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Ep.5 : 좋은 사람. (11)
“출발하지.”
“네. 주인님.”
“아, 선생님 같이 가요!!”
행여 자신을 두고 가기라도 갈까. 재빨리 베토벤의 뒤를 쫓아 현관을 나온 민준은 일행 중 가장 먼저 마차에 올랐다.
“쯧쯧. 방정맞은 녀석.”
“주인님. 민준이가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그 어리다면 무조건 다 봐줘야하는 우매한 사고방식은? 적어도 내가 저 녀석 나이일 때는 말이지…”
하지만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 베토벤은 잠시 후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쳇… 주정뱅이 아버지에게 얻어맞으며 피아노 치던 기억 밖에 안 떠오르는군.”
그렇게 황실에서 보내준 마차에 오른 베토벤 일행은 따사로운 오후 햇살을 맞으며 쉔부른 궁전으로 향했다.
지난 연회 때에는 차가운 밤공기를 꿰뚫는 한줄기 화살처럼 내달렸던 바람에 엉덩이를 의자에 제대로 붙이기조차 힘겨웠지만, 이번엔 그때에 비하면 굉장히 안락한 승차감을 누릴 수 있었다.
덕분에 민준은 차분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오스트리아 시가지를 살펴볼 수 있었다.
‘와아~ 진짜 선생님네 집에서 보았던 영화랑 거의 똑같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과 건축물을 바라보던 민준은 마치 영화 아마데우스의 한 장면으로 들어온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이윽고 일행의 마차가 궁전 안으로 들어오자, 멋진 제목의 근위병들이 차례로 그들에게 경례를 붙였다.
한 낮의 쉔부른 궁전은 연회 때만큼의 화려함은 없었지만, 대신 그 빈자리를 채우고도 남을 웅장한 기품이 서려있었다.
“한스. 자네는 이곳에서 기다리게. 꼬맹이 너는 구겨진 옷을 단정히 하고 따라 오거라”
“편히 다녀오세요. 주인님. 민준이도 잘 다녀오거라.”
한스는 자신의 주인 베토벤과 어린 민준을 향해 그들이 더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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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을 따라 쉔부른 궁전으로 들어선 민준은 유리처럼 반들거리는 대리석 복도와 벽에 걸린 화려한 색채의 그림들을 본 순간 입이 쩌억 벌어졌다.
“뭘 그리 두리번거려? 빨리 따라와.”
자신을 재촉하는 스승의 목소리에도 어린 민준의 고개를 멈출 줄 몰랐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아노 선율에 두리번거리던 민준은 쫑긋 귀를 세웠다.
“피아노 소리다.”
“뭐? 난 아무소리도 안 들리는데?”
“2층에서 누군가가 피아노를 치고 있어요.”
혹시나 자신의 청력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의심한 베토벤은 자신을 안내하는 수행원에게 물었다.
“혹시 지금 피아노 소리가 들리나요?”
“아뇨. 전혀요. 하지만 2층이라면 궁정악장님의 레슨실이 있는 곳이긴 합니다만…”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아무 소리도 안 들리건만 꼬맹이는 대체 무엇이 들린다고 하는 걸까?
아이를 지켜보던 베토벤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혹시 지금 들리는 곡이 어떤 곡인지 아느냐?”
“굉장히 익숙한 멜로디인데, 아마도 모차르트의 곡 같아요.”
“모차르트?”
궁정악장 살리에리의 레슨실에서 모차르트의 음악이 울려 퍼지다니, 그는 모차르트를 시기했던게 아니었나? 베토벤은 아이러니한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수행원이 베토벤의 표정을 읽고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궁정악장님께서는 평소에도 모차르트의 음악을 즐겨 연주하시곤 합니다. 세간에는 악장님께서 모차르트의 재능을 시기해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지만, 그것은 모두 허황된 거짓 소문일 뿐입니다. 사실 저희 악장님만큼 사람 좋으신 분도 드물지요. 자~ 그럼 어서 가시죠.”
말을 마친 수행원은 가볍게 베토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발을 옮겼다.
2층을 향해 붉은 카펫이 깔린 계단을 오르자, 드디어 베토벤의 귀에도 피아노의 선율이 들리기 시작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C장조. 알레그로. 꼬맹이의 말이 맞았군.’
상당히 먼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의 피아노란 걸 단번에 알아챈 민준의 청력에 베토벤은 내심 놀라움을 삼켰다.
안내원 역시 복도에서 울려 퍼지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에 놀란 눈으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한창 절정으로 향하던 피아노 연주가 뚝하고 끊겼다.
갑작스레 연주를 마친 탓에 레슨실로 향하던 베토벤 일행의 걸음도 멈추었다.
“뭐지?”
누구나 그렇겠지만 한창 물이 오른 순간 듣고 있던 연주가 끊어지면 괜히 기운이 빠진다.
그때 살리에리의 레슨실로 보이는 복도 끝에서 새하얀 문이 벌컥 열리며 어린 꼬마아이가 튀어 나왔다.
그리고 뒤이어 안쪽에서 궁정악장 살리에리의 목소리가 따라 들려왔다.
“모차르트!! 네 이 녀석! 어서 돌아오지 못할까?”
“싫어요!! 저는 피아노라면 질색이라구요!!”
살리에리를 향해 소리를 빽하고 내지른 소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베토벤 일행과 반대편 복도로 달렸다.
도망친 아이를 붙잡기 위해 뒤이어 따라 나온 살리에리는 좌우로 복도를 살피다 자신을 찾아온 손님과 눈이 마주치자 난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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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런. 옛날부터 피는 못 속인다고 하던데, 제 아버지의 천재성을 그대로 물려받지는 못한 모양이더군. 참으로 안타까워.”
화사한 창가 아래 놓인 테이블에 마주 앉아 직접 우려낸 홍차를 건네던 살리에리 작게 한숨을 내뉘었다.
궁정악장 앞에서도 태연히 의자에 몸을 기대어있던 베토벤은 그가 건네는 홍차를 받아들며 되물었다.
“그렇다면 방금 전 레슨실을 뛰쳐나간 그 소년이…?”
“그래. 모차르트의 하나뿐인 아들. 프란츠 모차르트일세.”
살리에리는 자신을 똘망 똘망한 눈으로 바라보는 민준에게 간식으로 나온 달콤한 디저트를 내밀었다.
동그랗고 봉긋하게 부풀어 오른 새하얀 케이크 위에 건포도가 한 개씩 박혀 있었는데, 민준은 그것을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소리쳤다.
“아~!! 저 이 케이크 이름 알아요.”
“그래?”
민준 앞에 놓인 디저트는 오수정 선생님과 함께 본 영화에서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부인에게 내민 디저트과 똑같이 생겼기에 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힘차게 대답했다.
“비너스의 젖꼭지. 맞죠?”
“푸흡!! 쿨럭..!!”
품위 있게 홍차를 삼키던 베토벤은 어린 제자의 대답에 머금고 있던 홍차를 공중에 뿜었다.
“뭐라고!?”
“꼬, 꼬마야. 대체 어디서 그런 흉측한 이름을 듣고 온 것이냐?”
“아, 아닌가요?”
밀려드는 창피함에 민준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혀를 빼꼼 내밀었다.
베토벤은 그런 민준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차마 궁정악장의 앞이었기에 꾸욱 참아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악장님. 어째서 이 아이를 따로 보고 싶어 하신 겁니까?”
그러자 살리에리는 테이블 위에 홍차를 내려놓으며 소년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꼬마야. 전에 귀족들을 초대한 연회에서 참 재미난 연주를 들려주더구나.”
민준은 혹시나 그 날 살리에리의 곡을 멋대로 편곡한 것에 대해 화가 난 것이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살리에리는 그런 민준의 마음을 미리 눈치 챘는지, 도리어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날의 연주에 대해 널 꾸짖을 생각은 없단다. 단지 다시 한 번 눈앞에서 들어 보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가진 그 재능이 진짜배기인지 말이다.”
그때 가만히 둘을 지켜보던 베토벤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녀석의 재능은 진짜입니다. 스승인 제가 보증하죠.”
베토벤의 뜻밖에 칭찬에 민준은 깜짝 놀라 번쩍 고개를 들었다.
항상 좁쌀만 한 실력이라고 꾸짖거나, 기교만 추구한다고 꾸중만 들었던 민준에게 베토벤의 칭찬은 굉장히 특별한 것이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자네의 명성은 궁정 안에서도 자자하더군.”
“감사합니다.”
“좋은 스승 밑에 좋은 제자가 따르는 법이지. 솔직한 말로 자네가 부럽군.”
“과찬이십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 아이의 스승인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될까?”
“무얼 말씀이신지?”
“방금 전 레슨실을 박차고 나간 프란츠에게 민준이의 피아노를 한번 들려 줄 수 없겠나? 가능하다면 모차르트의 곡 중에서 말일세.”
“네?”
“너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불쌍한 녀석이야. 생전에 볼프강의 피아노를 직접 들어보았다면 지금처럼 피아노를 싫어하지는 않았을 텐데, 프란츠에게 아직까지 볼프강 만큼 번뜩이는 천재성은 엿보지 못했지만, 피아노에 어느 정도 재능은 있다네. 아마 비슷한 나이 또래의 민준이가 좋은 자극이 될 거야.”
궁정악장 살리에리의 진심어린 부탁에 베토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대신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뭔가?”
“우선 저의 제자는 늦은 밤까지 궁전에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자정 전에는 시내의 저택으로 돌려보내주십시오.”
“그건 어렵지 않네.”
“그리고 또 하나.”
베토벤은 두 번째 부탁을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저에게 성악에 대해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자네에게 성악을?”
살리에리는 뜬금없는 베토벤의 두 번째 부탁에 고개를 갸웃 거렸다.
어째서 피아노 작곡을 주로 하는 피아니스트가 성악을 배우려 하는 것일까?
하지만 베토벤은 살리에리에게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을 피하는 분위기였다. 결국 살리에리는 이제 갓 서른이 되어가는 실력 있는 음악가 베토벤에게 성악과 함께 자신의 지식을 나누어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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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에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마차 안에서 스승과 함께 앉아있던 민준은 거대한 정원을 빠져 나오자,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 궁정악장님. 실제론 굉장히 좋은 사람이네요. 라이벌이었던 모차르트의 아들에게 피아노도 가르쳐주시고.”
“당연하지. 궁정악장이 아무나 되는 줄 아느냐.”
“갑자기 저를 따로 보고 싶어 하신다 길래 엄청 무서웠거든요.”
“왜? 자신의 곡을 멋대로 편곡했다고 너에게 해코지라도 할까 봐?”
“네. 하지만 이젠 괜찮아요. 그러신 분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런데 선생님 아까 살리에리님께는 무슨 부탁을 하신 거에요?”
그때 두 눈을 감은 채 마차 벽에 기대어 있던 베토벤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민준에게 물었다.
“어이, 꼬맹이.”
“네?”
“너는 신을 위해 연주하는 교향곡과 신을 위해 노래하는 성악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고작 11살 난 민준에게 스승인 베토벤의 질문은 굉장히 난해하게만 느껴졌다.
아직 교향곡과 성악이 당최 무언지 잘 모르는 민준은 한쪽으로 고개를 갸웃 거릴 뿐이었다.
그 모습에 베토벤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되었다. 어차피 내가 스스로 헤쳐가야 할 문제이니.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거라.”
베토벤은 고개를 끄덕이는 민준에게서 눈을 떼어 다시 붉은 노을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까지는 내 두 귀가 버텨주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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