금까지 가수들은 그저 가수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카테고리 안에서 소속사와 계약하여 음반을 제작, 판매하는 형태로 데뷔가 이어졌죠. 그러다보니 어느 땐 소속사가 수익을 낼 수 있는 음악적 색깔을 강요 받기도 하고, 영입 비용을 줄이기 위해 밴드에서 보컬만 쏙 빼앗아 솔로 데뷔를 시키곤 했죠. 소속사에서 그런 양아치 짓을 하다 보니 제대로 데뷔 한번 못해보고 사라지는 가수들도 엄청 많다고 하더군요.”
“물론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조금 더 많은 사람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써낸 책이었지만, 역시나 한권의 책으로 바꿀 수 있는 시장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책에서 마지막 문단이 참 마음에 들더군요.”
“마지막 문단이라면…”
석동철은 송실장의 말에 자신이 써내려갔던 논단의 마지막 장을 떠올려보았다.
-이 책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들 중에 국회의원님과 같은 사회 지도층이 계시다면 그리고 만약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다면 출판사를 통해 저에게 연락 한통 주시길 바랍니다.-
“설마, 그 문장을?”
그러자 송현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예비 사회 지도층입니다.”
“허어? 하지만 아까 본 명함에서는 백화점 마케팅 팀 기획 실장님이시라고…?”
“아~ 그건 아버지께 백화점을 물려받기 전 사회 경험을 쌓기 위해 다니고 있는 것이구요. 실제론 그레이스 백화점 최고 경영자의 장남입니다.”
“어억!?”
“뭐 확실히 말해 아직까진 사회 지도층이라고 할 만큼 어마어마한 재력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버지 재산에 눈이 멀어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재벌 2세 띨띨이들보다는 조금 더 비상한 두뇌회전이 가능하니 너무 걱정은 마세요.”
송 실장의 파격적인 자기소개에 석동철은 애꿎은 냉커피를 들이 삼켰다.
“자~ 그럼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죠. 우선 제가 왜 교수님을 이번 피아노 대회 본선에 심사를 맡아달라고 했는가? 이번 예선전을 직접 관찰한 결과. 이번에 저희가 뽑은 심사 위원들에게 공정한 심사를 맡기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교육청을 빼버리고 저희 주관으로만 할 걸 그랬어요.”
“대회를 방해하는 잔가지들이 많다는 말씀이군요.”
“아~주. 정확하십니다. 사실 딱히 눈에 띄는 아이가 없었다면 저도 그저 눈감아 주려했습니다. 이런 말하긴 뭣하지만, 제 동생도 제법 피아노를 치거든요. 그 아이라면 별 탈 없이 자신의 실력으로 상을 탄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으니 말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교수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이번 대회에 괴물이 하나 나타났어요.”
그러자 송 실장의 이야기를 내내 듣고만 있던 석 교수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혹시 97번. 차민준 학생 이야긴가요?”
“허억! 교수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 * *
“서른 넷!!”
“서른 다..섯!!”
“서른 여..섯!!”
손바닥 안에 차오른 땀 덕분에 철봉을 잡고 있는 손이 미끌 거렸다.
아니 그런데, 생각해보니 손가락 힘만 기르면 되는데, 굳이 턱걸이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으음… 에라 모르겠다 일단 하는데까지 해보자..
손아귀에 힘을 꽉 주며 상반신을 올리던 도중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차민준.”
“으응? 안나… 누나?”
철봉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누나를 바라보자, 그녀는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나에게 말했다.
“본선이 코앞인데, 너 지금 뭐하니? 피아노 연습 안 해?”
“응? 나도 알아 그래서 지금 하고 있잖아?”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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