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36화 (36/177)

[36] Ep.5 : 좋은 사람. (9)

&

“그래? 너희 학교에 그런 아이가 있단 말이지.”

민준이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온 오선생은 늦은 저녁 식사 중이던 아버지에게 민준이의 재능에 대해 털어 놓았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희경이도 그녀의 말에 맞장구 쳐주었다.

“맞아요. 아버지. 그 아인 진짜 천재에요. 영화에서 나온 연주도 딱 한번 듣고 바로 치는데, 정말 듣고 있는 제가 소름이 다 돋을 정도였다니까요.”

“음? 희경이 너까지? 우리 두 딸이 그 천재소년에게 홀딱 빠졌구나.”

자신의 두 딸을 반듯하게 키워낸 아버지. 오성태씨는 두 딸이 들려주는 소년의 재능에 묘한 흥미가 일었다.

“그렇게나 실력이 있다면 이 아비가 올 때까지 좀 더 기다려주지 그랬니?”

“그러기엔 아버지가 너무 늦게 오셨어요. 평소엔 일찍 오시더니, 오늘은 웬일로 이렇게 늦으 신거에요?”

“하하.. 그게 다른 교수들이랑 술자리가 좀 길어지다 보니. 그런데 우연인지 몰라도 참 재미있구나.”

“뭐가요?”

“안 그래도 방금 전 술자리에서 한 교수가 최근 우연히 한 소년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나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하더군. 음대 교수로서 재능 있는 아이들이 늘어나는 건 즐거운 일이지.”

“그래요? 흠~ 하지만 그 소년도 우리 민준이 만큼은 아닐걸요?”

“하하~ 그것 참 대단한 자신감이로구나. 내 딸이 이렇게까지 추천하니 대체 어느 정도 실력인지 꼭 한번 보고 싶은데?”

“그러지 마시고 아버지. 이번에 열리는 어린이 피아노 대회 본선에 한번 오시는 게 어때요?”

그러자 된장찌개에 수저를 옮기던 오성태가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린이 피아노 대회? 그래. 생각해보니 그 교수도 같은 말을 하더군. 기회가 되면 이번에 그레이스 백화점에서 열리는 어린이 피아노 대회에 한번쯤 가보라고…”

“네? 그렇다면 설마?”

“그 교수가 본 아이랑 네가 가르치는 아이랑 어쩌면 같은 아이일수도 있겠구나.”

“그럴지도 몰라요. 그 교수님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나요?”

“그게, 석… 석동.. 아, 석동철 교수. 피아노 학과 교수란다.”

“석동철 교수. 석동철 교수…”

그녀는 아버지가 알려준 교수의 성함을 반복해서 읊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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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저기 연주 끝났는데요?”

“그래서?”

“그러니까… 레슨이 끝났다는 거죠? 헤헤”

학생의 대답에 석동철은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12시 57분.

지도 교수의 감상 따위를 듣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 마냥.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여학생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래. 점심시간이군. 약속이라도 있니?”

“네~!! 오늘 점심에 다른 과 학생들이랑 미팅하기로 했거든요.”

활기차게 대답하는 제자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석동철은 출석부 체크를 마치고 입을 열었다.

“그래. 내 감상평은 나중에 들려주마. 가 봐도 좋아.”

“감사합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쌩하니 레슨실을 나가버리는 학생의 모습에 석동철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책상위에 출석부를 던졌다.

“배우려는 의지가 없는데, 가르쳐서 무얼 하리오~”

레슨실에 준비된 조그만 의자에 앉아 벽에 몸을 기댄 석동철은 어제의 회식 자리를 떠올리자, 몰려오는 숙취에 머리가 지끈 거렸다.

‘아, 조금만 마셨어야 하는데, 괜히 학장님 근처에 앉아서 엄청 마셨네. 어쩐지 그렇게 큰 회식 자리에 가운데 테이블만 텅 비어 있더라니….’

어제 저녁 늦게까지 자료 준비를 마치고 뒤늦게 회식에 참석했을 때에는 남아 있는 자리가 별로 없었다. 나와 비슷한 처지였던 오성태 교수님과 함께 가운데 테이블에 앉자, 곧 학장님이 도착 하셨고, 그 이후론 학장님께서 권하는 술을 연거푸 마신 기억 밖에 없다.

뭐라도 먹으면 속이 좀 나아질 것 같았지만, 움직이기 귀찮았던 석동철은 그대로 벽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그때 어느 레슨실에서인지 몰라도 연습중인 재학생의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미팅 때문에 정신없던 학생이 레슨실 문을 열고 간 탓에 외부 차음이 약해진 모양이었다.

석동철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피아노 곡을 듣자마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비창이라. 그 꼬마의 연주에 비교하면 정말 ‘비참’ 할 정도의 실력이군.”

아다지오 칸타빌레라는 템포의 형상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엉망진창의 연주…

저 학생의 지도 교수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제발 지적 좀 해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일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내 귀가 너무 까다로워진 건가?’

그 날 심사장에서 거의 완벽하리만큼 훌륭한 연주를 듣고 나서인지 몰라도 최근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의 실력이 너무나 뒤떨어져 보였다.

그런 틈을 조금이라도 메꾸기 위해 석교수는 부단히도 노력했지만, 이미 대학에 들어와 모든게 자기 세상인 것 마냥 행동하는 학생들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도리어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입학 면접 때보다 실력이 더 떨어진 학생들도 여럿 있었다.

대학 졸업장.

최근에는 일단 대학에 들어와 졸업만 하면 어디로든 취직 할 수 있다곤 하지만, 음대 같은 경우는 그 경우가 조금 달랐다.

시향악단이 많은 나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럽처럼 클래식 인기가 높은 나라도 아니다.

전공을 살려 작은 악단에라도 들어가려면 1학년 때부터 기를 쓰고 연습해야하는 마당에 일단 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은 그 좁쌀만 한 실력으로 다른 아이의 과외를 가르친다.

악기 레슨으로 벌어들인 수입은 학비에 보태는 아이도 있겠지만, 대부분 신촌에서 친구들과 술 퍼마시는데 다 쓰여지기 마련이었다.

‘악순환이다. 악순환이야. 그나저나 그 피아노 대회 본선은 언제더라?’

벽에서 등을 뗀 석 교수는 한번도 펴보지 않아 아직도 1월에 머물러 있는 작은 달력을 뒤적여 보았다.

그때였다.

지잉~ 지이잉~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호출기의 진동음에 석동철은 단말기를 꺼내어 번호를 확인해 보았다.

“음? 모르는 번호인데? 어디지?”

레슨실을 벗어나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온 그는 수업 자료들로 어질러진 책상 위에서 겨우 수화기를 찾아 들었다.

“02-3XX-67XX”

다이얼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자, 천천히 신호음이 가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백화점 마케팅 기획실장. 송현우입니다.”

“여보세요? 어디시라구요?”

“아, 혹시 석동철 교수님이신가요?”

“그렇습니다. 혹시 제 삐삐에 호출하셨나요? 백화점 기획실장님이 무슨 일로 저에게…?”

“네. 이렇게 갑자기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혹시 최근 저희 백화점에서 주관하는 어린이 피아노 대회에 대해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물론입니다.”

“일전에 저희 쪽에서 심사 위원 자리를 맡아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는데, 거절 하셨더군요.”

“전에도 말씀 드렸었지만, 제가 레슨을 맡고 있는 학생이 대회에 참가하기에 형평성에 어긋날 것 같아 거절하였습니다.”

“실례지만 그 학생. 이번 예선전에 통과하였나요?”

“네. 참가 번호 99번 윤소희 입니다.”

“참가 번호 99번. 윤소희 학생… 아, 맞네요. 본선 진출자 명단 확인하였습니다.”

“혹시나 이번에도 심사 위원 자리 때문에 연락하신 거라면 정중히 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잠시만요.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이번 대회에서는 단지 심사위원들의 평가만으로 입상자를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서요. 단지 아이들의 피아노를 듣고 당신의 개인적인 감상평만 이야기해주시면 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심사위원이 입상자를 뽑지 않으면 대체 누가 선발한단 말입니까?”

“이번에 예선전 심사를 치루는 동안 위원들에게서 다소 부정적인 사례가 발견되었습니다. 따라서 본선에서는 조금 독특한 방식으로 수상자를 뽑을 예정입니다. 아주 공정하게요.”

“독특한 방식?”

“그 부분에 대해선 따로 만나서 상담 드리고 싶은데, 혹시 저녁에 시간이 되시나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굉장히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그레이스 백화점 기획실장이라…

잠시 망설이던 석동철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어디 이야기나 들어보죠.”

&

“흐음~ 여기도 오랜만이네.”

버스에서 내린 오수정 선생은 어릴 적 가끔 아버지에게 도시락을 전해 드리러 다니던 때를 떠올리자 아련한 추억에 빙긋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피아노 대회를 관련해 외근 중이던 그녀는 교육청에 다녀오는 길에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대학에 들렀다. 사실 아버지보다 어제 들은 석동철 교수란 분을 잠시라도 만나보고 싶었던 그녀는 학교로 돌아갈 시간을 계산하여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캠퍼스를 가로 질러 걸어 오는 한 무리의 여대생이 오 선생 쪽으로 다가오며 재잘거렸다.

“아~ 석교수님 레슨 진짜 짜증나…”

“그치? 젊은 교수님이라 좀 설렁 설렁 하실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완전 빡 쎄.”

“내 말이… 방금 전 레슨 중에도 빨리 가봐야 한다는 티를 그렇게 냈는데 얄짤 없더라. 이렇게 여자가 꾸미고 나왔으면 척하면 탁하고 알아 들으셔야지. 눈치가 없으셔.”

투덜거리며 자신의 곁을 지나가는 여학생들의 대화 속에서 석교수라는 단어를 전해들은 그녀는 고개를 돌려 학생들을 불러세웠다.

“아, 저기요. 방금 석교수라는 분. 혹시 성함이 석동철 교수님이신가요?”

그녀의 물음에 방금 석교수의 레슨을 마치고 나온 학생의 얼굴이 빨개졌다.

“네. 그런데요?”

“다행이다. 제가 지금 그분을 좀 찾고 있는데, 혹시 연구실이 어디인지 좀 알려주시겠어요?”

“아마. 지성관 3층 교수 연구실에 계실텐데…?”

“아, 그래요? 고마워요.”

학생들에게 인사를 하고 고개를 돌리려는데, 방금 전 학생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기요!!”

“네?”

“혹시 방금 전에 저희가 한 얘기 들으셨어요?”

“아~ 그… 석 교수님 눈치 없다는 뒷 담화?”

오선생의 대답에 학생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자 오선생은 미소와 함께 학생들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걱정 말아요. 그런 거 고자질 할 사람은 아니니까. 나도 학생 때 교수 뒷 담화 많이 해봐서 알아요. 대학 시절 그 것 만큼 재미난 것도 없죠~ 교수 연구실 알려줘서 고마워요. 그럼.”

잠시 후.

학생들이 말한 지성관 3층을 찾은 오 선생은 교수 연구실 팻말을 뒤적이다 겨우 복도 끝자락에 위치한 석 교수의 연구실을 찾아냈다.

“여기구나.”

잠시 문 앞에서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그녀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며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

아무 대답이 없자. 오 선생은 다시 한 번 조금 더 크게 노크를 해보았다.

똑똑.

“······.”

하는 수 없이 문고리를 돌리자, 스르륵 문이 열렸다.

매캐한 담배 냄새와 함께 눈에 들어온 연구실 안은 온갖 서적들로 어지러져 있었다.

하지만 정작 연구실의 주인은 자리에 없었지만, 그래도 방금 전까지 이곳에 있었는지 재떨이에 올려진 담배꽁초에는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머, 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서둘러 재떨이에 올려진 담배를 비벼 끈 그녀는 어느새 손에 배인 담배 냄새에 눈살을 찌푸렸다.

“식사라도 하러 가셨나?”

하는 수 없이 손을 씻기 위해 화장실로 향하는데, 맞은편에 한 남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젠장. 이제야 좀 술이 깨네. 아무튼 연구실도 구석탱이에 처박혀 있어서 화장실 가기도 힘들어요.”

툴툴거리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는 교수라기엔 너무 젊은 나이였다.

하지만 달리 물어 볼 사람이 없었기에 오 선생은 자신을 스쳐가는 남자를 불러 세웠다.

“저기요. 혹시 석동철 교수님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아~ 석동철 교수님이요.”

“네.”

“석동철 교수님 연구실이라면… 아, 잠깐만 나구나.”

“네?”

당황한 오선생의 표정에 석 교수는 겸연쩍은지 뒷머리를 긁으며 마저 설명을 보탰다.

“제가 술이 좀 덜 깨서… 다시 인사드리죠. 제가 석동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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