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31화 (31/177)

[31] Ep.5 : 좋은 사람. (4)

한스 아저씨의 희생으로 다행히 연주회가 시작하기 전에 도착한 우리에겐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수잔 누나와 선생님이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마차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나는 거대한 궁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까이에서 올려다본 쉔부른 궁전은 한 눈에 보아도 아름다웠다.

작년에 학교에서 소풍으로 경복궁을 간적이 있었는데, 쉔부른 궁전은 건물만 해도 경복궁의 성터를 전부 집어 삼킬 만큼 거대했다.

여기다가 마차를 타고 10분 동안 달려온 정원까지 합치면…

상상이 가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크기에 나는 고개를 돌려 우리가 달려온 정원을 바라보았다.

앞뜰에 마련된 다과회장에서는 화려한 가발과 옷으로 치장한 귀족들이 미소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턱이 두 개, 아니 세 개는 되어 보이는 풍만한 체형의 아주머니들을 비롯해 두둑한 배를 자랑스럽게 내민 채 쫄바지를 입고 있는 아저씨들은 한 손에는 와인 잔을… 그리고 다른 한 손은 뒷짐을 진채 모두 똑같은 포즈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저게 귀족으로서 취해야할 기본자세가 아닌가 싶은데?

나는 장난삼아 귀족 아저씨들의 포즈를 흉내를 내다가 선생님께 귀를 잡혔다.

“아주 그냥, 잠시도 가만히를 못 있지?”

“아, 선생님. 저 귀 떨어지겠어요. 선생님. 아파요.”

그때 어디선가 장엄한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다과를 즐기던 사람들이 나팔소리에 정문 앞으로 모여 들자, 계단 위로 화려한 옷을 걸쳐입은 궁정 사람이 걸어나와 큰소리로 외쳤다.

“곧 프란츠 2세 황제페하의 축하연이 있을 예정이니, 귀빈들께서는 중앙 정원에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황제 폐하?

그러니까. 현 오스트리아의 왕이라 이거지?

후에 교과서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때의 프란츠 2세 황제는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짜 오스트리아의 황제로 취임한 것은 1804년경이라나?

그의 별명은 ‘착한 황제 프란츠’

음악을 비롯한 예술 문화를 굉장히 사랑한 황제였다.

베토벤 선생님과 수잔 누나를 따라 화려한 조명 빛의 중앙 홀을 통과하자, 눈앞에 굉장히 화려한 꽃들도 장식된 또 다른 정원이 나타났다.

사방이 벽으로 가로 막혀 있는 걸 보아. 쉔부른 궁전은 중앙이 뚫려 있는 ‘ㅁ’로 구성된 성임을 알 수 있었다.

청명한 달빛이 수많은 유리창에 반사되어 중앙 정원은 따로 조명이 없어도 굉장히 밝았다.

정원 안에 어느 정도 사람들이 모여 들자, 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한 남자가 굉장히 어설픈 왈츠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분명 들리는 것은 흥겨운 왈츠이긴 한데, 왠지 듣고 있는 내가 불안해질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이 흉흉한 템포는 뭐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피아노 옆에서 지켜 봐주는 한 남자는 계속 해서 그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아주 훌륭합니다.”

“조금만 더 흥겹게 템포를 유지하소서..”

“딴~ 딴~ 업~ 다운~ 딴따라라”

급기야 입으로 피아노 소리를 흉내 내며 지도까지 해주는 남자를 보니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어떻게든 연주를 이어 나가고 있긴 하지만…

정말이지. 요 근래 들어본 피아노 연주 중에 가장 형편없는 연주였다.

“와아~ 피아노 디게 못 친…”

뻐억!!

속삭이듯 입을 연 순간. 옆에 있던 선생님이 내 뒷통수를 후려 갈겼다.

“어억!!”

“아프냐?”

“엄청 아파요!!”

“나는 방금 네 덕분에 죽다 살아난 기분이다. 사람의 두 번째 생이라는 것이 그렇게 멀리 있는 게 아니었군.”

“네?”

그때 어설픈 피아노 연주를 끝내고 키가 큰 아저씨가 몸을 일으키자,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박수와 함께 다 같이 허리를 숙였다.

“어허허~ 미숙한 실력이 부끄러우니, 너무 요란한 박수는 사양하겠네.”

그제서야 선생님이 내 뒤통수를 후려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멀대 같이 키가 큰 저 아저씨가 바로 이 궁전에 살고 있는 프란츠 2세 황제였다는 것을…

“수많은 음악가들을 앞에 두고 피아노를 연주하려니, 평소보다 실력 더 안 나오는 것 같군. 안토니오 궁정악장.”

“아닙니다. 아주 훌륭한 연주였습니다. 마제스티.”

안토니오라 불린 남자는 피아노 위에 있던 악보를 돌돌 말아 황제의 옆에 섰다.

“방금 여러분이 들은 곡은 빈의 자랑이자, 나의 자랑인 궁정 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여러분들을 위해 며칠 밤을 세워 작곡한 환영곡이라네. 비록 나의 미천한 실력 덕분에 그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지만 말야~ 하하핫~”

음~ 정확히 알고 계시군..

이 것도 하마터면 입 밖으로 튀어 나올 뻔 했지만, 아직도 욱신거리는 뒤통수 덕분에 겨우 참아낼 수 있었다.

“연설은 짧게 끝내고 자네들과 연회를 즐기고 싶지만, 아무래도 아쉽군. 혹시 이 자리에서 방금 내가 친 곡을 대신 연주해 줄 음악가 선생 없는가?”

“오~ 마제스티. 소인의 곡을 생각해 주시는 폐하의 따스한 마음에 그저 감복할 따름입니다.”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누구든 손을 들어보게. 처음 쳐보는 곡일테니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그러자 베토벤 선생님이 나에게 말했다.

“어이, 꼬맹이. 네가 나가보지 그래?”

“네? 제가요?”

“일단 나가서 시간을 좀 끌고 있어 봐.”

“무슨 일 있어요?”

“아가씨 상태가 좀 이상하구나.”

선생님의 말에 수잔 아가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창백한 표정으로 손을 감싸고 있는 누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누나…?”

“응?”

“괜찮아요?”

“그게, 막상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할 생각을 하니까, 손이 막 떨려와서…”

애써 웃고 있긴 했지만, 부담감 때문인지 누나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런, 아무도 없나보군. 연주회의 시작을 산뜻하게 밝혀줄 인재가 이토록 없는 건가?”

“아무래도 폐하의 앞이라 다들 떨리나 봅니다.”

“그럼 궁정악장. 그대가 직접 들려주는 것은 어떻소?”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궁정악장의 왈츠가 끝나면 곧바로 연주회를 시작 하도록 하지. 자~ 모두들 안토니오군에게 박수를~”

수잔 누나와 내가 연습한 포르테 피아노 협주곡은 이번 연주회의 첫 번째 곡이라고 들었다.

베토벤 선생님께서 부로우닝 백작님과 함께 누나를 다독여 주고 있지만, 극도로 긴장한 탓에 그녀는 선생님의 목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제가 할게요!!”

“응?”

자신의 악보를 펼쳐들고 피아노 앞에 앉으려던 궁정악장은 내 목소리에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제가 한번 쳐볼게요. 궁정악장님의 왈츠…”

그러자 사람들 속에서 나를 찾아낸 프란츠 황제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피어올랐다.

“이거 재밌군. 수많은 음악가들 사이에서 저런 꼬마 아이가 도전할 줄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폐하.”

“그래, 좋다. 저 아이에게 이번 연주회의 첫 곡을 맡기도록 하지. 저 아이에게 길을 열어 주거라.”

황제의 명에 따라 사람들이 좌우로 흩어지며 무대로 향하는 길이 마련되었다.

갑자기 벌어진 뜻밖의 상황에 코끝이 간질거린다.

손등으로 코를 훔친 나는 무대로 향하기 전 수잔 누나와 눈을 마주치고 빙긋 웃어보였다.

‘누나가 열심히 준비한 포르테 피아노를 이렇게 망치게 둘 순 없지.’

* * *

잠시 후. 사람들을 헤치고 무대 위로 올라온 소년은 이제 기껏 해야 10살이 좀 넘어보였다.

궁정 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자신의 손에 꼭 쥐고 있던 악보를 소년에게 넘기며 농담 삼아 입을 열었다.

“꼬마야. 악보는 볼 줄 알겠지?”

“아니요.”

“뭐?”

뜻밖의 대답에 안토니오가 놀란 표정을 짓자, 소년은 오히려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아까 페하의 연주를 듣고 머릿속에 담아 두었으니까요.”

소년의 당찬 대답에 이번엔 프란츠 2세의 한쪽 눈썹이 꿈틀대었다.

자신이 연주한 곡은 완벽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 자신감은 대체 무엇일까?

프란츠 2세는 무대 위에 오른 꼬마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딱 한번 듣고 그걸 연주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소년은 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본래의 음계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궁정악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페하… 설마 이건?”

프란츠 2세와 궁정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꼬마의 대답에 옛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프란츠가 황제 자리에 오르고 며칠 뒤. 궁정에 찾아온 젊은 천재 음악가의 모습을…

어느새 피아노 앞에 앉은 민준은 머릿속에서 조각난 퍼즐을 맞추고 있었다.

워낙에 연주가 엉망진창이었던 터라, 반복되고 흩어진 선율들을 다시 재구성할 필요가 있었다.

‘좋아. 어느 정도 무슨 느낌인지 알겠다.’

이윽고 모든 머릿속에서 정리를 끝낸 민준은 차분히 건반 위에 손을 올린 뒤, 궁정악장의 왈츠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마치 옥구슬이 튀어 오르는 것처럼 경쾌한 리듬의 왈츠는 단조롭지만, 굉장히 재미난 곡이었다.

‘어라? 이 곡 되게 재밌네?’

피아노를 연주하던 민준은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작곡한 독특한 왈츠의 묘미에 금세 푹 빠져들었다.

한차례 완벽하게 떨어지는 템포로 연주를 마친 민준은 놀라워하는 프란츠 2세 황제를 향해 미소 지으며 템포를 더욱 올렸다.

그러자 민준을 지켜보던 궁정 악장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본래 그가 작곡한 왈츠는 황제가 직접 연주하는 만큼, 기품 있는 연주를 위해 천천히 가는 안단테(andante) 정도의 빠르기를 염두하고 작곡한 곡이었다.

하지만 소년이 치고 있는 자신의 곡은 알레그로(allegro)를 넘어서 한 단계 더 빠른 프레스토(presto)의 영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건 내가 작곡한 곡이 아냐.’

왈츠의 묘미인 두 번째 반복 연주를 시작한 시점부터 민준의 머릿속에 흩어진 퍼즐들은 조금씩 모양이 달라지고 있었다.

흩어진 음계와 템포를 모두 찾아냈지만, 민준의 머릿속에선 무언가 자꾸 어긋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렇게 연주하는 게 맞는 것 같긴 한데, 아직도 뭔가가 좀 부족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그렇게 세 번째 왈츠에 돌입한 순간.

민준은 어긋난 음계를 억지로 끼워 맞추기보다. 차라리 궁정악장의 곡을 통째로 들어내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순간.

쉔부른의 궁정의 중앙 정원에서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왈츠가 탄생했다.

한편 수잔과 함께 민준의 연주를 지켜보던 베토벤의 입에서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저 멍청이 녀석이 결국 사고를 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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